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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하늘의 창] 돈의 행방에 대하여


 

자작나무 숲이 눈 속에 묻혀 있는 사진을 본다. 폭설이 주는 경이로움과 두려움이 교차한다. 겪어보지도 않은 러시아의 겨울인데 상상만으로 이미 샤프카라고 불리는 털모자와 함께 두터운 옷을 당장 꺼내 입어야 할 것 같다. 꽁꽁 언 굵은 수염에 긴 외투를 온통 걸친 장대한 사나이가 거침없이 저벅저벅 다가오는 느낌이다. 동장군(冬將軍)이다.

 

고골의 <외투>는 그런 혹한(酷寒)의 현실에서 태어났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랬단다. “우리 모두는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 강철같은 바람 가릴 길 없는 빈궁의 구덩이에서 탈출하려는 이들의 뼈아픈 서사, 그 기원에 대한 증언이다.

 

- 외투를 빼앗긴 사람들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라는 만년 9등관 하급관리는 성실하나 남루한 인생을 살아간다. 입고 있던 외투는 더이상 수선해봐야 소용이 없을 정도로 낡아 그는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형편에 넘치는 돈으로 새 외투를 산다. 무척 행복해졌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강도에게 외투를 강탈당하고 만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인생 전체가 송두리째 사라진 듯한 고통이 엄습해온다. 끈많은 상류계급도 아닌 터에 황량한 도시에서 어디 박혀 있는지도 모를 말단관리를 지켜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는 옷을 입고 있어도 벌거벗은 인간이다.

 

외투를 찾기 위해 사방에 하소연을 하지만 돌아온 것은 고관들의 멸시와 난데없는 병이었다. 결국 그는 애통하게 죽고 만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어느 날인가부터 페테스부르크에는 외투를 빼앗는 유령이 출몰한다. 가난한 이들의 한이 구천을 떠돌며 러시아의 현실을 폭로하고 역공을 펼친 셈이었다. 고골의 작품에 민중이 환호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이다.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를 멸시했던 고관 하나도 유령을 목격하고 외투를 빼앗긴다. 그날 이후 유령은 자취를 감췄다. 억압적인 신분제도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게 지속되는 빈곤, 그리고 바뀔 것 같지 않은 세상에 대한 책임은 살아있는 이들에게 넘겨진다.

 

고골의 또 다른 작품 <죽은 혼>은 죽은 농노를 살아있는 것처럼 꾸며 이를 은행에 저당잡혀 한 몫 챙기는 협잡군의 이야기다. 지주들을 찾아다니며 사망한 농노등록명부를 사들여 조작한다. 희대의 사기행각이다.

 

주인공 치치코프는 6등관 관리로 신분을 위장하고 낯선 지방도시에 나타난다. 그리고는 그곳의 유력 인사들을 모두 자신에게 호감을 갖도록 만든다. 정보를 캐고 인맥을 짠 뒤, 만일의 경우 자기를 지킬 수 있는 방도까지 만들기 위한 술책이었다.

 

치치코프의 언변은 아주 짧은 시간에 자신을 그 지방도시의 유명인사로 만드는데 손색이 없었다. “평판”이란 어느 곳에서도 잘만하면 자본과 권력이 될 수 있는 법이다.

 

“관리들 모두 이 새 얼굴의 방문에 만족했다. 현 지사는 그를 사상이 온건한 사람이라고 하였고 지방 검사는 그가 수완가라고 하였으며 헌병 대장은 그를 학자라고 하고 소장은 그가 능숙할뿐더러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고 하고...” 그에 대한 여론은 확실해졌다. 모두가 거짓에 취했다. 그럴 만 했다. 만사 이런 식이었으니 말이다.

 

“아직 5등 문관밖에 되지 않는 부지사와 소장과 대화할 땐 실수인 양 두 번이나 ‘각하’라고 불렀는데, 그 단어가 그들 마음에 쏙 들었다.”

 

- 누구를 위한 법과 제도일까?

 

이러면서 서로 봐주고 밀어주는 관계가 농밀하게 만들어져갔다. 농노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신분질서의 견고함이 주는 특권을 누리는 자들의 세상이었다.

 

<춘향전>의 이도령이 암행어사의 신분을 숨기고 거지꼴을 하고는 변학도의 생일잔치에 퍼부은 싯귀 그대로인 현실이다.

 

“금준미주천인혈(金樽美酒天人血)에 가성고처원성고(歌聲高處怨聲高)라.” 아이고, 금으로 만든 술동이라니! 그런 게 있었단 말이냐? 거기에 담긴 술은 수많은 인민의 등골을 짜낸 피가 아니더냐? 백성들이 무슨 고생을 하는지 돌아보지 않고 너희들끼리 희희낙락 노래하며 즐기고 있으니 도처에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을 찌를 것이로다!

 

클린턴 행정부 당시 노동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가 쓴 책 <자본주의를 구하라(Saving Capitalism)>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다큐는 대단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넷플릭스Netflix에서 볼 수 있다.) 정치권력이 미국의 자본주의 시장 질서를 어떻게 자기들에게만 유리하게 법과 제도로 만들고 보통의 시민들은 계속 가난에 허덕이게 만드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다큐에 등장하는 이들은 자기들은 투표 때만 시민이라며 결국 정치인들은 거대 자본과 기득권의 요구에 따라 움직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맥도날드 계산대에서 일하는 어느 여성은 만성적인 저임에 시달린다. 자기는 맥도날드가 하루에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지 현장에서 알고 있다며 그러면 임금을 더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항변한다.

 

그러나 거대한 부자들의 권리는 법과 제도로 그야말로 깨알같이 보호받고 있다. 보통의 사람들은 날로 좌절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한 나라의 의료는 공공체제와 거리가 멀다. 지불해야 하는 댓가는 높기만 하다. 미국에서 병원은 마음 놓고 가는 곳이 아니라 맘먹어도 쉽게 갈 수 없는 곳이다.

 

지난 해 우리는 우리 사회의 특권적 위치에 있는 세력의 현실을 목격했다. 대자본은 물론이고 검찰, 사법부, 의료계, 종교계, 언론계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치권은 일반 시민들의 고통과 상관없는 세계 속에 살고 있다. 검찰개혁은 “법의 정의”에 대한 갈망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더 깊게 파고들면, 부와 권력의 강고한 카르텔을 지키는 힘의 급소를 허물지 않으면 우리 사회의 약자들이 겪는 고통은 끝 간 데를 모를 것이라는 깨우침이 그 위용에 찬 물결을 만들었다.

 

검찰개혁이 곧 민생(民生)이라는 각성이었다. 쑨원이 “민생”이라는 말을 꺼냈을 때 그것은 민중의 경제적 삶이 공평하고 평등하게 보호받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통과에 늑장을 부리고, 부동산이 삶의 토대가 아니라 부의 증식수단이 되는 현실을 격파하는 것에 정치권이 진력을 다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절망의 늪은 입을 더욱 크게 벌리고 있다.

 

COVID 19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현실은 강추위에 떨며 지쳐있는데 정작 해결의 책무를 지닌 이들의 태도는 여전히 어쩡쩡하기만 하다. 그럴 싸한 말만 하고 있다. 그렇다면 도시의 유지 모두에게 좋은 평판을 받으려는 일에만 신경을 쓰는 치치코프와 뭐가 다를까?

 

이를 정면으로 마주해서 풀어내지 못하면 대중의 분노는 파시즘을 불러올 공산이 커진다. 모든 최선의 진보적 의제를 말로만 장착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소멸이 보여준 역사다.

 

로버트 라이시는 오늘의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핵심을 “끼리끼리 자본주의” 즉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라고 칭한다. 이는 1997년에서 1998년 동아시아를 휩쓴 금융위기 당시 이미 논파 되었던 명칭이다. 투기적 금융자본주의의 부패구조를 직시한 통찰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저들끼리 해 먹는다”는 뜻이다. 이런 체제에서 정치는 일반 시민들이 낸 세금으로 이뤄지는 대자본 지원 정책은 허다하나 가난한 이들에 대한 지원은 어떻게든 주지 않으려 든다. 이윤은 제 것으로 독차지하고 부담은 남들이 다 져라, 식이 된다.

 

이와 같은 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명백하게 폭력이다. 보통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저임에 시달리고 시장의 가격은 거대 자본이 결정하는 대로라 더 많이 지불해야 하며 인생은 빠듯하게 조여서 영혼까지 메말라 버리고 말지 않겠는가? 적지 않은 이들에게 경제적 불안은 일상이 되었다.

 

- 사람을 구해야 한다, 사람을!

 

살아 있는데 죽은 혼이 되는 셈이며 유령이라도 되어서 한을 풀고 싶은 이들이 늘고 있다. 자살률을 따져보라. OECD 국가 1위를 20년 가까이 기록하고 있다. 산재(産災)는 또 어떤가? 역시 마찬가지다. 매일 10명 내외의 목숨이 노동현장에서 일회용처럼 궤멸되고 있는 판이다.

 

이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되고 만다. 루쉰(魯迅)의 <광인일기(狂人日記)>가 기록한 현장은 1918년대 중국만이 아니다. 식인(食人)의 역사를 정직하게 대면해야 한다. 그 작품의 끝은 이렇게 되어 있다.

 

“인간을 먹은 일이 없는 아이가 아직 있는지 모르겠다. 아이를 구하라.”

 

우리의 미래를 구해야 한다. 아니면 우리는 또 다시 서로 잡아먹고 살아야 하는 야만의 정글에 무한히 갇히고 말 것이다. 새해 초장에 손쉬운 저가(低價)의 희망을 말하는 것은 기만이 될 수 있어 주저스럽다. 있는 대로 직면하자. 그래야 답이 나온다.

 

눈을 씻고 봐도 없는 돈이 누군가에게는 주체할 수 없이 차고 넘친다. 지배 카르텔의 우애는 사실 돈이다. 온세계가 찬양해마지 않았던 미국 미국 민주주의의 허상을 1950년대에 적나라하게 파헤친 사회학자 씨 라이트 밀즈(C. Wright Mills)가 폭로한 “파워 엘리트”는 그렇게 세상을 다스려오고 있다. 우리는 이러다가 신분의 외모만 달라진 농노제도를 자기도 모르게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우리는 보다 심층으로 들어가 해결의 열쇠를 발견해야 한다. 그물을 깊게 드리울 것이다. 하늘의 창은 그렇게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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