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에게 글이 없다면? 우리글이 한글이 아니라면? 상상해 본 적 있는가. 한글의 우수성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배우고 익히기 쉬운 한글 덕분에 우리나라는 문맹률 1% 내외를 보인다.
국립한글박물관(관장 황준석)이 2014년 개관 후 처음으로 상설전시관을 개편했다. 8년 만에 새 단장한 전시는 ‘훈민정음’을 중심으로 한글 창제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풀어나간다.
전시를 맡은 김미미 학예사는 “한글박물관하면 많은 분들이 가장 먼저 ‘훈민정음’을 떠올리신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한글박물관에는 ‘훈민정음’이 없다. 그래서 전시관 그 자체를 훈민정음의 상징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전시는 ‘훈민정음’ 머리글을 따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내 이를 딱하게 여겨’,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쉽게 익혀’, ‘사람마다’, ‘날로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등 총 7개의 공간으로 구성됐다. 191건, 1104점의 유물을 만날 수 있다.

◇ 우리글이 없는 답답함
물 흐르는 소리 ‘졸졸’, 개가 짖는 소리 ‘멍멍’···한글이 없다면 소리를 어떻게 적었을까?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자연의 글이 있다”. ‘훈민정음’ 해례 속 정인지가 쓴 서문의 글이다. 전시 1부는 정인지 서문에서 따온 글들을 묶은 영상과 함께 시작된다. 우리글을 갖기 전 흑백과도 같았던 세상은 단어를 하나하나 적어나가며 색을 입은 자연으로 그려진다.

기록을 위해 꼭 필요한 것. 바로 ‘글’이다. 우리는 오랜 기간 한자를 빌려 써 표기해왔다. 우리말을 조금이라도 더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 ‘이두(吏讀)’, ‘구결(口訣)’, ‘향찰(鄕札)’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한자를 응용했다. 하지만 복잡한 형태만 늘어갈 뿐 한자는 여전히 일부 계층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어려운 글이었다.
한자 옆 작게 표시된 여러 흔적들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우리글이 없어 한자를 빌려 쓰며 불편했던 현실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한글의 필요성과 소중함을 깨닫게 한다.

◇ 토기 속 묻혀 있던 활자 빛을 보다
일부에서만 읽고 쓸 수 있었던 한문. 글을 몰라 억울한 일이 있어도 호소조차 하지 못하는 백성들을 보며 세종은 한글을 창제했다.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 정신과 우리말에 맞는 우리글을 쓰겠다는 자주정신, 실생활에 사용할 수 있어야한다는 실용 정신을 바탕으로 했다.
그래서 세종은 한글을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널리 보급하기 위해 힘썼다. 금속활자를 제작해 더 많은 한글 책이 나올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오는 4월까지만 만날 수 있는 유물도 있다. 작년 6월 서울 인사동에서 출토된 조선 전기(15세기)의 금속 유물 중 한글 활자 330여 점이 전시됐다. 활자가 토기에 담겨져 출토되다니 신기하기만 하다.
김미미 학예연구사는 ‘활자의 주재료인 구리가 당시 매우 귀했기 때문에 활자가 닳거나 하면 기존 활자를 녹여서 다시 사용했다. 인사동에서 발굴 된 활자 역시 다시 녹여 쓰기 위해 모아뒀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한글 금속 활자들이 대부분 소실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번 발굴은 역사적 가치가 크다. 때문에 보다 면밀한 조사를 위해 4월에는 유물 조사기관으로 돌아간다. 조사를 마치기까지 오랜 기간 박물관에서는 만날 수가 없어, 현재 복제품을 제작 중이다.
◇ 우리말에 맞는 우리글
세종은 한글이 우리말에 더욱 완벽한 글자가 될 수 있도록 보완하고 개선해나갔다.
조선 최초의 국문 악장인 ‘용비어천가’는 세종의 대표적인 실험작이다. 세종은 한글이 우리말을 적는 데 부족함이 없는지 살피기 위해 이를 만들었다.

수양대군이 번역해 써 내려간 불경인 석보상절에는 ‘사람이’를 ‘사라미’로 적거나 ‘사람을’을 ‘사라믈’과 같이 소리 나는 대로 적는 표기법인 연철이 나타난다.
이후 수양대군의 석보상절을 본 세종이 부처의 덕을 찬양하며 지은 월인천강지곡에는 소리보다 형태를 밝혀 쓴 표기가 돋보인다. 석보상절과 달리 ‘사람이’를 적으며 ‘사람’으로 단어 본래의 형태를 나타냈다.
이는 오늘날에 더 가까운 표기법으로, 세종이 한글의 체계를 계속해서 고민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후로 한문을 한글로 풀어 쓴 다양한 언해서들도 만날 수 있다.
주로 불교 경전들이 많았는데, 민간에 넓고 깊게 뿌리내린 불교를 통해 한글을 보급하려는 생각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백성들이 한글을 통해 학문과 지식을 쉽게 익히길 바랐던 세종의 마음을 담았다.
◇ 신분도 남존여비도 뛰어넘은 한글
전시의 5부에 들어서면 노비와 양반, 여성과 남성 너나할 것 없이 누구나 한글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조금 더 친숙한 한글의 모습이 나타나고, 경전·학문 등 고서가 아닌 일상의 글들은 웃음을 자아내기도 감동을 주기도 한다.

조선 왕조에서 왕과 왕비 사이에 태어난 마지막 공주인 덕온공주. 공주의 혼례 당시 공주의 형제, 자매 그리고 아버지인 순조까지 세상을 떠난 후였다.
이런 딸을 보내는 순원왕후의 마음은 어땠을까? 하나 남은 딸을 시집보내는 순원왕후는 목록표만 5미터가 넘도록 혼수품을 준비했다.
연붉은빛 종이에 하나하나 써 내려간 품목에는 장신구, 그릇, 바느질 도구, 경대까지 온갖 생활용품이 기록돼 있다.

딸과 며느리를 위해 한글로 쓴 음식 조리서도 있다. ‘음식 디미방’은 저자가 딸과 며느리를 위해 맛있고 좋은 음식을 만들고 대접하는 방법을 썼다.
책의 말미에는 ‘딸자식들은 각각 베껴 가되 이 책을 가져 갈 생각일랑 절대로 하지 말며, 부디 상하지 않게 간수해 빨리 닳아버리게 하지 마라’는 당부가 적혀있다.

관상에 좋지 않은 점을 뽑아내준다는 광고도 볼 수 있다. ‘사마귀(사마구), 주근깨(ᄭᅡ문ᄭᅦ), 티눈(튀눈), 버짐(버즘)’ 등 표기에는 차이가 있지만 내용을 알기에 어렵지 않은 단어들이 눈에 띈다.

◇ 나라 잃은 슬픔, 우리글을 잃은 슬픔
우리글이 한글이 아니라면 어떨까? 1910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며 한글은 국문으로서의 자격을 잃게 된다.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 학생용 교과서에는 ‘국어(國語)’가 일본어이다.
‘국어독본(國語讀本)’교과서에는 일본어가 쓰여 있다. 우리의 한글은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이란 교과서에 소개된다. 우리의 말과 글이 제2외국어쯤으로 치부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글을 잊지 않고, 잃지 않기 위한 노력들이 있었다. 국어학자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이 남긴 말모이원고는 최초의 국어사전 원고로, 현재 ‘ㄱ’부터 ‘걀죽’까지만 남아있다.
1911년부터 시작된 작업은 1929년 조선어학회의 조선어사전 편찬 사업으로 이어졌다.

아이들이 쉽게 한글을 익힐 수 있는 학습 도구도 있다. 발명가 최윤선이 만든 것으로 자음판, 모음판, 받침판, 모음가림판, 받침가림판으로 구성됐다.
철자기 판을 돌려 가며 다양한 자음과 모음을 조합할 수 있다. 조선어학회의 추천 글이 실린 신문광고에는 최윤선이 약 20년에 걸쳐 훈민정음의 원리를 연구하고 만들었다는 설명이 있다.

전시는 현재의 표기와 비슷해진 한글의 모습을 살펴보며 끝을 맺는다.
전보와 타자기를 보며 가로쓰기와 세로쓰기, 풀어쓰기와 모아쓰기에 대한 옛 고민을 함께 나누고, 옛 교과서를 보며 지금과는 다른 맞춤법에 추억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어둠에서 시작했던 전시는 점차 밝아지며, 마지막에 환한 공간으로 거듭난다. 전시를 보고나면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 변화될 한글의 미래를 꿈꾸게 한다.
[ 경기신문 = 정경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