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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수의 인천얘기 2-부평 미군기지

 1945년 9월8일 오후 2시쯤 인천항 객선부두. ‘해방군’으로 3·8선 이남에 진주하는 미군을 환영하기 위한 인파가 빼곡했다. 천황의 항복선언이 나온지 20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치안유지 권한을 부여받고 있던 일본 경찰과 시민들 사이에, 곳곳에서 작은 실랑이가 잇따랐다.

 

그때 인천보안대원과 조선노동조합원들이 환영 현수막, 연합군기 등을 들고 부두에 도착했다. 이들이 일경의 경비구역을 통과하려던 순간 난데없는 총성 몇발이 울렸다. 권평근(당시 47세) 조선노조 인천중앙위원회 위원장과 이석우(26) 보안대원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여럿이 다쳤다.

 

이들의 장례는 이틀 뒤인 10일 시민들의 극렬한 분노 속에 답동성당에서 시민장으로 치러졌다. “일본인을 한 명도 남기지 말고 죽이자”는 처절한 외침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지만, 발포 경관에 대해 어떤 법적 처벌도 없었고 인천에 살던 일본인들은 그해 말까지 무사히 귀국길에 올랐다.

 

기나긴 대한민국 미군기지의 역사는 이렇게 무고한 시민들의 피와 분노가 뿌려진 가운데 시작됐다. 이 땅에 상륙한 미군은 1939년 일제가 중·일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 생산을 위해 부평에 건설한 조병창에 제24군단 예하의 군수지원사령부(ASCOM)를 설치했다. 남한에 들어오는 거의 모든 미군 군수품의 집합처였던 이 곳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도시와 다름없었다.

 

일반 시민은 접근조차 할 수 없는 ‘미군의, 미군에 의한, 미군을 위한’ 공간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미군기지가 처음 생긴 곳이 바로 인천이다. 미군의 진주와 주둔, 그들을 위한 기지. 80여 년째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미군기지는 이 땅 곳곳에 숱한 흔적을 남겼다.

 

해방과 전쟁 이후 모질었던 가난의 시절, 미군과 미군기지의 존재는 일정 부분 사회의 활력소였고 많은 이들이 기지에서 일하며 먹고 살았다. 당시 이곳은 국내 웬만한 직장보다 월급이 많아 들어가기 위해 소위 ‘빽’이 동원되는 일도 잦았다. 그 연줄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마치 자신이 특권층인양 주변에 으스대며 자랑하곤 했던 ‘스테끼(스테이크)’와 ‘지포라이터’의 기억이 새롭다. 동인천의 속칭 양키시장에 흔했던 미제담배와 커피병, 헐렁한 군복, 군화, 전투식량들도.

 

특히 미군기지를 빼 놓고 우리 음악을 얘기할 수 없다. 마땅한 공연장소가 없었던 1950~60년대, 가수와 연주자들에게 이곳은 최고의 무대였다. 미군기지에서의 공연경력은 ‘일류와 출세’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오늘날 ‘음악도시 부평’의 맥이 시작된 지점이다.

 

글쓴이는 몇 년전 ‘영원한 세계챔피언’ 홍수환씨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의 어머니는 부평 미군기지에서 일했다. 당시 어머니가 가져다준 버터를 먹으며 힘을 길렀고, 덩지 큰 미군들과 쌓은 대전 경험이 외국선수들과의 경기에서 큰 도움이 됐다는 그의 인천, 부평사랑은 지금도 뜨겁다.

 

어둡고 음울했던 그늘도 많았다. 양색시, 양갈보, 유엔마담이라고도 불린 양공주(洋公主)들이 몰려 있던 기지촌, 혼혈아들, 각종 폭행·성폭력·살인·총기사고, 한국인에 대한 멸시 등등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다. 그 안타까운 사연들은 오정희(중국인 거리), 오영수(안나의 유서), 유주현(임진강), 조해일(아메리카), 이원규(겨울새·달무리) 등 수많은 문학작품 속에 생생히 담겨 전해지고 있다.

 

사회 일각에는 미군기지를 제국주의 종속의 상징, 분단의 고착화, 민족갈등의 원인으로 보는 시선이 끈끈하게 존재한다. 부지 반환의 목소리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건 1980년대 말~90년대 중반이다. 인천에서도 1996년 지역 시민단체들이 기지를 둘러싸는 ‘인간띠 잇기’ 행사를 벌였고, 이어 ‘우리땅 부평미군기지 되찾기 인천시민회의’가 발족되면서 반환운동의 불꽃이 타올랐다.

 

이후 20여 년, 드디어 지난해 12월 한국 속의 미국땅이나 다름없었던 인천, 원주, 동두천 등 미군기지 4곳이 우리 품에 돌아왔다. 시는 1단계로 반환된 부지 가운데 일부를 시민의 날 전날인 오는 14일 개방할 예정이다. 미군이 주둔하면서 50년 간 꼭꼭 닫혀 있던 문학산 정상이 2015년 활짝 열린 데 이어 두 번째다.

 

시는 올해 안에 돌아올 나머지 부지를 포함해 향후 캠프마켓 44만㎡의 활용방안을 고민 중이다. 관련 전문가와 시민들의 의견을 폭 넓게 수렴하고 있다. 지난 4월 용역도 발주했다. 전쟁의 탓도 컸지만, 우리나라는 그간 조금이라도 ‘치욕’과 관련 있는 역사의 흔적을 지워버리기 일쑤였다. 그렇게 사라진 유적과 유물이 얼마이던가.

 

오욕의 세월도 우리역사다. 보전할 것은 최대한 남기고 간직해 ‘아련하고 아팠던’ 우리의 이야기를 후손들에게 오래도록 들려줄 수 있는 역사·문화유산으로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인천본사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