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지털 원주민(ditital 原住民)’. 컴퓨터, 휴대 전화 등 디지털 기기를 어린 시절부터 접하며 성장해 익숙하게 사용하는 세대를 이르는 말이다.
불안, 권태, 외로움, 혐오 등 이 디지털 원주민 세대가 가진 정서를 ‘배설’, ‘카타르시스’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전시가 열렸다.
경기문화재단 경기도미술관(관장 안미희)은 지난달 29일부터 10월 30일까지 ‘당신의 가장 찬란한 순간’을 개최한다. 전시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출생한 젊은 작가들의 작업을 중심으로, 온라인 속 삶에 익숙한 세대의 다양한 욕망을 살핀다.
전시를 기획한 김현정 학예사는 “전시는 디지털 원주민 세대가 바라본 여러 정서 중 ‘욕망’에 집중했다”며 “가상과 현재를 넘나드는 그들의 새로운 욕망 추구 방식과 그들의 감각, 정서가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디지털 이주민으로서 궁금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김한샘, 김희천, 박윤주, 스테파니 모스하머 (Stefanie Moshammer, 오스트리아), 쉬어 헨델스만(Shir Handelsman, 이스라엘), 안가영, 추수, 최지원 등 작가 8인의 작품 28점을 만날 수 있다.

안가영 작가의 ‘KIN거운 생활: 쉘터에서’과 ‘자신을 대체할 수 있는 존재들이 어디에나 존재하는 존재들’은 안식처에 대한 열망과 불안을 동시에 담고 있다.
‘KIN거운 생활: 쉘터에서’는 가상세계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공존에 관심을 둔 모의실험(시물레이션) 게임이다. 12분이 하루가 되는 이 게임은 소외된 다양한 종이 위로하고 돕는 안식의 공간이다. 관람객은 이 게임의 관찰자로,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 ‘메이’, ‘준’, ‘줄라이’의 관계를 온라인으로 관찰하면서 생명의 자연소멸과 핵전쟁, 재난 환경에 노출된 우리의 정서를 가상으로 느낄 수 있다.
‘자신을 대체할 수 있는 존재들이 어디에나 존재하는 존재들’은 게임에 등장하는 거주자들에 대한 소개와 작가의 사유를 함께 들어보는 일종의 관찰 영상이다. 가상공간 보호소에 입주한 복제견 메이, 이주노동자 줄라이, 청소로봇 준은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며 점차 같은 공간에서의 삶에 적응해간다. 하지만 인간과 개, 로봇이 공존하기란 쉽지 않다.
영상을 통해 관람객은 서로가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때, 마지막 안식처에서조차 안식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안가영 작가는 “앞으로 디지털 안에서 만나는 인물뿐만이 아니라, 인공지능이라든지 인간이 아닌 존재들과 어떤 삶을 사는지가 중요해졌다. 그래서 작품에 메시지를 담을 때 ‘복제견’, ‘이주노동자’ 등 다양성과 소외된 부분에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김한샘 작가는 모험담과 판타지물에 등장하는 괴물, 영웅, 천사 등 비현실적인 소재를 통해 초월적 공간을 생성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이하는 ‘라이트닝 로드’는 마법 견습생이 번개 마법을 연습하는 장면을 담은 미니 게임이다. 김한샘 작가가 실제로 좋아했던 게임의 서사와 철학을 담은 이 작품은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 중세시대 영웅담, 모험담을 현재로 소환했다.
작가의 조각 ‘한 목표를 노리는 세 영웅’, ‘철 속의 악마’, ‘신기루’ 등은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굿즈를 확대한 듯한 느낌이다. 작가는 2차원 인터페이스 게임에서 본 것 같은 이미지를 컴퓨터로 그린 뒤, 종이에 출력하고 조각구조물과 병합한다. 과거-현재-미래를 작가만의 방식으로 구분해 조악하고 익살스럽게 제작함으로써 우리가 인식하는 서사와 시간에 대한 차이와 변화를 보여 준다.

고개를 돌리면 최지원 작가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작가는 수공예품의 일종인 낡은 도자인형 이미지를 수집하고, 여기에 인공적이거나 자연적인 요소를 결합시켜 회화를 완성한다.
도자인형을 보면 매끄럽고 화려한 표면에 매료되지만 쉽게 깨져버리는 탓에 아름다움과 긴장감을 모두 주는 양가적인 지점이 있다는 최지원 작가의 말처럼, 작가가 수집한 도자인형은 유난히 광택이 나고 촉감이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김현정 학예사는 “작품에 나타난 매끄러움이 긍정적이고 밝은 면만 보이려는 가상공간의 욕구와 맞닿아있지 않을까 생각했다”며 “모든 것이 매끄럽게 정리되고 선별되어 업로드되는 동시대의 문화가 연상된다”고 말했다.

추수 작가는 자연, 도시, 연결망 환경 등 가상 공간을 넘나드는 인간의 행동 영역과 정보의 유기적인 흐름을 살펴보는 작업을 해왔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 ‘틴더’는 가상세계로 확장된 정보 권력과 디지털 자아, 인간과 사이보그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의 존재 조건이 디지털 환경과 정보로 치환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추수는 디지털 세계에서 반복되는 ‘여성-20대-대중’이라는 이미지의 미의 기준에 대응하기 위한 가상인물 ‘에이미(Amy)’를 창조했다. 에이미는 기존 문법을 따르지 않는 외향, 인격, 가치관 등을 고려해 만들어졌다. 에이미의 창조는 모든 정보 값이 동등하고, 위계 없이 정보를 결합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에이미는 가상이지만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고자 한다. 작가는 정보-가상세계에서의 경계를 허물며 자신과 에이미 그리고 우리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고민해나간다.

전시는 가상과 현실의 구분이 사라진 잉여현실의 세계에서 추구되는 ‘잉여쾌락’이 오히려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종에 대한 감각을 더욱 구체화시킨다고 봤다. 그리곤 쾌락의 정점을 모른 채 욕망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의 시간이 과연 ‘당신의 가장 찬란한 순간’이 될 수 있는지 역설적으로 질문한다.
한편, 경기도미술관은 전시 연계 프로그램으로 ‘작가와의 대화’를 준비했다. ▲8월 12일 안가영 ▲8월 26일 쉬어 헨델스만 ▲9월 23일 박윤주 작가와 ‘줌’을 이용해 비대면으로 진행한다. 10월 21일에는 추수 작가 경기도미술관에서 대면으로 작가와의 대화를 열 예정이다.
[ 경기신문 = 정경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