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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파친코”, 그 막다른 길목에서

 

 

<피와 뼈>

 

일본의 저명한 희극 배우 기타노 다케시가 김준평으로 나왔던 영화 <피와 뼈>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재일작가 양석일 원작인 이 영화는 제주도 출신의 한 조선인 청년이 일본 오사카에 건너가 어떻게 괴물이 되고 마는지 그 처절한 삶의 비극을 그려냈다. 원작이나 영화나 모두 재일 조선인들의 삶에 도사리고 있는 울분과 고통이 거침없이 분출된다.

 

무엇보다도 김준평이 휘두르는 폭력은 식민지 청년이 쏟을 곳 없는 욕망과 분노가 그의 가족에게 향하고 있고, 그 강도가 견디기 쉽지 않다는 것에서도 강력한 서사를 펼쳐낸다. 워낙 뛰어난 연기 탓에 몰입도가 높은 기타노 다케시를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그는 일본 배우가 아니라 그 파란많은 1920년대와 30년대를 거쳐 누구도 맞서기 어려운 사나이가 된 괴팍한 조선인 남자처럼 여겨질 정도다.

 

결국 김준평은 북송선을 타고 북으로 간다. 제주 출신의 그가 택한 최후였다. 식민지 출신의 한 청년이 일본 오사카라는 이국의 한 도시, 그 구석진 조선인촌에서 버텨낸 삶의 뜨거운 아픔을 양석일은 전한다. 인권이 유린된 삶을 살아가는 아이들의 이야기, <어둠의 아이들>로 이름을 알렸던 그의 <피와 뼈>도 역시 잔혹한 현실의 단면도를 그대로 드러낸다.

 

일본의 평자들은 그래서 이 작품들은 우리에게 ‘구토’를 일으킬 정도라고 하기조차 한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이게 구토로 끝나는 일이었을까? 삶은 망가질 대로 망가지고 어디에도 도피처가 보이지 않는 몰리고 몰린 이들의 일상은 그 자체로 이미 더러운 감옥이었다. 이걸 어떻게 견디고 이겨나갈 것인가?

 

 

역사가 망가뜨린 삶, 그러나

 

 

 

재미작가 이민진의 『파친코』는 또 다른 조선인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시대의 현장은 <피와 뼈>나 마찬가지로 식민지 조선과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일본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한 가족의 연대기로 이어진다. 소설의 첫 문장은 작가 자신이 스스로에게도 가장 깊은 의미를 지닌 한 줄이 된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영어 원작의 첫줄은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무슨 말일까? 역사는 우리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말았지만, 그까짓 것 아무렴 어떤가? 그렇다고 계속 기죽고 꿀릴 우리가 아니다, 그 과거가 우리를 쥐락펴락 할 수 없어.

 

소설은 여러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그들이 겪어내는 때로의 참담함과 때로의 극복, 그리고 삶의 굴곡을 연대기적으로 풀어낸다. 19세기가 종료되고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는 1900년대 초로 시작해서 이야기는 1989년으로 마무리된다. 영화 <파친코>는 시대를 교차하면서 복합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이라 현재와 과거가 맞물려 서로를 설명해준다.

 

<파친코>의 첫 문장은 톨스토이의 <부활>, 그 첫 문장의 메시지를 닮아있다.

 

“수십만명의 인간들이 넓지도 않은 땅덩어리에서 빽빽이 모여 살면서 그 땅을 황무지로 만들고, 생명체라고는 그 어떤 것도 자라지 못하도록 돌 더미로 뒤덮고, 돌 더미 사이로 풀이 비집고 나오면 닥치는 대로 뽑아버리고, 석탄과 석유를 마구 태우고 나무를 베어내어 금수(禽獸)들이 떠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도시에도 봄이 오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가로숫길 잔디밭뿐만이 아니라 보도블록 사이에도 미처 뽑아내지 못한 잡초들이 따뜻한 햇살을 머금고 파릇파릇 돋아났다.”

 

밟아도 밟아도 다시 일어서는 잡초같은 민초들의 힘, 그게 역사의 비정함을 이겨내는 비밀이다. 소설 <파친코>의 주인공은 여럿이나 그 가운데 이 모든 서사의 모태는 역시 선자다. 한자로 그 이름이 어찌 되는지 확정은 할 수 없으나 짐작으로 미루어 보건데 “선자(善子)”가 아닌가 싶다.

 

치열한 현실을 살아내는 것은 그저 생존의 끈질김만이 아니라 본래 그 안에 간직하고 있는 ‘선’을 끝까지 지켜낼 때 비로소 진정한 승리가 된다. 선자는 부산 영도 가난한 하숙집 딸인데다가 아버지 훈은 언청이에 잘 걷지 못하는 장애인이다. 그런 남자에게 시집온 엄마 양진 역시 가난한 집 딸로 서로 결혼할 만한 처지가 아닌데 가까스로 부부가 된 이들이다. 선자는 몇 번 아이들을 잃고 난 뒤에 생겨서 죽지 않고 살아난 이들의 딸이다.

 

소설은 훈이 자신의 딸을 얼마나 지극히 사랑하고 아끼는지 보여준다. 영화에서도 그 장면들은 가슴 시리도록 다가오게 한다. 아버지 훈의 부모도 그랬고 훈 자신도 자식 사랑이 하염없다. 남들이 외모를 보고 무시해도 된다고 여기는 세상과는 달리, 그 사랑을 받으면서 선자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길러간다. 그리고 그게 바로 선자의 강인함이다.

 

작가 이민진은 어느 대담에서 밝히기를 한국에서 가장 뜨겁게 느꼈던 건 ‘정(情)’이라고 말한다. 사실 그 정은 오늘날 사라지고 있는 우리의 체질이기도 하다. 가령 ‘인정(人情)많은 아주머니’, 라는 표현은 실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잠복해있거나 아직은 남은 ‘우리의 정서’라는 유전자다. 그건 작품에서 기독교적 사랑과 결합한다.

 

해서 작품의 주인공들은 성서에 등장하는 이들의 이름을 갖는다. 1대의 사무엘, 이삭, 요셉, 그리고 2대의 노아와 솔로몬. 사무엘은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독립투쟁과 연결되어 죽음을 당하고 선자와 결혼하는 목사 이삭도 결국 고문과 투옥으로 삶을 마감한다. 요셉은 일본으로 건너온 이삭과 선자를 돌보는 이가 된다. 마리아와 그 아들 예수를 지켜낸 요셉을 떠올리게 한다. 요셉의 처 경희도 이들의 보호자가 된다.

 

선자와 사랑을 나누고 임신을 하게 하는 고한수가 정작 노아의 아버지이나 이삭은 이를 알고도 선자와 결혼하는 선택을 한다. 이삭의 아들은 솔로몬이고 그는 소설의 후반부를 이끌고 가는 주인공이 된다. 고한수도 가난한 조선인 청년이었으나 야쿠자 밑에서 부를 거머쥐고 선자와 그 가족들의 후견인이 되지만 결국 그의 정체를 알게 된 아들 노아가 죽게 되는 원인이 되는 비극의 주인공이다. 고한수의 삶은 따로 그의 서사가 필요한 존재다.

 

파친코, 막다른 길목

 

소설의 모든 이야기를 정리할 수는 없으나 이들이 엉켜 공유하게 되는 삶의 진지는 “파친코”다. 어려운 형편이나 와세다를 합격한 노아가 학교를 그만두고 선택하는 직장이 파친코이며 공부에 관심이 없는 그의 동생 모자수(모세의 일본식 이름)가 애초부터 삶을 구축하는 현장 또한 파친코이다.

 

굴지의 기업에 다니던 솔로몬이 계약관계로 곤경에 처하자 그때까지 승승장구하던 인생을 정리하고 택하게 되는 것도 아버지 모자수가 경영하던 파친코가 된다.

 

모자수는 아들 솔로몬이 파친코에 손을 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제가 이 일을 하는 게 왜 싫으세요?”

“널 미국인 학교에 보낸 건... 그렇게 하면 아무도 내 아들을 멸시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

“아버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거 아시죠?”

“나는 한 인간으로 대접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을 하고 돈을 벌었어. 내가 부자가 되면 사람들이 날 존경할 거라고 생각했지.”

 

이런 대화가 오간 뒤 솔로몬이 아버지의 탁자에서 매출기록을 담은 원장을 집어들고 말한다.

 

“이거 뭔지 설명해주세요, 아버지.” 그러자 모자수는 잠시 멈추었다가 원장을 펼쳐든다. 파친코의 대물림이 시작되었다. 아들은 아버지를 해방시킨 것이고 아버지는 자신의 삶에 대한 새로운 자부심을 얻게 된 셈이다. 파친코는 더는 모욕과 멸시, 그리고 남루한 삶의 증거물이 아니었다.

 

“파친코”는 대체 무엇일까? 도박이다. 미국의 슬럿 머신처럼 레버를 잡아당기면 구슬이 치고 내려가는 기계를 대하고 사람들은 운을 건다. 그건 결코 확실하지 않다. 게다가 파친코는 조작된다. 대박맞을 확률을 떨어뜨리는 기술이 그 안에 걸려 있고 그걸 손님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조작된 확률의 남은 가능성에 희망을 둔다.

 

일본 사회에서 파친코는 대체로 조폭 야쿠자의 사업이다. 그래서 파친코 사업에 관련되는 이들은 주변에서 두려움이나 멸시의 대상이 된다. 재일 조선인들이 그 어디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현실을 뚫고 나가는 길이 여기에 열려 있으니 야쿠자, 파친코, 조센징은 하나의 덩어리다. 일본인들에게 야쿠자는 무섭고 파친코는 드나들고 싶고 조센진은 혐오와 멸시의 대상이 되어도 그들에게 안전하다.

 

재일 조선인, 재일 한인들에게 파친코는 막다른 길목에 열린 샛길이다. 솔로몬은 아버지 모자수가 야쿠자와 관련되어 있지 않은 채 사업을 하고 있음을 안다.

 

“아버지는 정직한 사업가에요. 아버지가 세금을 내고 모든 허가증을 받는다는 거 알아요.”

 

그래도 조선인에 대한 차별은 엄존한다. 그걸 뚫고 나갈 수 있을까? 와세다 출신의 노아, 학력이 보잘 것 없는 모자수, 그리고 미국 컬럼비아 대학 출신의 솔로몬은 파친코 1세대와 2세대의 현실과 미래좌표를 보여준다.

 

미국에서 인종차별과 인종주의의 교과서가 되다시피한 조지 윌리엄 헌터의 『시민을 위한 생물학(Civic Biology)』은 “열등한 인종이 세상에 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죽이는 것이 가장 괜찮겠지만 동물도 아닌 인간을 그럴 수는 없으니 우생학적 조처를 취하거나 이들은 따로 격리시켜 살게 하는 것이 제일 좋다.” 흑백 분리정책의 이론적 기초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천대의 대상이 되어온 부라크민과 조선인들의 촌락은 그렇게 울타리가 쳐졌다. 파친코는 그걸 넘어서는 하나의 경로가 되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다 파친코 앞에 있는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우리도 알 수 없는 거대한 권력이 이미 짜놓은 분리정책의 틀 안에 살고 있는 거다. 그러다가 들어선 막다른 길목에서 누군가 이미 조정해놓은 게임을 마주하고 그래도 뭔가 수가 나겠지 하는.

 

그런데 작품 <파친코>는 아예 그걸 움직이는 주역을 내세우고 있다. 파친코의 운수에 매달리는 게 아니라, 그걸 틀어잡고 운수를 결정하는 주인공으로 말이다.

 

 

선자는 어느 날 남편 이삭의 무덤을 찾는다. 거기서 노아의 소식을 듣게 된다. 어느 날 종적을 감춘 아들의 이야기다. 와세다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던 그가 아버지의 묘지에 찾아왔고 무덤지기에게 책도 소개했다는 걸 듣는다. 묘지기가 가장 감명받은 책은 찰스 디킨슨의 『데이비드 코퍼필드』였다. 영국의 파친코다. 선자는 자신을 기다리는 경희에게 돌아간다. 이렇게 소설은 마무리된다.

 

영화 <파친코>는 소설을 입체화시키는데 성공했다. 윤여정, 이민호 정도를 빼고는 잘 알려진 배우들이 아니나 그들의 연기는 놀랍다. 선자로 나오는 김민하, 솔로몬 역의 진하는 보는 이들을 집중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양진으로 나오는 정인지도 깊은 연기를 보여주고 그 자신이 재일한국인인, 모자수로 나오는 박소희도 인상적이다. 한국어, 일본어, 영어가 정확하게 구사되고 섞이는 장면들도 특별하다.

 

배우도 그렇고 소설의 주인공도 파친코가 낳은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들이다. 시대는 그렇게 밀고 나가진다. 한 치라도 더 밀고 나가면 된다. 선한 마음과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의 자세로.

 

막다른 길목에도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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