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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향기] 브루스케타

 

토마토가 지천인 계절. 보통 한 박스 사면 익은 것과 덜 익은 것으로 섞어서 산다. 그래야 익은 것부터 차례대로 먹을 수 있다. 마지막 몇 개는 물러서 버려야 했던 일을 두어 번 겪은 이후부터다. 붉게 말랑한 감정과 푸르게 단단한 감정들이 한 박스에 가지런하다.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근처였던가? 그 식당이. 트라토리아 정도의 식당이었는데 그때 처음 토마토 브루스케타를 먹었다. 바게트 위에 다진 토마토를 올려먹는 것으로 그리 맛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배가 몹시 고파서 맛있고 안 맛있고를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미술관을 나올 때쯤 딸들과 나는 기진맥진이었다. 평일이라 미술관 예약을 하지 않아도 될 줄 알았다. 숙소에서 나와 걸어서 미술관까지 갔다. 거기다 한 시간여를 기다리다 입장했고 미술관을 다 돌고 나오니 허기가 몰려왔다. 몇몇 관광객은 거리에서 치아바타 사이에 채소가 들어간 커다란 파니니를 먹었다. 아무리 배고파도 길거리에서 먹는 것은 절대 하고 싶지 않은 우리는 주변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이탈리아는 식당의 종류가 몇 가지로 나뉜다. 고급식당인 리스토란테가 있고 트라토리아는 그 다음 중간정도의 식당이다. 오스테리바는 동네 식당 정도이고 그 밑에 피자 같은 것을 파는 피자리아가 있다. 다니다 적당하다 싶으면 들어갔다.

 

식당 안은 비좁았지만 손님은 많았다. 메디치가의 한 사람으로 보이는 인물화가 벽에 걸려있는 것이 인상 깊었다. 그림 속 남자가 식당의 사람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몇 백 년 전에도 그렇지만 지금도 여전히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먹여 살리고 있었다. 무엇을 시켰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브루스케타와 파스타를 시킨 것 같다. 파스타는 그럭저럭 맛있었다. 사실 이탈리아 어느 식당이든 피자와 파스타가 특별히 맛없는 곳은 없었다. 토마토가 들어간 음식들은 대체로 다 맛있다.

 

브루스케타가 먹고 싶어졌다. 무르고 터진 토마토 같은 날들이었다. 어제도 물컹, 오늘도 약간 물컹. 마침 토마토도 있고 양파도 있다. 토마토와 양파, 치즈를 다지고 바질페스토와 섞었다.

 

토마토는 물렁한 것보다는 단단한 것을 쓴다. 그래야 입안에서 토마토를 아삭하게 느낄 수 있다. 바게트가 없지만 문제없다. 대신 식빵을 쓴다. 토마토와 양파 다진 것을 식빵 위에 올려 오븐에 잠깐 구웠다가 꺼낸다.

 

바삭한 빵과 토마토의 질감이 입안에서 부서진다. 피렌체에서는 미처 몰랐는데 제법 맛있다. 흐물흐물 무너지려는 자존감을 붙잡으며 브루스케타를 먹는다.

 

어떤 여행이고 힘들지 않은 여행은 없었다. 좌석 예약을 하지 않아서 기차 바닥에 캐리어를 깔고 앉아서 가던 일. 유레일패스에 날짜를 안 적어 패널티를 물던 일. 그런데 참 이상하지. 그렇게 힘들었어도 또 다시 여행을 떠난다.

 

만만한 삶이 어디 있을까. 토마토 한 박스처럼 물렁한 날도, 단단하게 날선 날도 있겠지. 뭉개진 마음 추스르며 토마토를 씹는다.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고 그랬지. 그때는 미처 몰랐던 브루스케타의 맛을 시간이 흐른 후에 깨닫는다. 지금 지나는 이 시간도 한참 지나서야 또렷해지고 확실해지겠지.

 

역시 여행은 고생한 것이 기억에 더 오래 남는다. 아프고 지독한 사랑이 잊히지 않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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