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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좀비 정치와 카지노 자본주의

- 난데없는 ‘멸공놀이’를 한 자들

 

 

 

신세계의 정용진, 검찰총장 출신 야권 후보 윤석열, 정치인 나경원 그리고 여기에 판사와 감사원장을 지낸 최재형까지 가세해서 최근 SNS에서 차례로 난데없는 “멸공(滅共)” 놀이를 해 대중의 흥밋거리용 주목을 받았다. 사안이 대단해서라기보다는 이들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부여해준 다소 희극적인 기회였을 뿐이다.

 

여기에 등장한 것이 멸치, 콩에다가 ‘멸공’과 ‘자유’라는 단어였다. 보통 시민들이 이랬다면 당연히 “뭐야, 애들 장난해? 돌았나?”할 법한 일이었다. 이런 시시껍적한 것까지 기사화하는 언론 또한 경멸을 당했을 것이다. 3류 황색신문이 되는 꼴이다.

 

그런데 좀 더 들여다보면 이들 네 사람은 아직도 빨갱이 잡기에 광분했던 매카시즘의 동굴 속에서 살고 있는 걸 알게 된다. “이념적 크레마뇽인” 상태다. 이게 이 나라 특권동맹세력의 머리를 관통하고 있는 정신세계의 단면이다. 시대의 변화와 미래 궤도에 대한 이해가 철저하게 망가져 있다. 뇌가 총을 맞았다.

 

대단한 사회적 메시지인양 자신들의 SNS 놀이를 장면 연출용 미장센(mise en scene)처럼 도구까지 등장시켜 암시적으로 유포하는 듯 했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해진 것은 대자본-검찰권력-정치권력-사법권력-관료관력의 시대착오적이며 수준 낮은 자기 과시형 존재입증 방식이었다. 이른바 “관종”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이런 태도는 내면세계의 빈곤이 가져오는 필연적 산물인 동시에 이들 세력이 구축하고자 하는 현실의 뼈대를 기괴하게 드러낸다.

 

이를 아무런 문제의식없이 보도한 언론 역시도 ‘관종상품’으로 한몫보고 있으니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사회적 뇌 회로’의 기능을 해야 하는 언론이 이런 지경에 빠져 있은 지는 한참 되었다. 이런 상황은 민주주의의 위기와 직결된다. 대중들이 이미 익숙해서 당연하게 여기는 현실에 대해 한걸음 더 파고 드는 질문이 포기된 언론은 도적들로부터 집을 지킬 수 없게 된 “죽은 개”다.

 

‘멸공’이라는 말이 언제 이야기인가? 오래 전 사멸(死滅)해 버린 걸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만들어 진짜 살아있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좀비(Zombie)행태”다. 저 “죽은 개”도 좀비처럼 사람들의 머리를 먹어 치우고 있는 중이다. 그러고 보면 이들 특권 관종세력이 즐기는 정치 또한 “좀비 정치”에 다름 아니다.

 

- 전염병인 ‘좀비 정치’의 출현

 

 

‘좀비정치’는 사라져도 이미 예전에 사라진 것들을 불러내 혐오와 공포를 조장하거나 조롱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정치의 진지함을 파괴하고 만다. 괴기 영화를 닮은 ‘바보제(際)’가 매일 우리의 하루를 집어삼키고 있는 셈이다. 지겨울 정도를 이미 넘어섰다.

 

“노틀담의 꼽추” 콰지모도가 가장 못생긴 자로 뽑혀 겪어야 했던 ‘바보제’는 중세의 모순이 가한 압박의 무게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 위기를 사전에 막는 정치적 통제술이었다. 누군가를 멸시의 대상으로 택해 그에게 모든 분노와 욕설을 퍼부어 버리고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착각하고 유쾌한 흥분에 휩싸여 집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방식이다. 결국 민중 모두를 바보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은 역설적이게도 콰지모도를 각성시키는 씨앗같은 계기가 된다.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갈망이 싹트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나라의 특권세력이 벌이는 바보제도 결국 이렇게 되고 말 것이다. 어떻게 그리 될 수 있을까?

 

프랑크푸르트 학파 지식인 레오 로웬탈(Leo Lowenthal)은 시장이 거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멍청한 바보짓은 전염병처럼 퍼져나간다(stupidity spreads as a contagious disease)”라고 한 바 있다. 정용진이 시작한 걸 윤석열이 받더니 그걸 또 나경원이 따라하고 최재형이 이어 갔다. 구성 인물도를 보면 전염경로까지 능히 예견될 만한 일이다. 그래서 이 뉴스를 소비하는 대중은 잘만 접근하면 이들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열쇠를 얻게 된다.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수잔 손택(Susan Sontag)이 “오늘날 지배세력은 정치를 어느새 병리학(pathology)에 녹아들게 하고 있다”고 했던 바는 이런 견지에서도 통찰적이다. 그러기에 우선 먼저 물어야 한다. 왜 이런 어리석음이 전염병처럼 번지는 걸까?

 

그 답은 분명하다. 기본적으로 한나 아렌트가 야만으로부터 공화국을 보호하기 위해 그토록 중시한 “사유의 능력”이 존중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이 모든 것의 척도이며 교환가치와 그로 얻는 이윤의 크기만이 온통 관심사인 사회의 비극이다.

 

이와 같은 곳에서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비판적 질문과 의식은 위험하다고 여겨진다. 결국 기성의 틀을 넘어 “질문하는 행위”는 환영받지 못한다. 그건 가볍게 대화하고 즐겁게 세상을 누리며 복잡한 사고를 피하고 싶은 세상에 대한 공격이 된다. 아무리 무거운 의미를 가진 주제도 일회용으로 소비되고 망각되는 것이 불편하지 않은 상태를 흔들지 말라는 것이다.

 

 

영화 “돈 룩업(Don’t look up.)”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거대한 혜성이 날아와 지구와 충돌한다는 천문학자의 과학적 경고를 흥미위주의 일회용 소비재 또는 정치적 이해관계로만 활용하다가 결국 멸망하는 상상의 현실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미국 정치가 대자본의 욕망에 휘둘려 장난처럼 굴러가는 장면이 나온다. 이 또한 사멸해서 파묻어버려야 할 악의 권력이 산 자의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좀비 정치의 현실에 대한 경고다.

 

정작 봐야 할 것은 보지 않고 엉뚱한 곳에만 관심을 쏟다가 재앙에 직면하는 상황은 “저 위기의 징후가 보이는 하늘을 제발 좀 보란 말이야!”라는 말의 반어법적 제목 “Don’t look up”에 고스란히 표현된다. 모두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사회적 관심을 공유하면서 비판적 점검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사회가 도달하는 인식의 벼랑 끝이다. 아니 삶의 벼랑 끝일 게다.

 

- 카지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위기

 

 

수잔 스트레인지(Susan Strange)가 오늘날의 세계 자본주의는 이미 거대한 카지노판이 되었다고 한 게 1986년이다. “카지노 자본주의”는 이제 그때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규모에 이르렀다. 투기자본이 주도권을 쥐고 반복적인 금융위기를 일으키면서 사회경제적 불안정 상태를 확대재생산하고 이에 따라 불평등에 의한 빈부격차의 극심한 진행은 윤리적 가치와 이성을 마비시키고 욕망의 정치가 군림하게 만든 토대다.

 

이런 현실이 지속되면서 우리는 순식간에 억만금을 번 사람들이 영웅이 되고 자본시장의 성장이 곧 그 사회의 발전에 척도가 되는 것처럼 만들어버리는 정치에 빨려 들어가게 되었다. 선거에서도 정치인들은 자본시장의 문법에 충실한 어법을 구사해야 지지율을 올릴 수 있게 되었고 투기적 본질에 대한 언급은 득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이렇게 되면 정치가 누구의 편에서 작동할 것인지는 분명해진다.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다.

 

그런 까닭에 비판 철학적 태도는 교육 영역에서부터 제거당한다. 교육은 철저하게 비정치화되고 ‘중립’이라는 포장에 싸여 문제의식은 박멸당한다. 이제 16세부터 정당가입이 가능해질 판인데 학교 교실 현장에서 정치적 질문과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구조적 논쟁이 과연 제대로 이뤄질 수 있을까? 언론에서 그런 논의를 할 수 있는 자리는 당연히 허락되지 않은지 오래다.

 

 

그 결과가 “사유하는 존재의 소멸”이다. ‘비판적 사유를 위한 정치교육(political pedagogy for the ciritical thinking)’을 이끌어온 미국의 헨리 지루(Henry Giroux)는 민주주의를 선거로 한정하는 현실을 질타한다. 정치적, 사회적 윤리논쟁과 책임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이를 기본으로 공동체의 중대사안에 결정력을 가지는 시민의 존재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하나의 형식일 뿐인 “예식(ritual)”으로 머물고 만다는 걸 일깨운다.

 

그래서 그는 “사회변화를 가져올 민주주의 운동을 창출해내는 노력(an effort to generate democratic movements for social change)”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실로 우리에게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그 동력을 일상에서 만들어가는 것이 민주주의임을 인식하게 해준다. 민주주의는 제도이기도 하면서 그걸 뛰어넘는 일상의 운동이 되어야 좀비 정치를 이겨낼 수 있다. 그건 인간을 선택적으로 살해하는 “죽음의 정치(necropolitics)”이기 때문이다.

 

“반공냉전의 사형선고”. “정치검찰의 행패”, “대자본의 전제적 지배”, “사법권력의 오만”, “언론의 단두대”는 모두 ‘좀비 정치의 현실’이다. 그리고 이들은 죄다 카지노 자본주의의 이해관계와 깊은 동맹관계를 맺고 있다. 멸공 놀이를 한 정용진, 윤석열, 나경원, 최재형 그리고 이들을 뉴스로 소비하게 하는 언론은 이 좀비 정치의 무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여준다.

 

일상의 운동이 되지 못하는 민주주의에서는 개혁적 정치가도 자신의 궤도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 진보적 민주정치를 내세울 줄 알았던 오바마는 취임 이후 빠른 속도로 우파가 되었고 그가 비판해마지 않았던 부시의 군사주의 정책에 합류한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지속했고 전쟁포로에 대한 무기한 구금과 시장주의에 지배된 교육정책을 그대로 계승하고 만다. 이는 당연히 타산지석(他山之石)이다.

 

2022년은 2016년에 시작된 촛불혁명의 역사를 보다 심화시키고 진화시켜나가야 하는 민주주의 역사의 중대시기다.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란 보다 치열한 시민의식의 진전과 일상적 실천에서만이 지켜지고 발전할 수 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역사에서 사라져야 할 좀비들을 퇴치하고 카지노판이 된 세상을 존엄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 책무가 모두에게 떨어졌다. 민주주의는 그래서 좀비와의 전쟁이다. 카지노판을 뒤엎는 일이다.

 

 

좀비들에게 먹힌 우리의 뇌를 도로 찾아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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