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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 파사석탑과 가야 최초의 사찰

가야불교 이야기⑦

 

 

 

◆452년에 가야불교가 전래?

 

다시 가야불교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가야 불교의 전래시기를 452년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아래 기사를 근거로 삼은 견해다.

 

“원군(元君:수로왕)의 8대손 김질왕(金銍王)은 정치에 능력이 있고 부지런하며 또 참된 것을 매우 높였는데 세조모(世祖母) 허황후를 위해서 그의 명복(冥福)을 받들어 빌고자 하였다. 그래서 원가(元嘉) 29년 임진(452)에 원군과 황후가 혼인한 땅에 절을 세우고 왕후사(王后寺)라 하였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근처의 평전(平田) 10결을 헤아려 삼보(三寶)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삼게 하였다(《삼국유사》 〈가락국기〉)”

 

김수로왕의 8대손인 김질왕이 시조모 허황후를 위해서 452년에 김수로왕과 허황후가 혼인한 땅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왕후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기록을 근거로 452년 가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되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 기사는 452년에 가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되었다는 기록이 아니라 가야에 사찰, 그것도 시조모를 위한 왕실사찰이 세워졌다는 기록이다. 가야에 언제 불교가 전래되었는지를 추적할 때 파사석탑을 빼고 말할 수는 없다. 《삼국유사》 권3 〈금관성 파사석탑〉조는 파사석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금관(김해) 호계사(虎溪寺) 파사석탑(婆裟石塔)은 옛날에 이 읍이 금관국이었을 때 시조 수로왕의 비인 허황후 황옥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48)에 서역의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싣고 온 것이다.”

 

김해 호계사의 파사석탑은 허황후가 서기 48년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서술이다. 파사는 승려를 뜻하는 말이니 파사석탑이 불탑이라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허왕후가 가져온 파사석탑은 현재도 수로왕릉 앞의 비각에 존재하고 있는 물증이다. 그 재질이 한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이미 했다. 허왕후가 파사석탑을 가져온 것은 서기 48년인데 그 후손 질지왕이 왕후사를 세운 것은 404년 후인 452년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파사석탑은 400년 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이는 누가 봐도 의문이 생기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파사석탑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일연은 〈금관성 파사석탑〉조에서 이런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수로왕이 허황후를 맞이해서 함께 150여 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나 이때는 해동에서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있지 않았다. 대개 상교(像敎:불교)가 아직 이르지 못해서 토인(土人)들이 믿고 복종하지 않았으므로 본기(本記)에는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 제8대 질지왕 2년(452년)에 이르러서 그 땅에 절을 세웠다.”

 

이 기사에서 중요한 것은 “(불교에 대해서) 토인들이 믿고 복종하지 않았다”는 구절이다. 토인들은 물론 토착 가야인들을 뜻하는데, 이들은 가야 전통종교나 신앙을 믿고 있었기에 새로 들어온 불교를 믿고 복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기(本記:가락국기 본기)에는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허왕후가 믿는 불교를 토착 가야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가락국기》 〈본기〉에는 사찰을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는 말이다. 지금도 파사석탑이 보존되어 있는 것은 범상한 일이 아니다. 파사석탑은 일곱 개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어서 쉽게 해체될 수 있는 구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가야사람들이 소중하게 보존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삼국유사》 〈금관성 파사석탑〉조에서 파사석탑의 사연에 대해 말하고 있는 내용이 중요하다. 〈금관성 파사석탑〉조는 석탑을 싣고 온 사연을 구체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처음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장차 동쪽으로 가려 하였는데 파도신의 노여움에 막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 부왕(父王)에게 말하였다. 부왕이 이 탑을 싣고 가라고 명하니 이에 건너는 이로움을 얻어서 가져와서 남쪽 해안에 정박했다.”

 

허왕후가 아유타국에서 가야로 오려는데 파도가 심해 올 수 없었다. 파사석탑을 배에 싣자 쉽게 바다를 건널 수 있었다는 것이다. 파사석탑에 파도신의 분노를 가라앉히는 영험한 힘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는 허왕후가 독실한 불교신자였음을 뜻한다. 그런데 허왕후는 가야사람들에게 큰 추앙을 받았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허왕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온 나라 사람들은 땅이 무너진 것처럼 슬퍼하면서 구지봉(龜旨峰) 동북 언덕에 장사지냈다. 그리고 마침내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왕후의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처음 배에서 내려 닻을 내린 도두촌(渡頭村)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였다. 또한 비단바지를 벗은 산등성이를 능현(綾峴)이라 하고, 붉은 기가 들어왔던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하였다.”

 

가야사람들은 왕후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왕후의 발자취가 닿았던 곳곳에 왕후와 관련된 지명을 붙여 기렸다. 그런 지명들은 가야시대는 물론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시대까지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허왕후는 가야의 왕비가 된 이후에도 불심을 버리지 않았을 것이고, 파도를 잠잠하게 해 주었다는 영험한 석탑을 방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왕후와 그를 따라왔던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파사석탑을 모시는 사찰을 세우고 예배를 드렸을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가야의 첫 사찰이 되는 것이다. 역사상 수많은 순교(殉敎)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종교는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가치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허왕후의 오빠 장유화상이란 인물

 

허왕후의 핏줄을 계승한 직계 후손들이 시조모를 더욱 기렸을 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 따라서 452년의 왕후사 창건 기록은 수로왕과 허황후가 혼인한 곳에 왕실 사찰을 세웠다는 기록이지 이때 가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되었거나 가야에 첫 사찰이 세워졌다는 기록은 아닐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옛 가야지역에 장유화상(長遊和尙)에 대한 구전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장유화상은 보옥선사라고도 하는데 비록 후대에 쓰여진 것들이지만 그에 대한 수많은 기록이 남아 있고 유적들도 남아 있다. 사료는 글로 쓴 문헌사료와 입으로 전하는 구전사료로 나눌 수 있다. 문헌사료가 주로 지배층이 기록한 역사라면 구전사료는 피지배계층이 입에서 입으로 전한 역사이다. 흔히 입에서 입으로 전한 역사는 신빙성이 떨어질 것으로 생각하지만 구전사료는 한 두 사람이 전해서는 보존되기 힘들다. 다수의 민중이 입에서 입으로 전한 집단 구전이기 때문에 후대에 전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구전사료가 문헌사료보다 더 높은 사료적 가치를 가질 수도 있다.

그런데 장유화상에 대한 내용은 구전사료뿐만 아니라 김해 김씨 족보에도 실려 있다. 족보는 특정 조상을 선조로 모시는 후손들의 집단기록이기 때문에 위조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김해 김씨처럼 가락국의 왕족이었던 가문의 족보는 위조하기가 더욱 쉽지 않다. 이런 점에서 장유화상은 파사석탑과 함께 가야에 불교가 언제 전래되었는지를 말해주는 열쇠를 쥔 인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