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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박물관 기증유물 이야기(3)] 충심과 충렬의 기록

청해이씨 충장공 세마공파 종중의 기증유물
이지란초상, 이중로초상, 이중로정사공신교서를 중심으로

경기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상당수의 유물들이 기증 절차를 통해 들어온 것들이다. 개인이나 단체 등에게 있어 그 가치가 얼마나 소중할 지는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이에 본보는 기증된 유물들의 가치와 기증자들의 뜻을 기리는 의미에서 특별 기획 시리즈를 마련했다. 도박물관 전시실의 기증 유물을 중심으로, 총 10회에 걸쳐 그 내용을 소개한다. <편집자주>


경기도박물관과 청해이씨 충장공 세마공파 종중 유물의 첫 만남은 1997년 박물관 개관 1주년을 기념하는 '경기국보' 특별전시회에서였다.

 

전시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이 전시에선 경기도의 역사문화를 조명하는데 중요한 국보 6점, 보물 24점, 도유형문화재 2점, 문화재급 유물 41점 등을 선보였다. 여기서 청해이씨 종중이 포천 청해사(靑海祠) 사당에 고이 모셔온 이중로정사공신교서(보물 제1174-1호)가 관람객과 마주하는 순간이 펼쳐진 것이다.

 

 

전시 이후에도 청해이씨 종중과의 인연은 계속됐다. 종중에서 이중로정사공신교서뿐만 아니라 이중로초상을 경기도민을 위해 전시와 연구자료로 쓸 수 있게 배려해준 덕분에 한 동안 전시가 더 이뤄질 수 있었다.

 

이 시기 필자와 동료 연구사들은 공신교서와 초상화를 보다 가까이서 면밀히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교서의 내용과 역사적 의미, 초상화의 남다른 특징과 정교한 솜씨에 수없이 감탄한 기억을 뚜렷하게 간직하고 있다.

 

청해사의 유물들이 흩어지지 않고 오롯이 박물관으로 들어오기까지 조상 유품을 지켜내기 위한 종중 성원들의 피나는 노력도 보았다. 가까이는 6.25 전쟁 중에 일가친척들이 남북으로 흩어지는 비극 속에서도 ‘조상 유품이 우리의 몸이요 정신’이라는 일념으로 쌀보다 귀하게 여기며 초상화를 보관하고, 여러 문서류 등을 고이 접어 이불 밑에 깔아놓고 지켜냈다고 한다.

 

실제로 조상 유품을 간직해 온 여타 종중의 경험담에서 난리통에 몰려드는 피란민들에게 책자나 종이뭉치가 드러나는 순간, 그것이 순식간에 추위를 녹이기 위한 불쏘시개로 화해 재로 변해버린 이야기를 접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종중 유물의 기증에 대한 이야기는 2000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그해 10월 청해사에 보관돼 있던 100여 점의 유물이 박물관 품으로 들어왔다.

 

기본조사를 거쳐, 2002년부터 2003년까지 이지란초상과 이중로초상의 보존처리를 실시하고, 두 초상화의 모사본을 옛 방식에 따라 제작해 종중에 전달하기도 했다. 이어 2004년에 이중로초상을 국가지정문화재로 신청, 보물 제1174-2호로 등록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청해이씨 종중의 기증유물은 전시실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됐는데, 특히 이지란초상, 이중로초상, 이중로정사공신교서는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 글에서는 세 작품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한다.

 

이지란초상 속의 주인공 이지란(李之蘭)(1331~1402)은 본래 여진인으로, 본명은 퉁쿠룬투란티무르(佟古倫豆蘭帖不兒)이다. 1371년(고려 공민왕 20)에 고려에 귀화해 함경도 북청(청해의 별칭)에 거주하면서 이씨 성을 하사받고 청해이씨의 시조가 됐다.

 

그는 이성계와 의형제를 맺고 충심으로 보좌, 조선 개창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에 봉해졌으며 뒷날 태조 이성계의 묘정에 배향됐다. 이지란의 초상은 반신상으로 조선 후기에 원본을 바탕으로 다시 옮겨 그린 그림이지만, 조선 초기 공신도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다.

 

 

여기서는 이지란초상을 마주했을 때 공통으로 생겨나는 현상적 특징에 주목하고자 한다. 즉 사람들은 초상화를 보기 전에 이지란이 수많은 전장을 누빈 ‘용맹한 무장’이었다는 사실에 몰입하지만, 실제 초상 속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이러한 생각이 사정없이 요동치는 경험을 한다. 역사 기록에서도 이지란초상을 처음 마주하는 사람들의 이같은 감정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17세기 말의 문신 박세당은 어느날 이중로의 후손집에서 보관 중인 이지란초상을 보고 ‘화상(畵像)이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같아 괴이하나 이것이 바로 인간 제일의 영웅임을 알겠네’ 라고 시로 표현했고, 1746년(영조 22) 9월 4일의 『승정원일기』에 영조가 이지란초상에 대해 묻자 약방 도제조 조현명이 ‘초상의 얼굴이 부인과 같습니다’라고 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1774년(영조 50) 함경남도 북청군 신상리에 세운 이지란 신도비에도 ‘공은 용모가 단정하고 아름다워 마치 여인네와 같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의 생각과 느낌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해 오늘날 전시실에서 마주하는 초상 속 무장 이지란의 모습 또한 먼저 아름다운 여인의 풍모가 배어나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이중로(李重老)(1577~1624)는 개국공신 이지란의 8세손으로 무과에 급제, 이천부사로 재임하던 중 1623년 서인세력이 주도한 인조반정에 가담해 그해 윤10월 18일에 확정된 정사공신 녹훈에서 2등 공신이 되고 청흥군(靑興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인조반정 후 혼란이 가라앉지 않고 논공행상에서도 이견이 분분하던 차에 2등 공신 책록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1624년(인조 2) 1월 평안도에서 반란군을 이끌고 한양 도성으로 남하하는 일이 발생, 이중로는 황해방어사로서 관군을 이끌고 예성강 상류 마탄에서 반란군을 저지하는 전투 중에 철총으로 적 7인을 쳐 죽이고 스스로 언덕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인조실록 1624년 2월 25일의 기록을 보면, 왕이 마탄 전투에서 전사한 이중로와 그 가족을 애석히 여겨 궁금해하자 신하들이 이중로의 머리를 찾았다고 왕에게 아뢰고 있으며, 왕이 어떻게 이중로의 머리를 찾았느냐고 묻자 전투 중에 좌협장 유효걸이 여러 시체들 속에서 찾아 전복으로 싸서 묻고 표시를 해두었다가 가져왔다는 사실을 아뢰어 왕이 이중로의 충렬을 다시 상기하고 있다. 

 

실록의 기록에 인조반정이 있던 1623년(인조 1) 당시 정사공신은 1등 10명, 2등 15명, 3등 28명 등 모두 53명을 녹훈했으나, 1624년(인조 2) 1월 이괄의 난이 일어나면서 여기에 연루된 이흥립(1등), 이괄(2등), 김원량(3등) 등 3명의 녹훈이 취소됐다.

 

그래서 정사공신의 최종 확정은 1625년(인조 3) 4월 이후에 50명으로 정해졌으며, 그 실증적 기록이 이중로정사공신교서에 나타나 있다. 이런 점에서 이중로정사공신교서는 인조반정부터 이괄의 난을 거쳐 정사공신이 확정되는 시기의 역사적 변화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주요 기록이며, 이중로초상 또한 당시 공신도상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공신교서에는 이중로의 초상을 그려 후세에 길이 남기고 관직을 2계급 올려주며, 또한 부모, 처자에게도 마찬가지로 2계급 올려주고, 큰아들에게는 이중로가 누리던 벼슬의 지위를 영원히 세습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또한 관에서 일하는 노비와 공신에게 내리는 노비 등을 합쳐 19명의 노비, 밭 80결, 은 30량, 옷감 1단, 말 1필 등을 내리도록 지시하고 있다.

 

이중로초상은 그가 마탄 전투에서 48세로 전사한 후 1625년에 공신교서를 내리며 함께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현존하는 정사공신 도상은 전반적으로 날렵하고 준수하며, 매우 동적이고 강한 느낌을 주는데, 그 중에서도 이중로의 초상은 얼굴의 붉은색감이 강한데다 윤곽선이 뚜렷하고 젊고 준수한 특징이 두드러진다.

 

그의 지위가 무관 종2품이라는 점, 정신과 신체가 조화를 이루는 40대 후반이라는 점, 전투에서 전사한 후에 그려졌을 것이라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조선 중기 정사공신 도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앞에서 세 가지 유물을 중심으로 살펴본 청해이씨 종중의 기증유물은 초상화, 공신교서, 문서류, 책자 등 종류가 다양해 한 집안의 생활상을 넘어 조선시대 격변기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의미있는 자료로서 손색이 없다.

 

무엇보다도 영조 이후 역대 국왕들이 이지란초상을 언급하거나 친람하면서 그의 충심을 높이 사고, 이중로의 행적을 기리면서 충렬을 강조한 점은 후대의 모범으로 삼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세마공파 종회장에게 전해 들은 후일담이 하나 있다. 유물기증이 있은 후 거의 2년여에 걸쳐 박물관에서 이지란초상과 이중로초상의 모사본을 제작해 종중에 기증했었다. 사계절이 한 바퀴 더 돌아간 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어느날, 옛 문화재를 탐내는 일군의 무리들이 증거를 남기지 않는 교묘한 수법으로 청해사에 들이닥쳤다고 한다.

 

다행히 조상의 소중한 유품들은 이미 박물관이 안전하게 품고 있었기에 유품들이 정처없이 흩어지는 화를 면한 것이다. 박물관과의 끈끈한 인연이 닿아 있는 것이 현재라면, 많은 사람들에게 영구히 관람할 수 있는 기회가 계속된다는 것은 미래라 했다. (글=김준권 경기도박물관 수석학예사)

  

[ 정리 / 경기신문 = 강경묵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