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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준의 경기여지승람(京畿輿地勝覽)] 48. 고산동과 등자리

 


행정동인 성남시 수정구 고등동은 법정동인 고등동, 상적동, 둔전동을 관할하고 있으며, 인근에 있는 성남공군기지로 인하여 대부분의 지역이 개발제한구역과 군사시설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가 최근 신도시로 개발되었다.
 
고등동은 크게 고산동(高山洞)과 등자리(登子里)로 구분되며, 高자와 登자를 합성하여 고등동이 되었다. 고산동은 안말, 웃말, 길아래, 주막거리의 4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막거리는 ‘새술막’이라고도 하는데 6.25전쟁 때 하천 가에 피난민촌이 생기면서 고등동의 중심지를 이루게 되었고 이 때 술집이 새로 생겨서 생긴 이름이다. 6.25 당시 서울 강동구 상일동 일대와 대왕면 고등리 일대에 피난민촌이 형성되었는데, 난민을 위한 구호양곡 2천 가마를 횡령 착복하는 사건이 적발되기도 하였다.

 

 
등자리의 지명 유래는 덕수이씨(德水李氏)의 집안에서 과거에 급제하는 경사가 잇따라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덕수이씨 가문의 묘가 많은데 벼슬이 높아 석등이 세워진 마을이란 데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다.
 
고등동의 이경민(李景閔, 1578~1652) 묘비는 꿈 이야기를 근거로 만들어진 거북받침 위에 세워져 있다. 성남의 덕수이씨는 중종반정 공신 해풍군(海豊君) 이함(李菡)이 고등동 일대 사패지에 부친 풍성군(豊城君) 이의번(李義蕃)의 묘를 쓰면서 세거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다.

이경민은 15세 때 임진왜란을 만나 공부할 시기를 놓쳐 뒤늦은 공부를 하게 되었고, 훗날 인왕산 아래 성첩과 담장 밖 집짓는 공사를 감독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경민은 자녀가 13남 2녀로, 그 자손이 매우 번창하여 손자와 증손자가 100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자손이 번창한 데에는 꿈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이경민의 아버지 이통(李通)이 흡곡현령으로 근무하던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온 몸에 식은땀을 흘리며 깜짝 놀라 일어났다. 그리고는 둘째 아들인 이경민을 불러 등을 긁게 하고는 꿈 이야기를 하는데, "꿈에 다섯 마리의 거북이가 반송방 옛 집터에서 나와서 차례차례로 나의 다섯 발가락을 삼켰단다. 그런데 그 둘째 발가락을 삼킨 거북이 꼬리의 크고 작은 비늘이 차례로 이어지더니 온 집안에 가득 차는 게 아니더냐? 그래서 황홀한 나머지 깜짝 놀라 일어났단다. 내 듣자 하니 거북이는 자손을 상징한다는구나. 이를 통해 너희 형제 중에 네가 응당 커다란 경사를 맞이하게 될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고등동에는 우성윤(禹成允)과 그의 아들 언겸(彦謙), 손자 도전(道傳)의 묘가 있었다. 우언겸은 의금부도사로 있을 때 퇴계 이황(李滉)의 형 이해(李瀣)가 귀양을 갈 때 압송관으로서 편의를 봐주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우성전(禹性傳)이 아들이다.

 

 

고등동 신도시가 건설되면서 묘를 이장해갔는데, 관 주변을 단단히 회를 다진 것이 확인되었고, 그 바깥에는 만시(輓詩)로 추정되는 글이 가득 쓰여 있었다. 우성윤의 비문은 퇴계 이황이 짓고, 우언겸의 비문은 서애 류성룡이 짓고, 한석봉이 글씨를 쓴 비석이 수습되었다. 최고급 재료가 장례에 사용된 것은 우언겸이 관곽(棺槨) 판매와 예장(禮葬)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던 귀후서(歸厚署)에서 일한 경력이 반영됐음을 알 수 있다.

 

[ 경기신문 = 김대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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