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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섬을 가다 48 - 백령도 천주교 이야기(1)

한반도 바닷길을 통한 가톨릭 선교의 중심지, 백령도

 백령도에서는 김안드레아병원, 에드워드 모펫(한국명 부영발, 傅永發), 백령성당, 공소(公所), 인천교구 순교 신심 순례지 등 천주교 관련 명칭이 다른 어떤 지역보다 주민에게 친숙한 용어들이다. 아니 백령도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으며, 모든 주민의 마음속에 오롯이 기억되는 사실들이다.

 

즉 백령도 최초의 의료시설이었던 김안드레아병원, 1960~70년대 백령 주민에게 의료 및 교육, 식량 원조 등으로 마음속에 기억되는 부영발 신부, 대청·소청도를 포함해 마을 곳곳에 분포하고 있는 천주교 공동체인 16개 공소 등 천주교는 백령주민에 대한 정신적 일체감의 한 축을 담당했다.

 

백령도에서 천주교는 본당이 설정된 지 63년째,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지만 1960년대 당시 본당 완공을 위한 종교적, 지역적 분위기 조성과 기반 형성은 훨씬 그 이전부터다.

 

▶ 2019년 백령성당, 인천교구 순교신심순례지 승인 및 선포

 

2019년 인천교구 순교신심순례지로서 백령성당이 승인되는데, 그 이유를 보자. “나. 정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을 따라 백령 앞 바다를 통해 이땅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기억하고, 그들의 역사를 소중히 간직하기 위하여 교구 직권자에게 맡겨진 교회의 성화 임무에 근거하여 이곳 백령도 성당을 순교 신심을 위한 교구 순례지로 승인합니다. 2019년 3월 19일. 천주교 인천교구장 정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

 

승인 목적을 보면 백령도는 한반도에 천주교를 전파한 선교사의 발자취가 깃들어 있는 지역이며, 한반도 천주교회사와 맞닿아 있다. 즉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초기 역사가 백령도와 밀접하다는 점인데, ‘백령도’에는 어떤 종교적 사실이 숨어 있을까?

 

▶ 백령도, 19세기 한반도 천주교 전파의 거점 도서로서 역할

 

우리나라 천주교는 조선 후기 ‘서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먼저 소개되며, 이후 선교사에 의해 신앙으로 정착되는데 초기에 몇몇 선교사들이 중국의 변문(邊門 혹은 柵門)과 평북 의주를 통해 조선에 입국했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앵베르(Imbert) 모방(Maubant) 샤스탕(Chastan) 신부가 1839년에 잡혀 문초받는 과정에서 선교사들이 의주를 통해 육로로 입국한 사실이 드러났고, 그 후 정부의 경계가 강화되면서 육로입국은 매우 위험하게 됐다. 이렇게 되자, 이미 입국해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페레올(Ferreol) 주교는 1846년 김대건 신부에게 해로를 통한 밀입국로를 개척하라고 지시했다.

 

김대건 신부는 백령도를 거점으로 하는 밀입국로를 페레올 주교에게 건의했는데, 그 이유는 중국 산동반도와 매우 가깝고 매년 봄에는 그 근해 어장에 중국 어선들이 모여드는 것에 착안했던 것이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중국 어선으로 백령도 근해에 도착하고 이곳에서 조선 교우들의 도움을 받아 입국하는 방안이 채택됐다.

 

1846년 5월 14일 김대건 신부는 서울 마포를 출발, 백령도에 도착해 앞으로는 선교사들이 백령도를 통한 밀입국로를 이용하라는 페레올 주교의 서한을 중국 선원에게 전달한 후 순위도에서 관헌에게 체포됐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의 착안과 개척의 덕으로 백령도는 1846년부터 1880년까지 메스트르 신부(1852년 입국)를 비롯한 프랑스 선교사 17명의 해로 입국 거점이 됐다.

 

주목되는 점은 당시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 일명 쇄국정책 속에서 프랑스와 마찰을 빚던 1866년 병인양요 즈음에도 백령도를 통한 선교사의 입국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천주교는 제사(우상 숭배) 금지와 독신 및 평등사상 강조 등 당시 조선이 추구했던 유교적 가치관에 위배되어 박해를 받고 위축되기도 하지만 꾸준한 신앙의 맥은 백령도를 통해 이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 20세기 섬 주민들에 의한 자생적 선교 출발

 

20세기 들어 백령 주민에 의한 자생적 선교가 시작되는데 1913년경 북포리 감친골에 거주하던 조상현(趙象鉉)씨(해방 이전 초대 면장, 신화동 거주 조재원씨 조부)가 약 2년 간 전교했으나 곧 중단됐다.

 

그 후 1944년 백령도 출신 최경림(崔京琳, 3대 면장)과 혼인해 백령도와 인연을 맺었던 황해도 장연읍 출신인 김양겸(金良謙, 만 100세 생존)의 포교에 의해 백령도 천주교의 씨앗이 싹텄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장연에서 월남한 이호연(李浩然), 정만원(鄭萬源) 가족 등이 백령도 입도하고 홍인강(洪仁綱), 장인균(張仁均) 등이 합세해 공과책으로 당시 최경림 면장댁 사랑채에서 공소 예배를 드렸으니 이것이 백령도 첫 종교적 모임(1952년)이었다. 그리고 1955년 윤을수(尹乙洙) 신부가 백령도에 왕래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교 활동을 전개했다.

 

그 후 1959년 5월 9일 부영발 미국신부가 정식으로 본당신부로 부임하면서 보다 활발히 전교사업이 전개됐고, 진촌 옛 수군진터(백령진의 청사가 있던 자리, 두룡산)에 200평에 달하는 성당을 건립하는 한편 병원, 양로원, 고아원, 결핵 병동을 세우면서 많은 봉사사업을 하게 됐다.

 

이와 같이 활동하는 천주교는 본도 구석구석까지 확산됐으며 대청·소청도 양 섬까지 교세는 뻗어나가 한때 교우가 수천 명에 이르기도 했다. 백령도 10개, 대청도 4개, 소청도 2개 등 총 16개의 천주교회(공소)가 마을마다 건립되는 이유도 이와 밀접하며, 공소 건립 시기 역시 1960년대에 집중된다.

 

그러나 부영발 신부가 출도한 후에는 많은 시설 운영 등에 어려움이 있었으며 교세도 약세로 접어들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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