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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동아시아의 소용돌이 속에서 [갑신혁명의 길 2]

 

민비의 질문, 그리고 위태로운 혁명

 

“경(卿)들이 지금 말하는 변란(變亂)은 청나라 측에서 일으킨 것인가? 아니면 일본 측에서 일으킨 것인가?” 김옥균이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고종과 민비에게 급변이 일어났으니 속히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야 한다고 하자 민비가 날카롭게 쏘아 물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었는데, 이는 정세의 축이 어디에서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기습적인 반격이었다. 또한 외세의 위력이 주도하고 있던 현실에서 그 어떤 정변(政變)도 국제적 관계와 밀접하게 돌아가는 것을 인식한 발언이기도 했다.

 

 

거사는 이미 시작되었고 군주(君主)를 자신들의 손에 장악하는 것이 승패의 요체였는데 여기서 주춤거리면 잠시의 지체도 전체의 흐름을 끊어버릴 수 있다. 때마침 폭음(爆音)이 터지자 피신해야 할 상황이 명백해졌다. 주변에 조선 호위군이 없자 고종은 일본군이, 민비는 청군이 호위해주기를 바라는 처지였다. 이미 짜놓은 대로 일본군 출동을 위한 수순으로 들어가야 했다.

 

 

박영효가 백지를 펼쳐 들자 왕은 노상에서 김옥균이 말하는 대로 “일본공사래호짐(日本公使來護朕/일본공사는 와서 짐을 호위하라”를 쓴다. 이 칙서(勅書)는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에게 전달되고 준비하고 있던 일군(日軍) 150명이 무기를 들고 현장에 당도한다. 바로 이 순간이 갑신혁명이 도리어 삼일천하(三日天下)의 짧은 정변으로 실패하는 결정적 국면이었다. 무력으로 성공을 보장하려는 계획은 그로 말미암아,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있었으니 전투력과 전투의지가 없는 세력인데 그런 외세에 의존하면서 자멸(自滅)의 문을 열고 말았던 것이다. 역설적인 사태였다.

 

 

준비가 그리 허술했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 영국 등과 외교적인 틀도 미리 짜놓았고 병력도 나름 대비해 놓았었다. 당시 청은 3천명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다가 프랑스와 베트남 문제로 전쟁이 일어나자 절반을 전쟁현장에 투입하기 위해 철군시켰다. 이런 국면을 염두에 둔 김옥균은 제1 저지선으로는 1천명의 전영(前營), 후영(後營) 조선군을 배치하고 제2선은 150명의 일본군, 그리고 제3 저지선으로서는 사관생도 14명과 비밀결사 병력인 충의계(忠義契) 소속 43명 등 총 1200명으로 청군과 맞먹는 병력을 갖추어 놓았다.

 

하지만 심각하게 오판(誤判)한 바가 있었다. 청군이 출동하자 민씨 세도정치의 중심에 있던 민영익의 휘하로 애초 수구세력인 전영, 후영의 조선군은 청군에 합세해서 창을 거꾸로 들었고 일본군 역시 필사적인 전투력을 과시했던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 1876년 일본과 수호조약 이후 일본상인들에 의한 상권(商圈) 장악으로 고통받고 있던 민심이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높아 개화파의 정변은 ‘왜놈들과 짜고 나라를 팔아먹는 대역죄’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갑신혁명의 거사는 이러면서 결국 고립무원(孤立無援)으로 무너지고 만다. 당연히 관련자들은 거의 대부분 참혹한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사소한 실수의 후과(後果)

 

 

우정국(郵政局)에서의 계획은 처음 순서였던 안동별궁(安洞別宮)에 대한 방화(放火)부터 제대로 되지 못해 우왕좌왕할 판이었는데 그런 가운데 김옥균의 기지로 제3의 방화가 이어지면서 세도정치의 중심에 있던 민씨와 사대당에 대한 살벌한 척살(刺殺)이 이어졌다. 제1차 제거대상이었던 민영익은 부상으로 그쳤으나 3군의 총수였던 이조연, 한규직, 윤태준을 비롯해서 민영익의 부(父)이자 권세가인 민태호, 왕족의 근친으로 풍양조씨 가문에서 권세의 일부를 지키고 있던 조녕하 등 사대당 거물들은 거의 죽음을 면치 못했다. 민태호의 경우에는 자신의 세력이 강성했을 때 김옥균의 독립당 세력을 모조리 참살하려 했다가 거꾸로 자신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갑신의 거사는 유혈(流血)이었다. 더군다나 민비의 최측근이던 환관 유재현도 고종과 민비가 보는 앞에서 칼에 찔려 죽게 된다. 천하가 바뀐 것이다. 개화파 세력의 세상이 되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고 대원군의 아들이자 고종의 형인 이재원(李載元)을 영의정으로 하는 신정권 명단이 발표되었다. 거사 다음 날인 1884년 12월 5일이었다. 각국 외교관들이 입궐(入闕)했고 국정쇄신의 정령(政令)이 포고되었다. 과정은 불안했으나 일단 정세를 쥐었다고 여기자 취해진 매우 신속한 조처였다.

 

그 주요내용을 간추리자면 (1) 대원군을 환국(還國)시킬 것 (2) 청에 대한 조공의 허례 폐지 (3) 문벌폐지와 인민평등권 제정 (4) 세제(稅制)의 대대적 개혁으로 민생의 해결 (5) 규장각(奎章閣) 혁파로 근대교육 시작 (6) 육조(六曹)외의 관청 모두 혁파 등으로 자주국가의 건설과 함께 민생을 위한 대대적인 정치, 행정의 개혁조처를 추진하는 동시에 봉건적 신분질서의 타파와 인민주권의 평등을 정치의 원리로 내세운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내용이자 그 자체로 당연히 “혁명”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그런데 대사(大事)란 아주 작고 사소한 곳에서 구멍이 뚫리면 속절없이 전체가 허물어지기 마련이다. 군주의 신변을 장악하고 국제관계를 정돈하는 과정에서 청과 대치하는 상황을 풀지 못하면 거사의 성공여부는 장담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청의 속방(屬邦)은 더는 아니라는 개화파 정권을 청이 용납할 리 만무했으나 그렇다고 여러 나라가 조선의 정국과 관련되어 있는 국제 관계가 있는 현실에서 그대로 궁궐에 난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국면에 등장하는 인물이 경기감사 심상훈(沈相薰)이다. 그는 고종의 안위를 묻는다는 핑계로 입궐을 시도했는데 박영효는 그가 간신(奸臣)이라 대사를 그르칠 수 있다며 이를 막아 나섰고 김옥균은 그가 자신의 벗이라면서 그의 지모(智謀)가 언젠가는 쓸 데가 있을 것이라며 궐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는 두고 두고 최대의 실책이 되고 김옥균에게 거사에 필요한 냉철함, 치밀함이 부족했던 바를 드러낸 치명적 사례로 남았다.

 

 

심상훈은 원세개가 보낸 선물이라며 고종에게 비함(秘函)을 진상했는데 그 안에는 창경궁의 선인문(宣仁門)을 청군이 공격하는 순간, 이를 신호로 여기고 북문으로 탈출하라는 기밀문서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사태를 뒤집는 청의 작전지시였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비는 청군의 공격이 유리하고 개화파 세력의 수비가 취약할 수 있는 보다 넓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이전할 것을 꾸준히 요구하면서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이에 동조, 그대로 추인해버리는 바람에 역전(逆轉)의 무대가 마련되고 말았던 것이다.

 

민비를 가볍게 보았다

 

김옥균과 다케조에 등은 민비를 쉽게 보았던 것이다. 1863년 대원권의 섭정으로 실질적 권세가 그의 손에 있던 시기, 민비는 권력 회수를 위해 매우 정밀한 작업을 차근차근 해나간다. 그것은 대원군 고립작전과 함께 자신과 함께 할 세력의 포섭전략이었는데 1873년, 대원군과 대척점에 있던 최익현(崔益鉉)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만들면서 그가 탄핵상소를 올리게 해 고종이 그의 손을 들어주자 상황은 급전직하(急轉直下)가 되었다. 대원권의 시대는 이후 몇 번의 재기가 있긴 해도 이 시기에 결정적으로는 저물고 말게 된 것이었다. 고종보다 한 살 위인 민비의 나이가 겨우 23세 때였다.

 

민비는 고종이 총애하는 궁인(宮人) 이씨가 아이를 낳게 되자 자신의 안위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고종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치열한 노력을 기울인다. 이와 함께 민태호, 민겸호 등 외척 민씨 문중의 인물들을 정부 요로에 앉히고 조대비(趙大妃)의 친조카 조녕하 등을 대원군 치하에서 중용되지 못한 것을 활용, 민씨 세력과 힘을 합치게 한다. 또한 대원군에게 제거되었던 안동 김씨 세력 가운데 김병익, 김병국 등도 함께 연대하게 하며 정계의 원로 풍양 조씨 가문의 조두형(趙斗涥)을 각별히 대하고 대원군의 서원철폐에 불만을 품게 된 사대부 양반계층, 재야유림까지 자신의 세력권에 빨아들인다.

 

최익현은 이런 과정에서 민비가 손을 잡게 되었던 것이라 그녀의 정략 정치가 기가 질릴 지경이다. 자신의 권세를 위해서 이용할 수 있으면 죄다 이용했던 것이다. 임오군란 이후에는 여기에 무속정치까지 가세했으니 나라 꼴이 어찌 되었을지는 재론의 의미조차 없다. 그렇게 되기 전, 민비는 대원군의 극단적 척왜(斥倭)정책이 도리어 일본의 정한론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는 여론을 만들어 최익현의 탄핵을 부추겼고 이를 칭찬하고 받아들인 고종은 대원군 탄핵여론을 활용, 대원군의 정치관여를 금지하면서 자신의 친정(親政)을 선포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민비가 정치활동의 전면에 나서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국정운영에 있어서 청과 연결된 묄렌도르프의 역할도 민비의 의중과 직결되었다. 경제난의 타개를 위한 화폐정책과 관련해 당오전(當五錢) 주조(鑄造) 문제가 나오면서 정부 내에서 격론이 벌어졌는데 이 문제를 둘러싸고 김옥균과 묄렌도르프는 치열하게 대립했다. 묄렌도르프는 당백전(當百錢)까지 유통시키자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 김옥균은 격분하면서 고종에게 호소한다.

 

 

“지금 우리 조정을 살펴보면 당오전의 피해는 화폐제도를 문란시켰고 또 묄렌도르프같은 몰지각한 외국 사람을 잘못 초빙하여 그의 실정(失政)은 날로 더하고 청나라에 의지하여 자기권세를 옹호하고 누리는 자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제도를 혁파하고 민력(民力)을 배양하며 자주독립을 선포해야 합니다.”

 

민씨 세도정치가 민생을 아랑곳하지 않고 화폐를 남발하면서 자신들의 금고를 채우고 외세에 의존해서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주장을 한 것인데 이런 권고들이 제대로 먹혀 들지 않자 결국 혁명적 대경장(大更張)의 길로 나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도 일본을 이용하여 청을 압박하는 국제관계상의 전략을 취했다가 도리어 역공을 당하고 그 결과로 청과 일본의 군대가 향후 조선반도에 동시 진군할 수 있는 결과를 낳고 마는 비운(悲運)의 역사를 열게 된다.

 

냉엄한 국제관계, 지금 우리는?

 

그렇지 않아도 김옥균 그 자신이 이런 사태를 예견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의 동방진출은 밤낮으로 절박하게 다가오고 있고 청일 양국의 국제정세는 날로 불화(不和)일로를 걷고 있으며 신(臣)이 일본 동경에 있을 때에 견문한 것에 의하면 일본은 군비확장에 밤과 낮을 잊은 상태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청일전쟁(淸日戰爭)의 전조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주변 국제정세가 이럴 진데 구태(舊態)를 그대로 지켜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주독립을 선포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면 미래는 강성해질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않았던 조선은 그의 예견대로 청일전쟁의 화마(火魔) 속에서 자주의 길을 잃고 끝내 식민지의 비극에 처하게 된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혁명의 길에 들어섰던 이들 청년 지사들의 역사를 이렇게 적고 있다.

 

“정변에 가담한 이들은 우리나라의 혁명가들이다. 그러나 연소하고 의기가 날카로운데다 경력이 익숙하지 못하고 연구가 깊지 못한 채 급격히 착수한 것이 실패했다. 대저 혁명가나 애국지사는 정치가 극도로 부패한 국면을 맞이하여 대들보가 부러지고 서까래가 넘어지려 하면 치어 죽을 것은 틀림없으니 부득불 파괴하고 고쳐 짓는 방법 밖에 없다.”

 

그러면서 혁명의 과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자루를 쥐어준 것’을 애통해한다. 그러나 나라가 비통한 지경에 있을 때 그대로 침묵하지 않고 역사의 큰 그림을 그리면서 움직인다는 것은 놀라운 용기이자 범상치 않은 기개다. 명치유신 이후 급속하게 변화하는 일본을 보면서 느꼈을 초조함과 절박감, 그리고 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국제패권체제를 일본과 함께 격파한다면 괜찮지 않을까 했던 19세기적 안목의 단순함이 결합해서 그 혁명의 경로가 굴절되고 말았으나 남긴 바 또한 적지 않았다.

 

 

훗날 갑오개혁에서 신분제도와 문벌 폐지를 비롯해 연좌제, 노비와 과거제도 폐지, 약탈적 세제 개혁과 폐지는 갑신의 혁명사가 아니었다면 쉽게 추진하지 못했을 바였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의 첫장이 바로 이 ‘갑신독립당의 혁명실패’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겠는가? 조선 혁명사의 제1차 역사가 그렇게 비롯되었다는 사실(史實)과 함께 이에 대한 끊임없는 혁명의 진화를 위한 성찰의 근본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주(自主)를 향해 가는 역사는 이리도 오랜 세월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하려는 걸까? 거친 세파가 동아시아로 다시 몰려 들고 있는데 말이다. 갑신혁명의 길을 열었던 젊은 혁명가들이 온몸으로 치열하게 쟁취해나갔던 사상적 고투와 함께 용기조차 이 시대에 없다면, 21세기의 한국 그리고 한반도는 어떤 운명에 처할 것인가? 갑신년의 고뇌는 지나간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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