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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식민지 피해 진상규명 없이 한일관계 미래없다

 

대일배상 요구, 그 시작과 역전

 

 

1947년 8월, 남조선 과도정부는 “대일배상요구 조건 조사위원회”를 조직한다. 미국이 주도하는 대일(對日) 강화조약(講和條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이 문제를 정식 제기하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조사위원회는 해방 당시 일본이 다급하게 남발한 조선 은행권 45억원의 발행보증으로 남긴 공채보상과 반출한 금괴반환 등을 요구하면서 민간피해에 대한 내용도 다음과 같이 그 피해목록을 정리했다. 항목당 자세한 내용이 있으나 일단 제목만 거론해보겠다. 이는 당시 조선은행 업무차장이었고 훗날 한일교섭 과정에서 재산청구 위원회 대표가 된 이상덕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1) 약탈에 의한 손해 (2) 강제동원된 전쟁의 결과로 받은 손해 (3) 학대 강탈에 의한 손해”로서 이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피해를 목록화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요구의 논리는 “징벌적 보복조처로서의 부과가 아니라 희생과 피해 회복을 위한 공정한 권리의 이성적 의무 이행”이었다.

 

 

이보다 앞서 1945년 11월,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은 대일배상사절단 단장 폴리(Edwin E. Pauley)를 동경에 파견했고 그 다음 해인 1946년 남한에도 보내 상황진단을 지시했다. 이에 발맞추어 당시 ‘조선상공회의소’는 대일배상청구서를 제출,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인한 수탈과 파괴의 피해보상없이 조선경제의 복구는 어렵다고 호소했다. 폴리는 이러한 요구에 호의적이었고 그에 따른 제안을 트루만 정부에 보고한다.

 

그러나 1947년이 되면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스트라이크(Clifford Stewart Strike)를 단장으로 하는 새로운 대일배상 특별 조사단이 동경에서 일본 점령 최고 사령관이었던 맥아더에게 배상정책 수정요구가 담긴 보고서를 내놓는다.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뒤바뀌는 이른바 ‘역(逆)코스(reverse course)’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전까지 미국의 대(對)일본정책은 군사주의체제의 기반인 산업능력 박탈이었다. 그런데 도리어 그 반대의 정책을 실시하도록 권고하고 있는 것이었다.

 

골자는 대일 배상정책을 실시할 경우 일본경제에 막대한 부담을 주게 되어 미국의 일본 점령비용을 증가시키고 그것은 미국 납세자들의 부담으로 돌아간다는 논리였다. 이와 함께 일본의 국제적 역할을 냉전체제에 맞추는 논리도 동시에 제안되었다. 우리의 민족적 이해가 묵살되는 과정이 이렇게 비롯되었던 것이다.

 

 

우리로서는 이런 흐름이 국제적으로 확정될 경우 식민지 피해보상은 더는 진전시킬 수 없고 일본에게 면책권을 부여하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따라서 대일 강화조약에 참여, 발언권을 얻고 조약의 서명국가로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했다. 그러나 식민지 문제가 제기될 것을 우려했던 영국이 강력하게 반대했고 당연히 일본도 같은 입장이었다. 영국은 한국이 일본과의 교전국도 아니고 연합국의 일원도 아니라며 자격이 없다는 논리였다. 영국의 이러한 반대는 오늘날에도 명확히 따지고 반성을 요구해야 하는 대목이다.

 

일본의 논리는 그렇다면 어땠는가? 일본 역시도 한국은 일본과 교전상태가 아니었다는 점은 영국과 동일했으나 그에 더하여 “100만명 이상의 재일 조선인들이 연합국 국민으로서 자격을 누리게 되어 재산과 보상을 받을 권리를 갖게 됨으로써 일본에게 크나 큰 부담이 된다. 더군다나 재일 조선인들 대부분은 공산주의자들이다.”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동아시아 냉전체제 구축에 재일 조선인들이 방해가 된다는 것이었고 이들에게 권리를 주는 것은 미국의 정책과도 어긋난다는 식이었다.

 

재일조선인들에 대한 모함과 샌프란시스코 조약

 

 

1951년 샌프란시스코 회의가 열리기 전, 당시 수상이었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는 덜레스(John Foster Dulles) 국무부 특별보좌관에게 이와 같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론’을 설파했고, 그 이전에 이미 맥아더에게는 ‘조선인들은 불법입국자’이기 때문에 모두 본국으로 송환조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강제로 끌고 가 한껏 부려먹고는 빨갱이라고 뒤집어 씌워 아무런 피해보상도 없이 길바닥에 내버리려 했던 것이다. 뿌리가 같은 민족이라고 동조동근(同祖同根)을 내세우고 천황의 신민인 황민(皇民)교육을 그토록 강조했던 식민지 지배정책의 기만을 스스로 폭로했던 셈이다.

 

 

미국이 애초에는 한국에게 대일 강화조약 참여자격을 주려 했다가 영국과 일본의 반대, 그리고 미국 자신의 냉전정책의 이해관계로  한국은 일본과 교전상태가 아니었다는 논리로 배제하자, 이에 우리는 강력히 반발한다. 당시 주한 미대사 양유찬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한국 임시정부가 일본과 교전상태에 있었으며 일본과 전투한 한국인 부대가 중국에 있었고 중국군과 함께 항일투쟁을 했을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가 대일(對日) 선전포고(宣傳布告)를 했다”고 항의했으나 “미국은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한 적이 없다”는 논거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기서 하나 유념할 것은, 우리의 독립투쟁사가 가지고 있는 국제정치적 가치다. 이것이 당시에 제국주의 체제가 만들어낸 정세와 국제법의 맥락에서 의미있게 현실에서 관철되지는 못했으나 얼마나 중대한 문제인가를 절실하게 깨닫게 한다. 일본 제국주의와 처절하게 교전했던 민족의 세계사적 발언권은 지금도 다시 복구되고 부각되어야 한다.

 

 

하지만 결국 우리의 한일교섭에서 기본틀은 이렇게 미국의 주도권이 지배한 국제현실에서 구겨지고 말았다. 미국은 한국 임시정부만 승인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이미 1905년 태프트-카츠라 협약으로 일본의 조선통치를 승인했다는 점에서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논할 수 없었고 이것이 불거질 경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기본 목표인 대일 무배상(無賠償)에 따른 동아시아 냉전체제 확립에 장애가 발생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미국의 냉전체제 확립에 우리의 민족사가 짓밟히고 만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외교사 부문에서 탁월한 기여를 해온 김용구의 논리와 주장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김용구 연구 회고록』에서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한국과 조선의 만남은 해적행위로부터 시작되었다. 해적선 제네럴-셔먼호의 소실(消失)을 응징한다면서 1871년 6월 10일부터 시작된 미 해군의 ‘48시간의 전투’의 결과로 사살된 조선인은 350명 전후에 이르렀다. 이 전투는 ‘19세기 동안 미국이 동양국가에 대한 군사작전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조선인의 죽음은 1899년 필리핀 반란사건 이전에 미국인이 동양인을 살육한 행위 중 가장 많은 숫자였다,”

 

그는 이들 미군 병사들이 남북 전쟁 참가자였다면서 “그들은 총질의 기회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으며 많은 조선인들은 마치 ’토끼들처럼 사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김용구는 “제너럴-셔먼호는 해적선이기 때문에 ‘해적선 제너럴 셔먼호’, ‘병인양요’는 ‘1866년 프랑스의 조선침략’, 오페르트 사건은 ‘도굴범 오페르트’, ‘신미양요’는 ‘1871년 미국의 조선침략’으로 개칭해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제국주의침략과 그로 인한 피해에 대해 정리해야 한다는 논리다.

 

샌프란시스코 회의는 식민지 지역에서 수행된 민족해방의 실천, 관점과 논리가 침해당했으며, 1951년에 시작해서 1965년까지 14년의 시간을 통해 결론을 낸 한일회담은 식민지 불법지배 문제가 논의의 대상에서 소멸되어버린 채 경제논리만 남고 말았다. 그런 결과, 청구권이라는 이름 아래 “3억 달라 상당의 무상 (생산물과 역무/役務) 공여, 2억 달라 분의 장기저리 대부 (생산물과 역무)”로 최종결정이 나고 청구권 문제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음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내용을 확인해보자면, 3억 달라는 현금 공여도 아니고 생산물과 역무라는 방식의 일본 경제확장이었고, 2억달라는 갚아야 하는 부채였다. 게다가 한일협정에서 한국과 일본의 기본관계는 식민지 불법지배 문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과거사 청산은 철저하게 도외시되었던 것이다. 과거를 언급하지 않고 경제적 거래만으로 문제를 접근한 결과였고 이로써 식민지 지배에 따른 민족적 고통과 피해는 진상규명조차 없는 채로 묻히고 말았으며 일본은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에 따른 보상문제를 털고 가게 된 것이었다.

 

돌아보면 1950년대만 해도 아직 일제 식민지 통치기간의 고통에 대한 기억이 생생했고 피해 당사자들이 민족 전체의 규모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으로 해서 피해 진술과 진상규명에 따른 논의가 가능했던 상황이었다. 그런 까닭에 초기 한일교섭 과정에서는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피해목록에 약탈에 의한 피해를 주장할 수 있었고 그 주장의 강도는 절박했다. 그러나 일본의 패전으로 휴지조각이 된 군표(軍票) 배상 정도의 요구를 했던 초기 위안부 피해 문제제기나 강제징용피해, 태평양전쟁 피해자 유골반환 문제, 피폭자 문제 등은 시간이 지나면서 논의의 탁자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또한 교섭주체가 과거 식민지 관료출신들이 다수였다는 점에서 총독부 통치에 대한 이해와 정보가 구체적이었던 반면에, 민중의 관점을 가지기 어려웠다는 점에서 민중적 피해문제 제기는 한계를 지녔다.

 

강제연행과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그렇다고 그 피해의 목소리, 증언, 고발조차 사라진 것은 아니다. 1965년에 나온 재일 사학자 박경식의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이나 1975년에 발간되었던 강덕상의 『관동대지진』은 조선인들의 피해, 학살과 관련해 여전히 중요한 문건이며 이 두 책은 ‘국민적 필독서’가 되어야 마땅하다.

 

박경식은 강제연행의 실태와 관련해 이렇게 통계를 제시한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에 징용된 사람이 100만, 조선 내에서 동원된 사람이 450만, 군인/군속 37만, 합계 약 600만명이 전쟁에 끌려나갔다.”

 

그는 “일본 식민지 지배의 잔학성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면서 행선지도 모르는 채 길에서 납치되어 끌려간 이들의 증언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꼼꼼히 담아냈다. 동남아시아 열도에도 끌려간 이들이 부지기수다. 어떤 증언들인가?

 

“나와 같은 배를 타고 남방에 연행된 조선여성만 해도 2천 수백명에 달했다. 이 여성들은 군수공장이나 피복창에서 일한다는 말에 속아 끌려온 17~20세 전후의 젊디젊은 처녀들이었다. 그러나 실제는 이렇게 수송선에 실려 남방 각지 전선으로 보내어져 군대의 위안부로 농락당했다. 나는 오키나와, 시모노세키, 하타다역의 대합실에서 남방으로 끌려가는 동포 여성들을 무수히 목격하고,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

 

툭하면 수없이 구타당하고 갇히고 죽임을 당했던 조선인들이 겪은 비참한 삶에 대해 탄광노조에 있던 한 일본인의 회상은 어땠을까?

 

“탄광에서 부상을 당해 병원으로 가면 의사는 내과 담당 하나였고 나머지는 전문의가 아닌 대진(代診)이었다. 발을 자르거나 상처를 꿰매는 일은 전부 대진이 했기 때문에 유베쓰 탄광에는 목발을 짚은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 치료가 성가시다 싶으면 전부 잘라냈기 때문이다. 그때 손이나 발이 절단된 조선인들은 지금 일본을 어떤 마음으로 보고 있을까.”

 

강덕상의 『관동대지진(“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으로 국내번역)』은 그 내용을 차마 읽기도, 옮기기도 참혹하다. 그래도 견디면서 반드시 읽어야 한다. 증언만이 아니라 사진까지 남아 학살의 증거는 명백했다.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일본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조선인들의 폭동 유언비어를 퍼뜨려 자경단이 조직되면서 3일 밤낮으로 끔찍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일본인들의 증언이다.

 

“장작불 위로 4, 5명의 남자들이 조선인의 손과 발을 큰 대(大)자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잡고서 태웠습니다. 불에 구워버린 것이지요. 그렇게 살해된 조선인이 차례차례 개울에 던져졌습니다.” 이 장면을 목격한 아이가 그린 그림이 아직도 남아 있다.

 

“잡힌 조선인 24명을 두 무리로 나눠 철사줄로 묶은 후 갈고리로 쳐죽여 바다에 던져 넣어버렸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자가 있어서 다시 갈고리로 머리를 찍었는데, 너무 깊이 찍은 나머지 몇 개는 좀처럼 빠지지 않았다.”

 

기병연대가 조선인들을 잡아 총살했으며 학살의 현장은 지옥이었다. 이외에도 증언은 무수하다. 역시 일본인들의 증언이다.

 

“가슴을 찔려 흐릿하게 하늘을 쳐다보다가 숨이 끊어진 자, 거의 끊어질 정도로 팔이 잘린 채 진흙밭에 머리를 처박고 버둥거리던 자, 넓적다리가 석류 벌어지듯이 갈라져 터질 듯한 상처가 입을 벌리고 있던 자들....” 여성들의 가랑이를 찢어죽인 사례들 또한 있었으니 그건 악마들의 집단광기였다.

 

1919년 3·1 독립혁명의 과정에서 일본 관헌이 살해한 숫자가 8000명에 달하고, 관동 대지진에서 학살당한 조선인들이 6000명에 이른다. 의병투쟁을 진압했던 경험으로 헌병경찰제도로 무단정치를 했던 일본 총독부는 3·1 독립항쟁의 과정에 조선인들의 저항에 놀랐고 이 두려움은 1923년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로 나타났으며 이후 그 학살을 저지른 일본의 사회심리적 기반은 군부 파시즘으로 이어져 동아시아 침략전쟁의 무기고가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일차적이자 치명적 타격을 입게 된 것은 바로 우리였다.

 

그러나 강제연행과 관동대지진의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은 여전히 국가적 차원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1953년 제3차 한일회담 당시 일본 측 수석대표인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 貫一郎)가 "일본 덕분에 한국이 발전했고 일본이 아니었다면 러시아와 중국에 점령당해 더 비참했을 것"이라는 망발은 결국 취소되었으나 아직도 일본 지배세력의 역사관이다. 한일관계의 미래는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과 피해, 그리고 이러한 잔혹행위에 대한 진상규명의 역사적 사실 정리가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사과도 내용을 갖출 수 없으며 묵살당한 원한은 계속 두 나라의 미래를 뒤덮게 될 것이다. 1965년의 한일협정이 모든 것을 해결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건 틀도 잘못되었고 내용도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우리는 샌프란시스코 조약 서명국이 아니기에 그에 묶일 이유도 없으며, 식민지 불법 지배 문제를 다룬 협정이 없다는 점에서 이를 중심으로 한일협정은 추가로 이어져야 한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논거다.

 

내년인 2023년은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년이다. 그 참혹했던 역사에 침묵한 채 한일관계의 미래가 열릴 수 있을까? 우리의 책임부터 중요하다. 진상규명은 한일관계의 초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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