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3 (월)

  • 맑음동두천 10.4℃
  • 맑음강릉 14.3℃
  • 맑음서울 12.4℃
  • 맑음대전 12.1℃
  • 맑음대구 14.3℃
  • 맑음울산 15.4℃
  • 맑음광주 12.8℃
  • 맑음부산 15.7℃
  • 맑음고창 10.5℃
  • 맑음제주 14.1℃
  • 맑음강화 12.6℃
  • 맑음보은 8.9℃
  • 맑음금산 9.3℃
  • 맑음강진군 12.1℃
  • 맑음경주시 13.1℃
  • 맑음거제 14.3℃
기상청 제공

[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십자가의 비밀”

 

예수를 골고다 언덕에 끌고 가서 처형한 십자가는 예수에게만 적용된 특별한 방식이 아니었다.

 

기원전 71년, 로마에서 카푸아로 이어지는 아피아 가도(街道)에는 십자가들이 줄지어 박혀 있었다. 장장 2백 킬로미터다. 그 길 위의 십자가 행렬은 죽은 자들에 대한 기념비가 아니라 노예반란의 처형 현장이었다. 그렇게 못박혀 죽은 이들은 무려 6천여명이었다.

 

기원전 73년부터 2년간 벌어진 내전에 가까운 노예 봉기는 “스파르타쿠스”라는 인물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다. 로마에 살고 있는 인구의 3분의 1 가량이 노예였으니 이들이 들고 일어난 것은 로마 지배층으로서는 사생결단의 사태였다.

 

- 아피아 가도의 비극

 

훗날 케이사르와 함께 제1차 3두 체제를 이루었던 크라수스 그리고 폼페이우스가 이 노예반란 진압에 마침내 성공한다. 이들이 집행한 십자가 처형은 반란자에 대한 응징방식이었고, 로마가 제국으로 팽창하면서 반기를 든 이들은 모두 그렇게 목숨을 빼앗겼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도 다를 바 없는 운명에 처한다. 기원전 63년 로마가 이 지역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도처에서 저항이 일어나지만 당대 최강의 제국 군대를 이길 도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저항이 멈추지는 않았다. 알렉산더 제국에도 항거하면서 독립을 쟁취한 역사는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갈릴리 지역은 예로부터 풍요로운 농지였고, 외세가 침략하면 가장 먼저 수탈당하는 곳이기도 했다. 물론 내부의 지배세력도 이곳을 지배하는 것이 곧 권력을 확실하게 쥐는 기반이었다.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가까운 셉포리는 저항의 중심지가 된다. 로마제국의 군대가 이를 그대로 놓아둘리 없었다. 기원전 4년, 셉포리에서 일어난 반란은 무자비하게 초토화된다. 십자가 처형의 참극이 여기서도 벌어졌다.

 

- 셉포리의 반란과 예수

 

산 사람의 팔과 다리에 못을 박아 생채로 십자가에 매단 채 죽이는 이 형벌은 애초에 카르타고의 처형방식이었다. 그건 패장에 대한 징벌이었으나 로마가 카르타고와 전쟁을 벌인 뒤 이를 도입하면서부터는 반란자에 대한 사형제도로 바뀐다. 정치범 처단이었다.

 

그런 폭력으로 유지되는 제국의 휘하에서 헤롯은 로마제국의 진압작전에 함께 한다. 제국이 그 지위를 보장해주는 이른바 분봉왕(分封王)이던 그의 가문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거대하게 짓기 시작했다. 종교적 위신으로 자신을 엄호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리고 제사장을 비롯한 지배세력에게 특권을 주어 성전을 이득을 취하는 곳으로 만들어버린다. 지배세력의 동맹체제를 만든 것이다

 

그 성전건축에 동원된 민중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헤롯왕가와 협력관계가 된 제사장을 비롯한 자들은 민중의 고혈을 짜는 일에 손발을 맞춘다. 바로 이랬기에 나중에 예수가 그 성전의 으리으리함에 놀란 제자들에게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지지라”고 했던 까닭이 달리 있지 않았다.

 

게다가 예수는 그 성전을 가리켜 “강도의 소굴”이라고 했으니 이들 제사장과 지배세력이 예수를 가만히 둘 턱이 없게 된다.

 

셉포리 반란이 일어난 갈릴리 지역은 수도 예루살렘의 지배층으로서는 특별한 경계대상이었다. 갈릴리 출신들 가운데 반란세력에 가담한 이들이 적지 않았고 나중에 예수의 수제자가 되는 베드로도 바로 그런 세력인 ‘열심당’의 일원이었다. 예수는 이 갈릴리 출신의 두목이었던 셈이다.

 

- 누가 결국 이기는가?

 

예수가 태어난 때와 자라난 나사렛은 이 셉포리 반란의 유혈극이 일어난 시기와 장소에서 멀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그가 듣게 되는 이야기들은 다름 아닌 통곡의 역사였다. 정의로운 세상을 기대하는 것은 상상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시대였다.

 

그러니 요주의 지역인 갈릴리 출신이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야 하는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 아니었다. 갈릴리 사투리를 예루살렘에서 쓰는 것은 멸시와 경계의 대상이 되는 것이었고, 위험분자로 취급당할 일이었다. 게다가 제사장이나 지배계급인 바리새인들과 척지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헤롯에 대한 욕을 하고 다니는 것은 더군다나 어리석다.

 

그런데 예수는 헤롯을 “저 여우”라고 비판했고 곳곳에서 제사장, 바리새인들과 충돌했다. 그는 이들이 짓밟는 힘없는 백성들 편에 철저하게 섰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이에게 하는 것이 나에게 하는 것과 같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이 있다. 부자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그를 낳고 길러낸 어머니인 갈릴리 출신 여인 마리아의 기도는 더욱 맹렬하다. “제왕들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비천한 이들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자들을 빈손으로 떠나 보내셨습니다.” 마리아의 이 기도를 오늘날 교회는 입에 잘 올리지 않는다.

 

예수가 처형당하는 십자가는 바로 이렇게 모든 폭력적인 억압자들에게 고통당하는 이들 편에 선 댓가다. 그러나 이 십자가 처형은 예수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하나님 나라 운동의 종말을 가져오지 못했다. 패배한 것은 십자가 처형의 집행자들이었다. 부활, 곧 죽어 어찌 할 도리 없다고 여긴 생명운동의 새로운 시작이 들불처럼 일어났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부활은 “봉기”의 뜻도 가지고 있다. 진압된 반란이 숨죽이고 다 무너진 듯 하지만 때가 이르면 다시 일어나 새로운 날을 이루어낸다는 것이다. 노예로 살았던 이들이 새로운 세상의 주인이 되는 감격이다.

 

우리를 끊임없이 노예로 만들려는 세력이 무뤂꿇는 날이 반드시 온다. 얼마 남지 않았다. 십자가의 부활을 믿는 이들을 이길 것은 없으니까.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