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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갑의 難讀日記(난독일기)] 그

 

 

 

시간은 기억나지 않는다. 술집 문을 막 열고 나서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골목길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기대앉은 그의 머리 위로 굴러 떨어졌다. 말끔한 코트 차림의 중년 사내였다. 차림새만 보아서는 지린내 나는 골목 담벼락과 어울리지 않았다. “왜, 이러고 계세요?”라고 물었을까. 정확히 무어라고 하면서 그의 옆에 앉았는지 기억이 없다.

 

그는 손가락으로 앞에 놓인 소주병을 가리켰다. 그리곤 말이 없었다. 그의 시선은 나를 향하지도 소주병을 향하지도 않았다. 목적지를 알 수 없는 그의 시선은 세상살이에 쫓긴 도시 너머 어딘가로 향했다. 그가 바라보는 또 다른 세상은 어떤 곳일까. 갑자기 그가 측은했다. 아니, 측은해 보여서 좋았다. 측은한 것들은 측은한 것들의 심정을 본능으로 느낄 수 있어서, 그의 측은으로 나의 측은을 달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조잘거렸고, 그는 빈 종이컵에 소주를 채워 내 앞에 내려놓았다. 비움과 채움이 반복되었다. 측은이 측은을 채우면 다른 측은이 측은을 비웠다. 채우고 비우는 측은들의 행동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내가 마실 때면 그가 말을 했고, 그가 마실 때는 내가 주절거렸다. 골목길 담벼락에 기대고 앉아 어깨동무도 했었던가.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그와 나는 주고받은 전화번호로 서로의 안녕을 빌었다. 그 역시 택시 안이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온 나를 보며, 아내는 “미쳤어”를 연발했다. 비틀거리는 나를 방안으로 이끌 때 그랬고, 바지와 코트에 얼룩진 흙을 털 때 그랬고, 그와 보낸 골목길에서의 시간에 대해 전해 들을 때도 그랬다. 아내는 “미쳤어”를 내뱉을 때마다 내 등짝을 후려쳤는데, 그와 골목길에서 보낸 시간에 대해 전해 듣는 대목에서 후려치는 손매가 제일 드셌다. 그 순간에는 “이 사람이 진짜”라는 말도 덧붙였던 것 같다. 아내의 “미쳤어”는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미치지 않고는 살기 힘든 세상이다. 온통 하나에 미쳐서 살아야 성공한다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때의 미침은 아내가 뱉은 미침과는 결이 다른 것일까. 그와 나눈 통화기록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의 전화번호를 차마 지우지 못하고 ‘새로운 연락처’에 저장했다. 저장할 때, 성도 이름도 몰라서 그냥 ‘그’라고만 입력했다. 저장을 하고나자 카카오톡에 그가 새로운 친구로 등록되었다. 카카오톡 배경화면 속의 그는 가족과 함께 활짝 웃고 있었다.

 

살다보면 누구나 어두운 골목길에 한번쯤 주저앉을 때가 있다. 일부러 드러낼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애써 감춰야 할 무엇도 아니다. 주저앉는 순간이 있어야 털고 일어날 순간도 생긴다. 주저앉음을 두려워하지 말자. 골목이든, 놀이터 미끄럼틀이든, 화장실 바닥이든, 그 어디든 무슨 상관이랴. 들키지 않으려 애썼을 뿐, 나는 수도 없이 주저앉았다가 다시 털고 일어났다. 그 또한, 겨울을 털고 일어나 봄을 향해 나아갔을 것이다.

 

그러면 됐다. 주저앉아야 할 것은 우리가 아니라 겨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