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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 가야가 3세기에 건국되었다고 우기는 역사학자들

다시 보는 가야사①

*총론과 본론이 다른 따로국밥 역사학

 

 

흔히 가야를 수수께끼의 왕국이라고 말한다. 경상남북도 일대에 가야관련 유적, 유물은 숱하게 널려 있는데, 가야사에 대한 체계적 기록은 부족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삼국유사』 「가락국기」가 가장 자세한 기록이지만 시조 김수로왕과 허황후에 대한 내용에 집중되어 있고, 그 이후의 임금들에 대해서는 아주 소략하다. 『삼국사기』는 「김유신 열전」에서 가야 시조와 건국시기는 적고 있지만 따로 「가야본기」를 편찬하지 않았다. 『삼국사기』가 부록 형태로라도 가야나 부여 같은 나라들에 대해서 서술했으면 연구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아쉽기 그지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야와 관련된 단편적 기록이나마 꼼꼼히 살펴보면서 그 전체상을 그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함은 물론이다.

 

가야에 대해서 한국의 대학 강단을 차지하고 있는 강단사학자들의 견해를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가야’ 관련 기술로 살펴보자. 먼저 가야에 대한 ‘정의’편에서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 6세기 중엽까지 주로 경상남도 대부분과 경상북도 일부 지역을 영유하고 있던 고대 국가”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 ‘정의’는 『삼국유사』 및 『삼국사기』의 가야 관련 사료를 잘 정리한 문장이다. 문제는 장작 본문은 정의와는 다른 내용들을 나열하고 있다는 점이다. 본문을 보자.

 

“가야는 변한의 12소국, 소국 연맹체, 초기 고대 국가 등의 단계를 거쳤다. 서기전 1세기 낙동강 유역에 세형(細形)동검 관련 청동기 및 초기철기문화가 유입되면서 가야의 문화 기반이 성립되었다. 서기 2세기경에는 이 지역에 소국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3세기에는 12개의 변한 소국들이 성립되었으며, 그 중에 김해의 구야국(狗邪國: 金官加耶)이 문화 중심으로서 가장 발전된 면모를 보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가야)”

 

‘본문’은 가야에 대한 ‘정의’의 내용을 설명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따라서 ‘본문’에는 가야가 ‘서기 1세기에 건국했다’는 내용이 들어가야 하는데, 정작 서기 2세기경에 소국들이 나타나 3세기에 12개의 변한소국이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가야는 3세기 이후에나 건국되었다는 것이다.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 6세기 중엽까지’ 존재했다는 ‘정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3세기 이후에나 건국했다고 쓰고 있는 것이다. 총론과 본론이 다른 남한 강단사학 특유의 ‘따로국밥 역사학’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1세기에 가야가 있었다는 차고 넘치는 증거들

 

 

남한 강단사학계가 무슨 근거를 가지고 3세기 이후 건국설을 주장하는지 살펴보자. 먼저 문헌사료로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서기 42년 김수로왕이 금관가야를 건국했다고 말하고 있고,『삼국사기』 「김유신 열전」도 “그(김유신) 12세 조상 김수로는 어디 사람인지 알 수 없는데, 후한(後漢) 건무(建武) 18년(서기 42) 임인에…나라를 열고 국호를 가야라고 했는데, 뒤에 금관국으로 고쳤다.”라고 말하고 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는 가야가 서기 42년에 건국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삼국사기』 탈해이사금 21년(서기 77)조는 “(신라의) 아찬 길문이 황산진(黃山津) 입구에서 가야 군사와 싸워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세기에 가야는 신라와 격전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신라의 파사이사금은 재위 8년(87) 가야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가소성(加召城)과 마두성(馬頭城)’을 쌓으라고 명령했다. 과연 재위 15년(94) 봄 2월에 가야군사가 마두성을 포위하자 아찬(阿飡) 길원(吉元)에게 기병 1천 명을 이끌고 격퇴하게 했다는 기사가 『삼국사기』에 나온다. 『삼국사기』는 「가야본기」는 편찬하지 않았지만 가야와 신라의 전쟁에 대해 아주 구체적인 기록을 남겼다. 파사이사금 17년(96)조의 기록을 보자.

 

“9월에 가야인들이 남쪽 변경을 습격하니 가성주(加城主) 장세(長世)를 보내 막게 했는데 적에게 죽임을 당했다. 왕이 노해서 용사(勇士) 5천을 이끌고 출전하여 패배시키고 포로로 잡은 자가 아주 많았다(『삼국사기』 신라 파사이사금 17년).”

 

이 기사는 짤막하지만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라는 6하 원칙에 다 들어맞는다. 전 세계 어느 역사학자도 시기와 장소와 인명이 모두 나오는 이런 기사를 거짓이라고 부인하지 못한다. 전 세계에서 오직 일본 극우파들과 이들을 추종하는 남한의 강단사학자들만 이런 구체적 기사를 가짜라고 부인한다.

 

다음으로 고고학 사료를 살펴보자. 고고학 사료로 국가의 존재를 파악하는 수단은 계급의 발생과 철기의 사용 여부 등이다. 계급의 발생은 지배층 무덤의 존재로 알 수 있는데 김해 대성동에는 서기 1세기 이전의 가야 고분들이 존재한다. 또한 남한 강단사학계도 서기전 1세기 초에 철기가 사용되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기 1세기 무렵부터 신라토기와 다른 가야 토기가 출토되고 있다(안춘배, 『가야토기와 그 영역의 연구(1994)』)

 

문헌사료는 물론 서기 1세기에 가야가 건국되었다는 고고학 유적·유물들도 차고 넘친다. 그러나 남한 강단사학은 3세기에야 12개의 소국이 성립되기 시작했다고 우긴다. 말은 실증사학이라면서 문헌과 고고학이라는 실증도 부인하고, 사료 없는 우기기가 횡행하는 것이다.

 

*북한은 가야 건국을 어떻게 보나

 

 

일제가 한국을 점령하기 전에는 1세기 가야건국설을 부인하는 학자는 없었다. 조선 후기 안정복(安鼎福:1712~1791)은 『동사강목(東史綱目)』 ‘가락국’조에서 “한 광무제 임인년(42) 개국하여 양(梁) 무제(武帝) 임자년(532)에 멸망했다”고 적었고, ‘대가야국’조에서는 대가야는 이진아시(伊珍阿豉)왕이 서기 42년 개국해서 16대 도설지왕(道設智王) 때인 진 문제 임오년(562)에 망했다“고 적었다.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등장하기 전에는 그 어느 학자도 가야가 서기 42년에 건국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일본인 학자들이 한국사 왜곡에 나선 이유는 ‘임나일본부’를 사실이라고 강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이 말하는 임나일본부설의 요체는 “서기 369년에 야마토왜가 가야를 점령해 임나일본부를 세우고 서기 562년까지 지배했다”는 것인데, 그 핵심이 ‘임나=가야설’이다. 남한 강단사학자들은 총론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을 극복했다”고 비장하게 선언한 후 본론에서는 “가야는 임나”라고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추종한다. 가야에 대한 정의와 본문 내용이 정 반대인 ‘따로국밥 역사학’은 남한 강단사학자들이 즐기는 메뉴다.

 

그러면 북한학계는 가야건국 시기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최근 『북한학계의 가야사연구(말, 2020)』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북한의 가야사 및 임나일본부 전문가인 조희승 박사가 집필한 책인데 건국 관련 기사를 보자.

 

“가야는 진국의 변한지역에서 B.C 1세기 말엽에 봉건소국으로 형성되었다가 1세기 중엽에 독자적인 봉건국가로 되었다…B.C 1세기경의 가야소국의 실태는 의창(경상남도 창원) 다호리 1호무덤을 비롯하여 고고학적 자료를 통하여서도 알 수 있다. 옛 문헌과 고고학적 자료는 김해 일대에서 봉건적인 생산관계가 발생하고 있었으며 B.C 1세기경에는 가야(구야) 봉건소국이 형성되였다고 볼 수 있게 한다…1세기 초엽경에 김수로를 우두머리로 하는 집단이 북쪽에서 내려와 가야(구야)땅을 비롯한 몇몇 소국들에 와서 이미 있던 지배세력과 타협, 결탁하여 지배권을 확립하였으며 1세기 중엽경에는 금관가야(김해가야)를 중심으로 가야봉건국가들의 련맹체(6가야)가 형성되였다.(조희승, 『북한학계의 가야사연구』)”

 

북한학계는 서기전 1세기 말경에 봉건소국이 형성되었다가 1세기 초엽경에 북방에서 온 김수로왕이 기존의 지배세력과 타협해서 지배권을 확립했고 1세기 중반경에 가야연맹체를 형성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표)가야 건국에 대한 남북한 학계의 인식

 

 

남한 강단사학계

 

북한 역사학계

가야 소국 형성시기 서기 2세기경 서기전 1세기경

가야 건국시기

3세기 이후 서기 1세기
가야연맹체 형성시기 3세기 이후

서기 1세기

 

앞서 설명한 것처럼 남한 강단사학계의 3세기 가야 건국설은 문헌사료는 물론 고고학적 발굴결과와도 일치하지 않는 비학문적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