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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예학의 대가, 김장생 선생의 돈암서원 3

 

돈암서원의 강당인 응도당에서 정회당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정회당은 응도당과 같은 라인에 있지만 정회당이 입덕문을 향해 살짝 축을 틀어 앉아 있는 모습이다. 특별한 꾸밈없이 정직하게 쓰여진 정회당 편액은 기둥머리에 걸려있다.


정회당은 사계 김장생 선생의 아버지인 김계휘 선생의 서재로 대둔산 고운사 경내에 있었다. ‘정회당’이라는 편액을 건 김계휘 선생은 이곳에서 강학을 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정면4칸, 측면 2칸의 건물은 전면 1열과 좌우 1칸씩은 문이 달리지 않은 마루이다. 좌우 1칸끝의 머름은 설치하되 문은 달지 않아 개방된 느낌을 준다. 반면에 정면 가운데 2칸, 후면1칸에는 벽과 문을 달아 방을 만들어 외부의 시선을 차단했다. 건물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단층의 기단 위는 사방으로 전돌을 깔아 다른 건물과는 조금 다른 격을 느낄 수 있다.


정회당은 건물 기둥의 색이 조금씩 다르다. 건물 앞뒤로 주춧돌 위의 기둥 다리부분이 색이 다른데, 이는 빗물에 기둥 아래 부분이 삭아서 교체를 했기 때문이다. 건물 한 바퀴를 빙둘러 색이 다른 기둥들을 보니 건물의 세월이 느껴진다.      


정회당은 약 460여년 된 건물로 고운사 터에서 1954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비교적 작은 한옥이지만 김장생 선생의 부친인 김계휘 선생의 숨결이 곳곳에 스며있다. 정회당 옆으로는 오래된 향나무 한그루가 지지대를 받치고 서있다.


향나무 뒤로는 장판각이 자리해 있다. 장판각은 목판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다. 서원에서 책을 찍어낼 수 있는 목판은 서원의 가장 중요한 재산 중 하나이다. 이 목판은 ‘사계전서’, ‘황강실기’, ‘신독재전서’ 등 김장생 선생과 아버지 김계휘, 아들 김집의 문집들을 인쇄한 목판으로 돈암서원의 보물이다. 장판각은 삼면이 벽으로 막혀 있고 정면에 출입문이 달려있다. 출입문은 열쇠로 단단히 잠겨있는 모습이다.


장판각 바로 앞에 자리한 양성당으로 가보자. 형식적인 강당의 역할을 하는 양성당은 앞에 자리한 비석 하나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돈암서원 원정비다. 양성당 중심에 자리한 돈암서원 원정비는 받침대와 내용이 적힌 몸체, 그리고 머리부분으로 나뉜다. 받침대는 사각형으로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전체적으로 희끗희끗한 부분과 녹색, 검은색이 뒤섞여 한눈에도 오래되었음을 보여준다. 몸체는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이 원정비는 돈암서원이 이곳으로 옮겨 지어질 때 함께 옮겨온 것이다.


이 원정비가 처음 세워진 것은 현종10년(1669)이다. 비문은 송시열이 지었고, 글씨는 송준길이 썼는데, 앞부분의 전서체 제목은 김만기가 쓴 것이다. 내용은 돈암서원을 세운 이유와 사계 김장생 선생과 그의 아들인 김집의 학문과 업적들을 적었다.


원정비를 벗어나니 비로소 양성당의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 편액은 양성당의 마루 가운데 매달려있다. 양성당이라는 편액 글씨는 묘한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서체이다. 양성당은 정면 5칸 측면2칸으로 모두 10칸짜리 건물이다. 가운데 3칸이 마루로 되어 있는데 중간에 문을 달았다. 


양성당은 유생들이 모여 강학하던 서재로 돈암서원이 이곳으로 이전해올 때 당시 강당이었던 응도당을 옮겨오지 못하고 대신 이 양성당을 옮겨와 강당으로 사용했다. 나중에 응도당이 옮겨오면서 강당의 자리는 내주었지만 김장생 선생의 채취가 담겨 있어 양성당 자체로도 의미 있는 곳이다.


양성당은 사계 김장생이 낙향한 후 정회당 근처에 지은 서당이다. 김장생은 이 곳에서 30여년간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쓰다 83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마루에 걸터앉아 양성당과 김장생 선생을 생각해본다. 김장생 선생에게 있어 양성당은 어떤 의미였을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양성당과 같은 각자의 삶을 담아 방점을 찍을 만한 공간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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