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유(有)나 공(空)에 치우치지 않는 절대적인 도리를 중도(中道)라고 한다. 불타는 신도들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무언(無言)으로 일관 했다고 원시경전(原始經典)은 전하고 있다. ‘무기(無記)’라든지, ‘일체불설(一切不說)’ 따위가 그것이다. 예컨대 ‘나’라는 것은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영혼’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또 ‘내세(來世)’는 실제로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이같은 양자택일적인 물음에 대해 불타는 무언으로 응대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진리는 하나가 아니며 고립된 존재도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 불타 특유의 표현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연기(緣起)는 불교에서 매우 큰 이상이다. 그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고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어느 한 쪽에 기우러져 있지 않다. “내가 있으므로 너 있다”인 것이다. 우(右)도 좌(左)도, 선(善)과 악(惡)도, 빛(光)과 그림자(影)도 각기 반대가 있기 때문에 서로 존재한다. 이 양방을 시계 추 마냥 흔들어 움직이는 것이 세계다. 그런 의미에서 서양근대의학의 입장도 옳고, 동양경험의학의 입장도 옳다. 때로 서로가 대립하고 우왕좌왕 하는 가운데서 중도라고 하는 보이지 않는 길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건강을 보는 눈도 편견일 때가 많다. “이것만 하면 만병은 낫는다”고 하지만 절대적인 건강법은 없는 법이다. 우리들은 건강법만 아니라 다른 일상의 일도 ‘참뜻’을 모른채 맹신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다. 도움이 되지 않는 것과 도움이 되는 것 사이에 건강법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겐 건강이 최고다. 그런데 인간들은 아집에 빠지기 쉽다. 아집은 몸에도 이롭게 못하지만 더불어 사는 세상 살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중도가 약이다.
이창식/주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