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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드레퓌스’, 혁명과 진실 그리고 정의

드레퓌스 사건과 프랑스 혁명

 

“19세기는 혁명으로 시작해서 괄목(刮目)할 만 했는데 드레퓌스(Dreyfus) 사건으로 종료된 세기가 아닌가. 이건 아마도 장래에 쓰레기같은 세기라고 불리워질지도 모르겠다.”

 

혁명의 시대에 대한 희망을 뒤엎는 사건으로 마무리된 시대에 대한 통탄이 담긴 이 문장은 『티보가(家) 사람들(Les Thibault)』의 저자 로제르 마르땡 뒤 가르(Roger Martin Du Gard)가 기록한 것이다. 그는 1937년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

 

 

사회주의 지도자 장 조레스를 따르기도 했던 그의 세계관은 명백했다.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는 현실에 대한 저항과 반격이 지니는 가치를 지켜내겠다는 것이다. 프랑스만이 아니라 유럽 그리고 미국에까지 온통 충격을 준 드레퓌스 사건은 바로 그 인간 존엄의 원칙을 망가뜨린 사태였고 결국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모독한 중대사례였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 첫 장은 ‘반(反) 유대주의(Antisemitism)’ 분석이다. 그 글이 시작되는 앞머리에 인용된 문장이 바로 로제르 마르땡 뒤 가르의 ‘19세기’에 직격탄을 던진 글이다. 드레퓌스 사건은 허위와 진실의 싸움을 넘어서 혁명의 시대 전체에 대한 반동이자 그걸 통해 혁명의 과정에서 쌓아올린 시민의 권리를 송두리째 박탈하려는 기도(企圖)였음이 분명해져 갔던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아렌트는 독일 파시즘의 기원을 해부하는 가운데 드레퓌스 사건에 나타난 프랑스의 반유대주의가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밝혀나갔다. 그건 유럽 전체에 깔린 극우 국가주의와 인종혐오 그리고 이후 벌어진 유대인 대량 학살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드레퓌스 사건은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가? 그리고 이 사건에 매달려 유죄와 무죄를 다툰 이들은 누구였는가? 어떤 맥락에서 발생한 사건이며 이후 벌어진 대소동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1894년에 시작해서 1906년, 그러니까 무려 12년에 걸쳐 비로소 진실이 확정된 이 사건은 세계적 문호 에밀 졸라를 관련시켰고 프랑스의 진보적 공화파 거두인 정치가 조르주 클레망소를 활약하도록 만들었다.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혁명의 양심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스파이, 반역자, 국가

 

사건의 핵심은 ‘스파이 문제’였다. 게다가 첩자로 체포된 자는 드레퓌스라는 유대인 출신의 장교였으며 이 사안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는 프랑스 국가주의의 기둥이 된 군(軍)의 명예와 위신을 수호하는 일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었다. 군 내부의 ‘반역자’를 찾아내서 척결하는 것은 프랑스 국가의 안보를 위해 결정적 비중을 가진 일인 것 또한 명백했다.

 

더군다나 1870년 독일(프러시아)과의 전쟁에서 패해 알자스-로렌 지역을 빼앗긴 프랑스의 입장에서 독일과 관련된 간첩문제를 소홀히 처리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한편 패배에 대한 방어에는 반역자의 색출과 희생양의 존재가 언제나 필요했다. 알자스-로렌은 전쟁이 끝난 지 20여년이 지났지만 그 패배의 현재 진행형 현실을 일상적으로 일깨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 문제가 군대를 질타하는 여론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이를 막기 위한 군대라는 조직의 요구는 무자비했다. 그리고 그 칼끝은 결국 문서 하나의 발견으로 드레퓌스를 향해가고 있었다.

 

주 프랑스 독일 대사관에서 몰래 빼내온 문서에 프랑스 군대의 무기 매입 내력이 적힌 명세서가 발견되었다면 이는 그야말로 경악할 일이다. ‘제2국’으로 불린 프랑스 군 참모본부 정보국은 범인을 즉각 지목하고 이를 군의 능력으로 과시해야 하는 사태에 직면한 것이다.

 

그러나 진범은 따로 있었다. 이 모든 사태는 귀족 출신 프랑스 장교 에스테라지(Esterhazy)가 자신의 곤궁한 경제생활을 해결하기 위해 자발적 첩자가 되기를 원해 독일 대사관에 근무하는 정보책임자 슈바르츠코펜(Schwartzkoppen) 대령을 찾아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894년 7월이었다.

 

에스테라지가 쓴 명세서는 정보담당 부서 제2국에서 검토되는 중에 ‘무뢰한 D’라는 단어 하나를 가지고 D로 시작되는 이름의 드레퓌스가 진범으로 지목되는 근거로 만들어진다. 그가 유대인이라는 점은 반 유대주의로 희생양을 찾는 프랑스의 당시 분위기상 범죄 입증에 편리한 조건이었고 전문 필적 검사까지 마치면서 ‘확정’으로 결론이 난다. 그러나 이 필적 조사라는 것은 모두 엉터리였다. 전문가들의 사기행위였다는 것은 나중에 죄다 드러난다.

 

이렇게 증거가 조작되고 짜맞춰지면서 드레퓌스는 유죄판결을 받고 ‘악마도(惡魔島/Devil’s Island)’라는 이름의 절해고도(絶海孤島) 감옥에 영구 유폐되는 형을 살게 된다. 법정은 편파적이었고 일방적이었으며 언론은 대대적인 공세를 퍼부었다. 드레퓌스를 옹호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1894년 11월, 반 유대주의 선봉에 나선 극우 카톨릭계 신문인 <리브르 파롤(Libre Parole)>은 이 사건을 대문짝만하게 실었고 반유대주의 선동과 함께 ‘반역자 드레퓌스’를 공격했다. 이 신문의 주인 드뤼몽은 당대 교회권력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던 인물이었다. 카톨릭 교회는 프랑스 혁명으로 빼앗긴 기득권 탈환을 위해 군대의 국가주의와 손을 잡고 있었고 드레퓌스 사건은 교회권력과 반혁명 국가주의 세력의 복귀를 위해 너무나 적절한 사건이었던 셈이다.

 

드뤼몽은 프랑스 혁명을 땅속에 파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이었다. 게다가 카톨릭 교회는 이 사건이 터지자 “유대인들을 프랑스 국적으로 받아들인 헌법부터 문제가 있다. 유대인들을 추방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여론조작과 집단 히스테리

 

 

『나는 고발한다』로 번역된 『장교 드레퓌스: 집단 히스테리의 서사(Captain Dreyfus : The Story of a Mass Hysteria)』의 저자 슬로바키아 출신 언론인 니홀라스 할라스(Nicholas Halasz)는 프랑스 언론들이 어떻게 여론을 몰아갔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만일 전쟁이 일어났다면 드레퓌스는 자기 동료들을 죽음으로 몰아갔을 것이다.”

“드레퓌스가 병력 동원의 규모, 시간, 밀집 지역에 대한 정보를 적에게 팔아 넘겼다.”

“드레퓌스는 러시아에서 독일 귀족과 함께 있었던 사실이 목격되었다.”

“귀족출신 이탈리아 미녀가 이런 반역을 꾀하도록 했다.”

“드레퓌스는 프랑스 영토를 차지하려고 획책해온 국제 유대인 조직의 스파이다.”

“이건 개인적 범죄가 아니라 유대인이라는 종족 전체의 수치가 드러난 사건이다.”

 

모두 허위였으나 프랑스 대중들은 급속도로 흥분했고 법정과 거리에서 “유대인을 죽여라”라고 외쳤으며 실제로 죽임을 당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공포 분위기였다.

 

진실로 가는 길과  “나는 고발한다”

 

“나는 무죄입니다."

 

드레퓌스의 항변은 이 거대한 소란 속에서 묻혀갔다. 그러나 진실은 침묵당하지 않았다. 제2국의 책임자로 온 피카르 소령은 드레퓌스와 관련된 문서가 그의 유죄를 전혀 입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함께 섞여 있는 문서들은 진실을 교란시키기 위해 마구잡이로 집어 넣은 것임을 확인했다. 뿐만 아니라 드레퓌스를 첩자로 몰기 위해 한 통신문을 엉터리로 번역한 것도 발견하게 된다. 이 문서가 법정에서 공개되면 검증이 가능하고 진실 입증은 자명했다.

 

훗날 밝혀진 문서 하나는 어느 여인이 쓴 서한으로 정체모를 중국인이 계속 언급되어 제2국의 의심을 사는 바람에 드레퓌스 서류철에 함께 묶여져 있었다.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시간이 있으면 내일 오십시오. 오늘은 중국인의 방문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국인’은 알고 보니 생리주기를 말하는 것이었다. 어처구니없는 문서 해독이었다.

 

드레퓌스 사건은 어느새 4년째를 넘고 있었다. 그러던 1898년 1월, ‘새벽’을 뜻하는 “로로르(L’Aurore)”지 전면에 에밀 졸라가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을 밝혀달라고 대통령에게 요청하는 편지가 실린다. 클레망소가 발간하던 신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J’Accuse!)”였다. 프랑스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이 대문호의 글을 읽게 되고 사태는 바뀌어가기 시작한다. 그는 진범인 에스테라지가 무죄 석방되고 드레퓌스는 종신형을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해 준엄하게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모든 진실, 모든 정의를 일격에 내리치는 것입니다. 프랑스는 스스로의 얼굴에 낙인을 찍었고 역사는 이 같은 사회적 죄악이 저질러진 것이 귀하의 통치기간 중이었음을 기록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드레퓌스에 대한 변호를 하기 시작한다.

 

“드레퓌스가 당하고 있는 박해는 우리 시대의 불명예인 반유대주의의 풍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군부(軍府)는 드레퓌스가 무죄라는 사실을 인식하고서도 이 무서운 사실을 그들 가슴 속에 비밀로 숨긴 채 1년이 지났습니다. 이들은 발꿈치로 국가를 짓이기고 ‘국가이익’이라는 거짓 미명 하에 진실과 정의의 외침을 목구멍 속으로 도로 넣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 범죄를 저지른 자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거명하며 그 이름 마다 “나는 아무개를 고발합니다”라고 외치면서 이렇게 그 역사적 서신을 맺고 있다.

 

“이 외침으로 인해 내가 법정으로 끌려간다고 해도 나는 그것을 감수하겠습니다. 다만 누구나 다 보는 청천백일(靑天白日) 하에 나를 심문하도록 하십시오.”

 

온 세계가 열광했으나 프랑스의 극우 청년들은 “졸라를 죽여라”라고 거리에서 시위를 했고 졸라는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된다. 이윽고 그는 엉뚱하게도 군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명목으로 재판을 받고 재판부는 일방적인 재판진행을 통해 그에게 1년 징역형을 언도한다. 군의 문제를 거론할 때마다 안보를 이유로 저지하자 이에 대해 졸라는 이렇게 법정에서 답한다.

 

“국가의 명예가 한 장교(에스테라지)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허용하면서 그에 관해 말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씀이군요.”

 

승리, 그리고 우리는?

 

안보를 내세운 군의 국가주의와 대결한 졸라의 대응이었다. 그는 상소했으나 그의 신변을 우려한 지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영국으로 망명을 떠난다. 사건은 결국 1906년, 드러난 증거의 진실에 입각해서 지난 시기 내려졌던 법원의 유죄판결이 무효화되고 졸라는 돌아온다. 드레퓌스는 소령으로 진급, 최고의 영예인 ‘레지옹 도뇌르 (Légion d'honneur) 훈장’을 받고 모든 것이 복권된다.

 

1908년 졸라는 숨을 거둔다. 1918년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 된 독일은 프랑스에게 알자스-로렌 반환을 통보하고 강화조약을 요청하는 통지문을 보낸다. 이걸 프랑스인들에게 알린 사람은 당시 총리가 되었던 클레망소였다.

 

승리로 가는 길은 험난했고 길었으나 프랑스 대혁명의 공화정에 대한 의지와 정신은 온전히 복원되었다. 19세기는 쓰레기의 세기로 마무리지었다고 했던 로제르 마르땡 뒤 가르의 말은 20세기 초반에 다시 반전을 이루었다.

 

 

우리의 시대에 조국과 그의 가족, 그들이 겪는 고통과 박해는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까? 이는 진실과 허위의 문제인 동시에 정의와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내는 촛불혁명의 정신과 깊숙한 관련을 지닌 사건이라고 한다면 어떻게들 여길까? 정치검찰의 국가주의가 촛불혁명의 시민적 권리를 짓밟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의 드레퓌스 사건은 미래의 역사에서 어떤 자리를 갖게 될까?

 

쓰레기 더미에서 진실과 정의를 세우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가장 먼저 할 일은 아무래도 에밀 졸라처럼 “나는 고발한다”에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분명한 실명을 거론하면서 그 글을 썼다. 그 서한을 실은 신문의 이름은 다시 새기자면 "새벽(로로르/L’Aurore)”이다.

 

 

클레망소라는 탁월함과 용기를 두루 갖춘 정치 지도자, 에밀 졸라라는 세계적 대문호, 피카르라는 양심적인 군인, 그리고 이들의 노력에 눈을 뜨게 된 프랑스 시민들은 프랑스 대혁명을 마침내 구했다. 오늘, 우리가 되새길 역사의 한 극적 장면이다. 망명생활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올 채비를 한 에밀 졸라가 “로로르”지에 싣게 될 기고문의 제목은 “정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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