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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칼럼] 화양연화(花樣年華)

 

꽃이 지고서야 문득 꽃을 보네/ 네가 떠난 뒤에 비로소 널 만났듯 / 향기만 남은 하루가/

천년 같은 이 봄날(민병도의 낙화)

 

화양연화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순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화양연화는 그때가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마련이다.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그때를 추억하기에 화양연화는 모든 사람의 가슴에서 아련히 살아있다. 잠시라도 내가 인생에 태어난 이유며 살아있음을 기억하는 의미있는 순간으로 말이다.

 

풋풋했던 20대 88올림픽이 열리던 해. 세계 석학들을 초청한 심포지엄 일로 한 친구를 만났다. 이후 줄곧 우리는 서로 의지하는 둘도 없는 친구로 살고 있다. 세월이 훌쩍 지나 직장을 그만두고 이 나이에 무슨 공부냐고 용기를 못 내던 친구가 최근 박사가 됐다. 그가 공부를 망설일 때 나는 강력하게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가 석사 학위를 받고 나서도 나는 그의 등을 또 밀었다. 늦었다하더라도 넌 공부하는 걸 좋아하므로 박사까지 마쳐야 한다고. 그러나 그의 박사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검은 머리는 새하얗게 되었고 눈은 침침해 두꺼운 돋보기를 쓰고서도 줄줄 눈물을 흘리며 공부를 이어가다가 결국 아파서 119에 실려 가기도 하였다. 그가 그 힘든 과정을 다 견디고 드디어 박사가 되었다. 난 친구의 화양연화는 울며 버텨냈던 박사과정의 시간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친구의 박사소식을 들으며 지난 나를 떠올렸다. 졸린 눈을 비비면서도 반짝이는 교회십자가와 나만 오롯이 새까만 밤을 가르며 이 세상을 지키고 있구나 하는 영웅심으로 웃픈 시간을 보냈다. 당시 내 책상 앞에는 르느와르의 “고통은 지나고 아름다움만 남는다”는 구원의 글귀를 붙여 놓았었는데 나는 이것을 무슨 기도문처럼 수없이 읽어가며 힘든 시간을 견뎠다. 무엇인가를 이루고 얻기까지 그냥 되는 법은 없다. 간절함만큼의 노력과 시간과 고통이 수반되어야 겨우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인생의 화양연화는 절로 이루어지는 법이 없지 싶다. 이런 관점에서 화양연화는 고통이 주는 선물이다. 나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르고 싶다. 자신의 인생에 온전히 집중하는 순간, 지금 이 순간이 화양연화라고 생각하자. 미래에는 이 순간을 화양연화라 부를지니…

 

역설적이지만 코로나19 사태는 문화예술계에 기적 같은 변화를 이끌고 있다. 관객의 발길이 사라지고 공연들은 전면 취소되었지만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들은 ‘코로나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바치는 공연’을 무관중 온라인 스트리밍의 형태로 업로드하고 있다. 지난 3월 런던 필 오케스트라는 베토벤의 현악 4중주를 유투브에 업로드 하였다. 지휘자 리카르도 무티는 이날 페이스북에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나아간 베토벤의 삶을 기억하고 힘을 내 극복하자고 우리를 격려하였다. 베토벤의 현악 4중주는 프랑스와 빈의 전쟁 와중에 베토벤이 지하창고에 숨어 작곡한 곡이다. 베토벤은 죽었으나 2백년이 지난 지금 전쟁 대신 코로나 바이러스와 싸우는 세계시민들을 위로한 셈이 됐다. 한때 자살을 결심할 정도로 절망에 빠졌다가도 기쁨과 희망 가득한 음악을 창작한 베토벤이기에 그의 음악에 담긴 삶에 대한 강한 긍정 그리고 그의 일생을 닮은 음악은 지금 코로나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위로하는 음악이자 고통을 이겨내자는 메시지로 다가온다.

 

마스크와 사회적 거리두기는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아주지만 음악이 주는 감동의 전파는 막을 수 없다. 코로나19 사태는 마스크를 쓰고 무관중으로 연주하는 예술가들로 하여금 이 날의 고통이 음악이 가지는 진정성에 더욱 집중하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고통과 슬픔이 음악을 만나 위로 받는 과정에서 진정 음악이 위로와 희망이라는 것을 알게 해줬다. 코로나19 사태를 극복하고서 다시 공연장의 문은 열릴 것이다. 그때가 되면 온전히 음악에 집중한 이때가 화양연화였다고 추억할 지도 모르겠다. 지나야 깨닫듯이 그때가 화양연화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