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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사실(事實)의 해방, 그리고 사실(史實)”

 

“금병동(琴秉洞)”이라는 이름은 한국 사회가 잘 알지 못하는 이름이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조선인의 일본관', '일본인의 조선관' 단 두 권이 번역되어 있을 뿐인데 뒤의 책은 지금은 아예 품절이다. 여기서 번역이라는 대목이 “뭔가?” 싶을 텐데, 금병동은 재일사학자이고 저서는 일본어로 쓰인 까닭이다.

 

2008년 타계한 그의 최초 업적은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에 대한 학살 조사였다. 일본정부의 조직적 관여를 밝혀낸 것이다. 한일관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관동대지진 학살 문제는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는 것이 지금까지의 현실이라는 것을 떠올려보면 그야말로 선구적 작업이다.

 

- 금병동, 강덕상이 쓴 역사

 

1963년에 출간된 '관동대지진과 조선인'은 역시 같은 재일사학자로 여운형 전기를 쓰게 되는 강덕상 등이 함께 한 책이다. 강덕상의 '여운형 평전'은 조선 독립운동사 전체의 맥락을 짚어볼 수 있게 정리된 탁월한 저작이다.

 

한문으로 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1972년 일본어로 먼저 번역되는데 그 번역자가 바로 강덕상 선생이다. 한국어 번역은 1년 뒤인 1973년이다. 박은식 선생의 책이 1920년 출간되었다는 걸 안다면 기가 막힐 일이다.

 

그러나 사정이 있었다. 독립운동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해방이 된 이후 오랫동안 좌익운동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역사의 진상을 밝히는 일은 위험한 일이었다.

 

친일세력이 주도권을 잡은 나라의 처지가 그랬다. 6~70년대 고등학교의 한국 근현대사 교육이 1919년 3·1 운동에서 딱 멈춘 이유도 그런 현실이 작용했다. 1920년대로 넘어가면 우리의 독립운동 역사는 이념적 분화가 이루어지고 대척점에서 친일세력의 조직화가 동시에 진행된다. 그걸 파고들면, 좌파 독립운동의 역사가 읽혀지게 되고 민족을 배반한 친일세력의 계보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런 상황의 연장선에 있던 박정희 체제에서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일이 순조로울 리 만무했다. 만주의 무장항일투쟁에 대한 사료편찬 문제로 70년대 초반 조동걸, 홍이섭 교수 등이 곤욕을 치루었고 독립운동가 이강훈 선생도 같은 운명으로 시달렸다. 그는 광복회 회장을 지낸 인물이었는데도 말이다.

 

만주, 그러니까 동북 3성 지역의 조선인 항일무장투쟁에 김일성을 포함시키려던 시도가 이들이 겪은 고초의 내용이었다. 김일성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와는 별도로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일치”를 추구했던 사람들의 역경이었다.

 

여운형의 독립운동가로서의 역사적 위치가 공인된 것도 2005년이나 되어서였다. 그의 이름을 우호적으로 거론하는 것은 위태로움을 자초했던 때가 있었다.

 

강덕상은 여운형에 대해 쓰면서 '내가 보기에 독립운동의 중심은 김구도 아니고 이승만도 아니다. 광복후 외세의 개입이 없었다면 여운형이 민족 지도자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한다. 재미 원로 정치학자 이정식 교수도 몽양 여운형 전기를 쓰면서 강덕상의 책을 보고 따라갈 수 없다고 토로하기조차 했다. 우리의 역사교육에서 몽양은 지금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까?

 

-김옥균과 일본, 박정희와 일본

 

다시 금병동 선생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면 그의 저서 가운데 1천쪽이 넘는 대작이자 필생의 역작은 '김옥균과 일본'이다. 부제는 “그 체일(滯日)과 궤적”으로 김옥균의 일본 체류시기에 대한 연구이자 조선혁명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시도한 결실이다.

 

친일세력으로 매도되기도 하는 김옥균의 일본체류 시절의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캄캄한 대목이다. 이 책은 그 빈틈을 메꿔주는 매우 중요한 저서다.

 

그러나 이 책이 번역되는 건 아직 쉽지 않아 보인다. 책의 두께도 만만치 않을 뿐만 아니라 책의 첫 대목에서 김일성의 김옥균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짧게나마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는 김옥균을 친일파로 보는 것은 당시 부르주아 혁명단계에 들어선 일본의 상황, 그리고 이와 연동되어 있던 조선 개화파의 지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라는 취지의 입장을 밝힌다. 혁명가 김옥균의 위상을 정확히 짚어봐야 한다는 뜻이다. 이 대목만 빼고 번역하면 되는걸까?

 

1958년, 한국은 국가보안법으로 일제강점기 연구가 봉쇄되어 있다시피했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젊은 역사연구자들이 “조선근대사료연구회”를 결성하고 조선총독부 고위관리들을 면담, 그 녹음 기록을 남겨 중요한 사료를 작성했다. 이 책은 '식민통치의 허상과 실상'이라는 제목을 달고 2002년이 돼서야 비로소 우리말로 일부 번역되어 나왔다. 거기에는 “이만큼 한국을 키워준 것은 일본 아닌가?”라는 발언이 기록되어 있다.

 

아니나 다를까. “키워준 일본에 대한 감사의 고백”을 누군가 한다. 1961년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존 에프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만나기 전 일본 도쿄에 먼저 들린다.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일본 총리의 환영 만찬에서 그가 특별히 불러 달라고 한 노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나구모 신이치로(南雲親一郞). 박정희의 민주 육군군관학교 시절 교장이었다.

 

“후보생일 때 가르쳐주셨고 육군사관학교에 추천해주셔서 제가 육사를 나와 한국을 대표해 일본총리와 만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공식 역사에서는 지워진 대화다.

 

일본감옥에서 10여년 수감되어 있다가 일본공산당 서열 3위까지로 올랐던 독립운동가 김천해에 대한 역사의 기억은 말살되어 있다. 지워진 것은 같으나 그 의미는 사뭇 다르다.

 

사실(事實)에 대한 제한없는 치열한 논쟁은 사실(史實)로 가는 가장 정확한 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길이 매일 사라지고 있는 걸 오늘도 보고 있다. 사실이 망기지면 역사는 허위가 되고 만다. 진실은 탐색의 자유에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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