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복 76주년을 맞아 찾은 양주시 광적면 ‘만세배미’에는 지금도 독립운동의 함성이 들려온다.
1910년 대한민국(당시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자 1919년 3월 1일 전국 각지에서 울분을 참지 못한 국민 200만 명(추산)이 참여한 가운데 3.1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양주시 가납리에서도 항일 독립운동이 일어나 김진성, 백남식, 이용화 열사 3명이 일제에 저항하며 독립 만세운동을 하다 순국했다.
양주지역 독립 만세운동은 3·1운동보다 27일 늦은 1919년 3월 28일 일어났다.
역사적 그날, 광적면 만세 시위는 면 소재지인 가납리에서 3월 초부터 만세운동 분위기가 전달되고 시위를 주동하는 사발통문이 나돌면서 만세 운동 분위기가 고조됐다.
당시 항일운동 중 광적면 만세 시위는 양주군 안에서도 가장 격렬하게 전개됐다.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효촌리 출신 김진성, 백남식, 이용화 열사는 광적면 시위를 벌이기 위해 만세 시위대를 이끌고 10리 길을 단숨에 내달려 장고개를 넘어 광적면 가납리에 도착해 태극기를 휘날리며 만세를 외쳤다.
이때 광적면 가납리에서 광적·백석면 주민들이 모여 만세를 부른 시위대는 줄잡아도 950명에 달했다.
인근 의정부에서 급파된 일제헌병들과 보조원 노호연, 광적면장 이하용이 도착했다. 헌병들이 논둑 위에서 주모자를 찾으며 군중들에게 해산을 명령했다.
그러자 이용화 열사가 “삼천리 국토를 강도질한 놈들이 적반하장으로 조국독립을 하려고 부르는 만세를 부르지 말라, 가거라, 건방진 소리냐”며 크게 꾸짖으며 불응했다.
그러자 헌병들이 발포했고 시위대 선두에 서 있던 김진성, 백남식, 이용화 열사가 현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당시 만세 시위 현장이었던 가납리 732-4번지 일대는 현재에도 ‘만세배미’(만세답)로 불리고 있다.
1985년 창단한 ‘양주가래비 3·1운동 순국기념 사업회’는 1986년 6월 광적면에 3·1운동 기념비를 건립하고 한국역사상 최대의 민족 저항운동에 대한 추모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현재 건립된 순국기념비는 2007년 당시 순국열사들이 만세운동 현장에서 제막식을 열고 일제헌병들의 무차별 사격에 의해 현장에서 순국하신 김진성, 이용화, 백남식 열사의 숭고한 독립의 뜻을 기리기 위해 기념식 및 재연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 경기신문 = 이호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