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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적(赤)과 흑(黑)”, 왕정복고의 시대를 통과하며

- 쥘리앵의 총격

 

“쥘리앵에게 그녀의 모습이 그리 선명하게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부인을 향해 권총 한 발을 발사했다. 빗나갔다. 그러자 그는 두 번째로 또 발사했다. 부인이 쓰러졌다.”

 

저격 사건이었다. 그것도 신성한 교회 안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표적이 명확하게 들어오지도 않았고 첫발은 빗나갔다. 설사 동기가 아무리 옳다해도 의도치 않은 희생자가 생길 수 있는 위험천만한 격발(擊發)이었다. 놀랍게도 그 표적은 자신을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 레날 부인이었다. 두 번째 발사라는 대목은 살해 의지가 매우 강했음을 말해준다. 돌이킬 수 없는 결행이다.

 

 

스탕달의 『적과 흑(Le Rouge et le Noir)』, 그 종반(終盤)대목이다. 1830년, 프랑스 혁명이 좌절당한 채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시대에 미남에 총명하고 야망에 찬 한 젊은이 쥘리앵 소렐의 출세기로 알려진 작품이다. 다시 사건 현장으로 돌아가보자.

 

통상적으로 생각해보면 총을 쏜 자는 재빨리 현장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쥘리앵은 그러지 않았다. 사건이 발생한 뒤 잡혀가기로 마음먹은 것이 아니면 이럴 수 없었다. 쥘리앵은 총명하고 계산이 빠르며 출세의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 상황은 절대적 모순이었다.

 

“쥘리앵은 꼼짝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신이 조금 들자 모든 신도들이 교회에서 도망가는 것이 보였다.”

 

자기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그제야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총을 겨눈 대상은 한 사람이었지만 모두가 혼비백산이었다. 그런 가운데 쥘리앵은 천천히 돌아가는 필름의 한 장면처럼 움직였다. 급류에 빠진 세상의 속도와는 다른 속도였다. 그의 의식은 이미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존재였다.

 

“사제는 제단을 떠나고 없었다. 쥘리앵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몇몇 여인을 따라 아주 느리게 걷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도망치려고 한 어느 부인이 거칠게 떠미는 바람에 그는 넘어져 버렸다. 군중에 의해 엎어진 의자에 발이 걸렸던 것이다.”

 

양을 지키는 목자(牧者)라는 사제는 이 총성에 놀라 가장 먼저 제단 뒤로 사라졌고 다들 최후의 도피처라고 믿고 있던 교회는 더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단 두 발의 총격이 교회를 해체해버린 셈이다. 무너지고 있던 교회의 돌들 사이에 쥘리앵은 끼어버린 채 꼼짝 못하고 마는 꼴이 되었다. 현실은 그의 의식과는 상관없이 작동하고 있었다.

 

어느 곳에서 출동했는지 헌병이 그를 체포했다. 헌병이 애초 교회를 지키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 사이에 연락이 닿아 출동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교회와 경찰의 관계는 그토록 긴밀했던 것은 틀림없었다.

 

“다시 일어나려는 순간, 그의 목이 조여오는 것을 느꼈다. 그를 체포한 것은 정복 차림의 헌병이었다. 쥘리앵의 손이 기계적으로 권총에 갔으나, 두 번째 헌병이 그의 팔을 붙들었다.”

 

파멸과 계급 그리고 단두대

 

이 사건은 쥘리앵이  우연히 보게 된 레날 부인의 편지 하나에서 시작되었다. 모욕을 당했다고 여긴 그가 참지 못하고 일으킨 일이었고, 그렇게 일을 벌인 결과를 그는 받아들이기로 각오했던 바였다. 하지만, 그건 지금까지 그가 기를 쓰고 쌓아올린 지위와 미래의 가능성, 그 모든 걸 산산조각이 나게 하는 선택이었다. 파멸을 자초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던 그 모든 계단들이 붕괴해버릴 게 분명한 끝을 향해 그는 왜 돌진했던 것일까? 그의 목표가 거의 다 이뤄져가는 현실을 왜 스스로 망가뜨리는 무모한 짓을 벌인 것일까?

 

감옥에 나타난 판사에게 쥘리앵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계획적으로 죽였습니다. 형법 제1342조에 의하면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사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레날부인이 치명상을 입지 않고 살았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고 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후회가 밀려오지만 재판은 진행되기 시작했다. 총격은 있었으나 사형은 잘하면 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부인이 생명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평결은 사형이었다. 배심원들은 “계획적인 살인죄를 저질렀다”는 것이 사형언도의 이유라고 밝혔다. 실제로 죽은 사람은 없었으니 누가 봐도 말이 되지 않는 결론이었다.

 

배심원들이 그런 결정을 내리기 전, 쥘리앵은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어떠한 용서도 구하지 않습니다. 죽음이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온갖 존경과 찬사를 받을 만한 훌륭한 부인의 살해를 기도했습니다. 저의 범죄는 끔찍한 것입니다. 게다가 그것은 계획적이었습니다. 그러니 저는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쥘리앵의 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사회적으로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재판정 현장에는 총격의 대상이던 레날 부인 그리고 쥘리앵과 사랑하는 사이인 마틸드가 숨죽이며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쥘리앵이 살아나기를 절박하게 간구하고 있었다.

 

쥘리앵은 자신의 죄가 더 가볍다고 할지라도 이런 법정에서 무죄로 걸어 나가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왜 그런가?

 

“하층민으로 태어나 가난에 짓눌리면서도 운좋게 좋은 교육을 받고 부유한 사람들의 오만이 지배하고 있는 사교계라고 부르는 곳에 대담하게 끼어들려 한 저 같은 하층계급 젊은이들의 용기를 영원히 꺾으려는 사람들을 봅니다.”

 

쥘리앵은 법정에 앉은 배심원들이 어떤 계급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간파한 것이다. 쥘리앵은 총격사건이 아니더라도 이미 사회적으로 죄인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게 된 것이다.

 

“이렇게 상류계급에 끼어들었다는 것, 그게 저의 죄입니다. 저는 저와 같은 계급의 동료들로부터 판결을 받지 못하는 만큼 더 가혹하게 벌을 받을 겁니다.”

 

왕정복고 시대의 현실은 법정에서 확실하게 그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로베스피에르같은 민중의 변호사는 이미 단두대에서 사라졌고 쥘리앵을 옹호할 수 있는 법정은 구체제 앙시앙 레짐의 재등장으로 말미암아 ‘지나간 옛 사랑의 그림자’가 되고 말았다. 『적과 흑』의 부제가 “19세기의 연대기”라고 되어 있는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쥘리앵의 다음 발언은 직격탄이었다.

 

“저의 눈에는 배심원석에 부유한 농민은 보이지 않고 오직 분개한 부르주아들만 보입니다....”

 

그러자 “귀족계급의 특별한 애호를 갈망하는 차장검사는 자기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면서 어쩔 줄 몰라했다.”고 『적과 흑』은 적고 있다. 살인미수였고 총을 맞았던 당사자 레날부인은 쥘리앵에 대한 처벌을 원치 않고 있는데도 이런 사정은 아랑곳없이 쥘리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단두대였다.

 

 

부르봉 왕조의 복고 이후 봉건체제의 계급질서가 다시 귀환했고 쥘리앵과 같은 청년의 지배계급에 대한 도전은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건 계급 구조 자체의 변혁도 아니고 그저 그 판에 끼는 것일지라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폴레옹이나 로베스피에르와 같이 출신은 미천하나 계급은 상향이동하면서 혁명적 인물이 다시 등장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두려웠던 것이다.

 

쥘리앵은 “계급 상승의 죄”를 저지른 자가 되었다. 특권계급은 그들끼리의 울타리를 견고하게 방어해야 했고 미수에 그친 총격 사건은 쥘리앵을 처단할 구실에 불과했다.

 

사실 쥘리앵은 계급의 사다리를 오르는 노력을 멈춘 적이 없지만 본래 자신이 지니고 있던 도덕과 철학, 가치와 순수함을 버린 적도 또한 없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세상에서 민중이 열광하는 붉은 색 정복의 공화파 군인보다 오랜 세월을 지배자로 군림했던 검은 색 복장의 사제가 권력자들인 것을 알게 된 그는 신앙심도 없이 성직을 목표로 삼기도 한다.

 

그건 공화파의 혁명정신과 왕정 복고파의 특권이 벌이는 갈등 사이에서 현실의 욕망과 이상의 세계를 오가며 고뇌하는 시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쥘리앵은 상류사회의 화려한 삶에서 가난한 이들로부터 훔친 돈으로 살고 있는 현실을 목격하고 깊은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도구적 이성’과 ‘역사적 이성’의 대치

 

미미한 존재였던 그가 사교계의 스타가 되는 과정은 그의 탁월한 용모를 비롯해서 치밀한 계산과 전략 덕분이었다. 그건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이성의 도구적 기능”을 최대한 발휘한 결과였다. 합리적 계산이라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이성의 도구적 기능”은 현실의 부당한 면모를 문제삼지 않는다. 적응의 논리가 위력을 발휘할 뿐이다. 그러기에 쥘리앵의 뇌리를 지배한 것은 “흑(黑)의 논리”였다. 공화파의 역사성에 대한 고민이나 집착 또는 비전은 여기서 방해가 될 뿐이다.

 

그러나 그가 모멸받았다고 여긴 순간, 그것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한 지배계급의 일원인 레날 부인으로부터 그런 취급을 받았다고 판단하자 사태는 급변한다. 쥘리앵은 이 충격 속에서 본래 지니고 있던 그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어 일깨워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헤겔 식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존재의 존엄을 증명하기 위한 “치열한 인정투쟁의 과정”이 펼쳐지다가 어느 한 순간에 자신이 부정당하고 있다고 깨닫자 지배계급에게 반기를 들게 된 것이다.

 

“역사적 이성의 회복”이다. 쥘리앵이 살아온 방식과 모두가 보고 있는 교회에서 레날 부인에게 총을 겨눈 것은 이성적으로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 순간 그가 미쳤다고 밖에는 달리 볼 방법이 없다. 그러나 역사적 이성 앞에서 도구적 이성이 무너진 것이라고 한다면 그 간극의 격차 또는 단절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물론 그것이 저격으로 이뤄져야 하는가의 문제가 남는다. 다행히 레날 부인은 죽지 않았다. 그래도 여전히 문제 삼을 수 있는 방식이다. 하지만, 자신이 올라타려고 한 질서 전체에 대한 저격이라는 부정의 방식이 아니고 그가 해방될 수 있는 계기가 가능할까?

 

쥘리앵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이렇게 볼테르의 시귀 하나를 떠올린다.

 

“원대한 목적을 품은 굳센 정신이 저속한 인간들의 상스러운 정신에 대해 갖는 권리”

 

고결한 정신의 사원을 마련해야 하는 시대

 

 

적과 흑 사이에서 그는 마침내 정신의 가치를 선택하고 그가 죽을 자리까지 유언으로 남긴다. 그건 그가 가장 자유롭고 기쁨에 찰 수 있는 곳이었다. 친구인 푸케에게 쥘리앵은 이렇게 말한다.

 

“나를 베리에르(작품에서 가상으로 설정한 지역)를 굽어보는 높은 산의 작은 동굴에서 휴식을 취하게 해줘. 그곳에서 프랑스를 바라보던 때가 나에게 가장 소중한 열정의 시대였어. 그 동굴의 위치는 철학자에게도 오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킬 만큼 아름답다는 것을 사람들은 부인할 수 없을 거야. 그런데 그 잘난 수도원 사람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돈만 끌어모으려 하잖아.”

 

고결한 정신을 기르는 사원(寺院)은 도리어 돈으로 타락하고 있었고, 쥘리앵은 죽음 앞에서 가장 고결한 정신의 사원을 스스로 지정하고 있다. 황량하기만 했던 동굴은 마틸드에 의해 대리석으로 꾸며졌고 쥘리앵의 죽음은 그로써 대리석이 상징하는 위엄과 미학, 그리고 영원성을 보장받게 되었다. 레날 부인은 쥘리앵이 세상을 떠난 지 사흘 뒤 그 뒤를 따라갔다.

 

사랑은 계급을 넘어섰고 복고된 시대의 모순과 천박함은 여지없이 폭로되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것이 완성되려는 찰나 그 고비만 넘기면 지배계급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저버린, 그래서 결국 마지막 유혹을 이겨낸 정신이 새로운 미래를 기약하고 있었다.

 

유혹과 야망의 시절인 젊은 시대는 당연히 적과 흑의 폭풍을 겪기 마련이다. 권력을 향해 줄달음치고 사랑마저도 그걸 위한 도구가 되는 현실 앞에서 고귀한 정신의 세계를 선택하라는 것은 무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본래의 자아에 대한 모멸을 스스로 견디고 받아들이면서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부자와 권력자들에게서 인간다운 인간을 찾아보기 어려운 까닭이 달리 있는 것이 아니다. 해서 예수께서는 낙타가 바늘 귀에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셨다.

 

왕정복고라는 앙시앙 레짐의 귀환은 프랑스 혁명을 이긴 보수파의 승리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계급의 그물은 인간 본래의 정신을 타락시키고 천박하게 만드는 제도일 뿐이다. 그 안에는 따라서 이미 위기가 배태되어 있었다. 그걸 노출시켜 저격한 인물이 바로 쥘리앵이다. 그에게 도구적 이성의 계산을 넘는 역사적 이성의 차원이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루카치가 말했듯이 역사에서 전개되는 계급의 대치와 격돌, 투쟁과 혼란의 시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 개인의 자각이 역사화되는 과정이다. 그 모순에 대한 인식이 바로 헤겔의 변증법이 말하는 “부정(Negation)의 철학”이다. 그건 끊임없이 진보해야할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이자 자기 회복이다.

 

기성의 현실에 대한 “질문의 철학”이자 “도전의 권리”가 여기에 있다. 타락한 기성의 권력을 부정하고 이에 저항하며 저격하는 일은 쥘리앵처럼 파멸을 자초하는 것 같지만, 세상을 높은 곳에서 넓게 바라보며 정신의 고결함을 지켜내는 위대하고 영구적인 선택이다. 쥘리앵을 뒤따른 레날 부인의 죽음은 낡은 시대를 온 몸으로 껴안고 저물어가는 앙시앙 레짐의 쇠락을 상징한다.

 

 

스탕달은 19세기, 특히 1830년 왕정복고의 시대적 퇴행성을 고발하면서 역사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묻고 있다. 오늘 우리가 직면한 질문과 다르지 않다. “적과 흑”, 그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고뇌와 행동을 할 것인가? 반혁명의 권력이 들어선 이 시대가 마주한 과제다. 인간이 인간답게 되기 위한.

 

 

1830년 7월, 프랑스는 다시 혁명의 시대를 연다. 구체제의 복원은 잠시였다. 쥘리앵의 총성은 그 예고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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