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까지만 해도 조기는 너무 흔해 천덕꾸러기였다. 어로기인 매년 4~5월이면 연평도는 조기로 뒤덮이고 파시(波市)가 섰다. 그리고 육지에서는 집집마다 조기로 젓을 담그고 담장?지붕은 조기를 말리느라 빈공간이 없을 정도였다.
당시만 해도 저장시설이 별로 없어 절여 말리거나 젓을 담그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다 보니 어획기인 늦은 봄에는 괄시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같이 흔한 조기는 우리 민족과 애환을 같이 했다. 마침 어획기가 보릿고개이어서 더욱 그랬다.
때문에 조기를 둘러싼 일화도 많다. 조기어장이었던 연평도에는 임경업장군(효종 때 북벌론으로 유명)의 사당이 있다. 임장군은 뱃길로 청나라를 가는 길에 고기를 잡았는데 이것이 조기잡이의 효시였다. 연평도 어민들이 이를 기리기 위해 임경업장군 사당을 짓고 조기출어 때마다 풍어제를 올렸다.
고려중기 때의 척신 이자겸은 인종의 외할아버지인데 난을 일으키다가 실패하여 영광 법성포로 귀양 갔다. 이자겸은 말린 조기를 임금에게 진상, 고기이름을 묻자 굴비라고 했다. 굴비의 어원이다. 이자겸은 외손자에게 굽히지 않겠다는 뜻으로 굴비(屈非)라고 했다는 야담이다. 또 구두쇠의 상징인 자린고비 야화도 전해내려 온다. 이는 우스개 소리지만 절약의 중요성을 내비치는 서민 친화성 교육적 유머다.
그런데 요즈음 굴비는 너무나 귀하신 몸이 됐다. 보통은 10마리 한 두름에 20만원이고 좀 씨알이 굵다하면 100만원 150만원 하니 서민은 고사하고 있다는 사람도 쳐다보기 어려울 지경이다. 하지만 이도 없어서 못 판다니 어안이 벙벙하다.
굴비가 황금대접을 받다보니 굴비상자도 덩달아 고귀한 대접을 받고 있음은 아이러니다. 얼마 전 인천시장에게 배달된 굴비상자가 그렇다. 아직도 탁송자를 찾지 못했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