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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자주독립은 언제?”

 

- 전쟁의 후방기지

“대한민국 정부는 대일본 정부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십분 편의를 제공하고 대일본 정부가 전항(前項)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군략(軍略)상 필요한 지점을 수의(隨意) 수용할 수가 있다.”

 

여기서 ‘전항’은 바로 앞의 항목으로 “대일본 정부는 대한국의 독립 및 영토보존을 확실히 보호한다”를 가리킨다. 이게 도대체 뭘까? 게다가 어떤 군사전략상 필요한 지역에 대한 수용을 요구하는 것일까?

 

이는 러시아와의 전쟁에 들어간 일본이 육군 2개 사단을 조선 땅에 상륙시키면서 맺은 이른바 동맹조약의 내용이다. ‘동양평화’를 내세워 “대한제국은 일본을 굳게 믿고 시정(施政)개선에 관해서도 충고를 받아들일 것”을 제1조로 못 박은 협정으로 말이 협정이지 강제체결된 조약이었다. 1904년의 일이었다.

 

이듬해인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우리에게 강요한 “을사보호조약”이라는 이름의 식민지 체제를 장착하기도 전에 조선은 이미 국권을 고스란히 상실했던 것이다. 조선땅 천지를 전쟁의 후방기지로 삼아 어디든 일본이 원하는 곳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압박에 저항하지 못했으니 그다음 수순은 정해져 있었다.

 

 

- 러일전쟁, 조선과 만주를 겨냥하다

일본은 러일전쟁이 조선의 독립과 영토보존을 지켜주기 위한 것이라고 정당화하고 시정개선 운운으로 내정간섭을 노골화했다. 1895년 청일전쟁(淸日戰爭) 이후 10년 동안 일본은 대(對)러시아 전쟁 준비에 국가의 역량을 총력 투입했고 그 “최종목표는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배와 만주점령”이었다.

 

청일전쟁은 일본이 이겼으나 러시아, 프랑스, 독일 3개 나라가 개입해 들어오면서 대련, 여순이라는 요충지가 있는 요동(遼東)을 러시아에게 빼앗기자 이에 대한 앙갚음과 함께 애초의 동아시아 지배전략 재추진이 러일전쟁에 담긴 일본의 의지였다. 동양평화가 아니라 전란(戰亂)의 시작이었다. 조선은 이를 위한 군사기지가 되었고 이후 내내 일본의 대륙침략에 필요한 발판이 된다.

 

《러일전쟁》(한길사)의 저자 와타 하루키(和田春樹) 역시도“전쟁의 명칭은 ‘러일전쟁’이지만 전쟁의 본질은 조선을 차지하기 위한 ‘조선전쟁’”이라고 파악한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진행된 중화체제의 붕괴를 기반으로 조선과 만주를 놓고 각축을 벌인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동아시아 패권질서에 대한 대결전(大決戰)이었다.

 

시간을 뒤로 돌려보면 청일전쟁 직후인 1896년, 3국 개입을 주도한 러시아의 세력이 조선에서 팽창하자 친러파가 된 민비를 시해한 일본의 위협에 고종은 러시아 공관에 피신해 임시정부를 차린다. 역사가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기록하는 사태다. 왕이 남의 나라 공관에서 집무를 보니 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당연히 거덜이 났다.

 

- 병든 개처럼 누워 있는 조선인가?

이 시기 외부대신이던 이완용은 미국인에게 평안도 운산 금광 채굴권과 경인철도 부설권을, 러시아인에게는 함경도 무산지방과 강원도 울릉도의 목재 채벌권을 내준다. 영국인에게는 평안도 은산 금광, 독일인에게는 강원도 금성 금광 등을 넘긴다.

 

어디 그뿐인가. 경의선 철도 부설권은 프랑스와 일본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다가 결국 선점했던 일본에게 주고 만다. 《한국통사(韓國痛史)》에서 쏟아낸 백암(白巖) 박은식의 통렬한 고발이다.

 

이완용이 그러고 있는 사이에 러시아 공관에서 자신을 지킬 조선인 병력 하나 없게 된 고종은 칙령을 내린다.

 

“짐의 불운으로 인해 반역자들은 해마다 문제를 일으켰다. 병사여! 와서 우리를 보호하라. 그대들은 짐의 자식이다.”공포에 질린 왕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조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분명했다.

 

이 칙령의 내용은 시인 김수영이 그의 시“거대한 뿌리”에 등장시켰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가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이라는 기행기에 남긴 기록이다.

 

이방인의 눈에 담겨 전해진 풍경이 모두 정확하거나 이해가 깊은 것은 아니었더라도 그녀가 본 당시 조선은 형벌은 잔혹했고 개천은 더러웠으며 병든 개들이 거리에 누워있었고 사람들은 무기력한 모습이었다. 아니었겠는가, 죄다 뺏기고 살아가는데. 그녀는 1894년에서 1897년 사이에 네 차례 조선을 다녀갔다. 격동의 시기였다. 어떤 때였는가?

 

- 청일전쟁, 조선의 운명을 비틀다

 

 

임오군란(1882년)과 갑신정변(1884년)에 이어 일어난 청일전쟁(1895년)은 단지 일본과 중국의 전쟁만이 아니었다. 앞의 두 사건에서 청은 일본의 힘을 압도했다. 군란 때 대원군은 청군의 수장 마건충에게 체포되어 북경으로 끌려갔었고, 정변 때에는 원세개가 고종을 끼고 사태를 진압했다. 청일전쟁은 이런 정세를 뒤집는 일대 사변(事變)이었다.

 

일본이 이 전쟁을 통해 구축한 또 하나의 전선은 동학농민전쟁이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세를 몰아 동학농민군을 철저하게 궤멸시키고 만다. 이리저리 흩어진 농민군들을 전라도의 섬 진도까지 쫓아가서 학살의 끝을 보였다.

 

100년이 지난 1995년 그 학살당한 농민군 지도자의 유골이 일본 홋카이도(北海島) 대학 인류학교실 표본창고에서 발견된다. 지금은 원광대 총장이 된 박맹수 교수가 이 문제에 파고 든다. 이노우에 가쓰오(井上勝生)는 《동학농민전쟁과 일본》이라는 책을 통해 동학 농민군 학살을 저지른 청일전쟁의 진상을 밝혀낸다. 일본의 침략에 저항한 조선의 민중은 이렇게 죽어갔다.

 

이들의 추적은 청일전쟁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일본의 야만을 드러냈고 조선의 통곡을 일깨웠다. 그러나 비극의 역사로만 끝나지는 않았다. 학살의 범죄를 증언하는 것과 동시에 항전의 역사도 이어지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청일전쟁 연구의 대가 후지무라 미치오(藤村道生)는 그의 저작 《청일전쟁》(소화 펴냄)에서 “청일전쟁은 그 이후 50년에 걸친 일본 제국주의의 중국 전쟁의 발단이자, 1945년 일본 제국주의 패배에 이르는 중일 50년 전쟁의 제1차전이라는 위치를 가지고 있다.”라고 규정했다.

 

앞으로 아시아가 겪을 일을 내다보게 한 전쟁이었다. 아시아 민중 전체를 전쟁의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1941년 일본의 하와이 기습으로 점화된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발단은 이렇게 조선의 운명을 일본이 틀어쥐고 시작되었던 것이다. 조선은 이른바 해양 세력과 대륙세력의 충돌 그 중간에서 자신을 지켜내지 못할 때 어떻게 되는지 역사가 입증한 것이다.

 

그런데 후지무라 미치오는 이와 함께 “청일전쟁은 제국주의 세계질서의 형성과정에서 전란의 희생자가 된 아시아 민중들의 저항과 도전이 시작된 과정이었다”며, “특히 조선민중들의 항전이 동아시아 근대사의 중요한 대목”이라고 강조했다.

 

학살과 항전이 교차되는 지점을 주목한 후지무라 미치오는 동학 농민전쟁의 패배와 식민지로 전락한 역사가 시대의 종말이 아니라는 것을 목격했다. 조선 민중이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따라 동아시아의 역사는 달라지게 되는 것을 제대로 본 것이다. 훗날 조선독립투쟁의 과정에서 중국 혁명사에 참여한 조선인들이 감당하는 역할은 두고두고 우리가 새롭게 깨우쳐야 하는 대목이다.

 

 

- 무지하면 비극을 되풀이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는 시련의 시절을 통과해야 했다. 비통한 역사였지만 거기서 깨우친 지혜로 우리를 점령해버린 상대의 속셈을 제대로 간파하고 그걸 힘을 합쳐 돌파해나가야 했다. 일본은 어떤 속내를 지니고 있었는가?

 

“만일 청국이 어떤 명의를 대서라도 조선에 군대를 출병한다고 할 때에는, 우리나라도 그들의 군대에 상응하는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여 예측할 수 없는 변란에 대비해야 한다. 조선의 내란은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아서 조선의 내정개혁이 필요하다.”

 

이는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전 당시 일본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가 기록한 《건건록(蹇蹇錄)》이라는 기밀 외교문서의 한 대목으로 부제는 “일청전쟁외교비록(日靑戰爭外交祕錄)”이라고 붙어 있다. 그가 ‘내란’이라고 부른 동학농민전쟁의 제압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 조선의 내치에 간섭하겠다는 의도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문건이다.

 

무쓰 무네미쓰는 지금도 일본의 외무성에 유일하게 서 있는 동상의 주인공이며 청일전쟁의 외교사령탑이었다. 이 《건건록》은 조선 내 비밀정보망을 동원해서 조선의 내정을 파악하고 조선지배전략을 어떻게 밀고 나갔는지를 적어 놓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문서다.

 

이걸 읽고 있노라면 당시 일본이 얼마나 치밀하게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정리해서 자신의 입지를 굳혀나가고 조선을 집어삼키려 했는지를 뼈아프도록 알 수 있게 된다. 동아시아 문명권 전체가 격변을 하고 있는 시기에 어떤 방도를 취해 제국 일본의 위상을 확보해나갈 것인지를 궁리해내는 일본의 무서움과 맞닦뜨리게 된다.

 

 

- 지금 우리는?

그렇다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겪은 100년 뒤 우리는 얼마나 더 지혜로와졌을까? 우리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대한 연구도 여전히 부족하고 그 과정에서 일본이 취한 국제전략의 내용에 대해서도 무지한 상태라고 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일본이 제1차 대전 이후 성립된 국제연맹의 상임이사국으로 활동했고 세계 해군력 3위를 확보한 위상에 있었다는 것을 아는 이도 적다. 1910년에서 1945년은 그저 일제 강점기로 다 정리되고 만다. 이런 인식은 이후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완료되면서 미국의 패권이 지배하는 동아시아의 구조에 대한 역사적 이해도 제약하고 있다.

 

중화체제의 오랜 지배와 붕괴, 일본의 패권교체, 그리고 이 패권의 몰락이 만든 공간에 들어선 미국의 세계체제 속에 빨려 들어간 한반도는 따라서 여전히 온전한 자주국가가 아니다. 러일전쟁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영국, 만주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미국의 지원으로 일본이 수행할 수 있었던 전쟁이다.

 

1902년 영일 비밀동맹과 1905년 태프트-카츠라 밀약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주도권을 인정한 국제정치였다는 걸 우리는 이제 모르지 않으며, 1953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연합국과 일본의 종전강화(終戰講和)조약이라는 틀을 가지고 있으나 미국의 아시아 냉전구도의 확정을 위해 우리의 민족적 이해를 희생시켰다는 것 또한 아는 이가 늘어나고 있다. 한일협정의 굴욕적 내용은 이 결과이고 이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현안 아닌가?

 

조선에서 선교사이자 의사로 활약했던 호러스 알렌(Horace Allen)은 러일전쟁의 시기 일본의 편을 들면서 루즈벨트 정부에게 이렇게 말한다. “조선은 자치의 능력이 없다. 일본처럼 문명화된 나라가 조선을 접수하는 것이 마땅하다.”미국의 뛰어난 역사가 월터 라퍼버(Walter LaFeber)가 미국과 일본의 관계사를 정리한 그의 책 《충돌(Clash)》에서 밝힌 내용이다.

 

미국은 일본의 한일합방에 반대한 적이 없다. 그리고 지금도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에 대해 입을 연 적이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대일본 정부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십분 편의를 제공하고 대일본 정부가 전항(前項)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군략(軍略)상 필요한 지점을 수의(隨意) 수용할 수가 있다.”

 

이 문서의 현대판이 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지 않은가? 우리는 아직도 외국군대가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보호하는 나라 신세인가? 러일전쟁은 미국과 중국의 대결로 바뀌었을 뿐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외교성과가 크다. 글로벌 파트너십의 새로운 지평이 열린 감동이다. 이때 하나 더 생각해보면 어떤가? "외국군대의 주둔." 

 

G7 국가의 반열에 들어서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데, 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