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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 칼럼] 미리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

 

요즘 쓰는 글에 오자와 탈자, 비문이 많아져 걱정이다. 이게 다 의존증 때문인데 한창 글을 쓸 때 편집국 혹은 편집부에 교열부가 존재했었고 내가 잘못 쓰면 한번 걸러주겠지 하는 생각에 길들여져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인터넷 시대인 요즘엔 교열부가 존재하지 않는다. 상당수 언론사에서도 교열부나 교정부를 없앴을 가능성이 높다. 교열기자에 대한 기억과 로망은 이병주의 소설 『행복어사전』에 나오는 주인공 서재필 정도에 머물 것이다. 이런 얘기도 젊은 기자나 글 쓰는 사람들에게 공룡시대 취급을 받을 것이다. 되려 이병주가 누구냐, 혹시 삼성 창업주 이병철 이름을 잘못 쓴 거 아니냐고 물을 것이다. 어쨌든 이 칼럼에도 늘 상당수 오자가 있는데 조사의 ‘은는이가’가 잘못 붙어 있는 경우는 다반사요, 고유명사나 이름을 틀리는 경우까지 있다. 띄어쓰기의 잘못은 물론이다. 온라인 판에서는 스스로 발견하거나 독자의 지적을 받거나 해서 바로 수정을 하지만 지면 판에서는 이미 윤전기에서 돌아간 후라 고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런 날은 마치 밥을 먹은 후 뭐가 얹힌 듯 하루 종일 찝찝하게 지낸다. 창피하고 민망해서 견딜 수가 없다.


숱한 오자에도 불구하고 ‘2틀’이나 ‘4흘’ 같은 오자를 내지는 않는다. ‘사귄다’의 명령어를 ‘사기라’로 쓰지도 않는다. 더더군다나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의 말을 부적절하게 사용하거나 잘못 이해하는 적도 없다. 심심의 한자를 ‘深甚’이라고 쓰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읽을 줄은 안다. 5060 세대는 마지막 한자 세대여서 고등학교 시절 입시 필수가 아니어서 그랬지 매주 1교시의 한문 수업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한문 수업은 대개 국어 선생님이 가르치셨다. 한자어를 알면 사람이 유식해진다. 인식이 폭넓어진다. 한자는 마치 와인이나 영화 같아서 어디 가서 얘기를 할 때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언급을 하면 사람을 살짝 교양 있게 보이게 한다. 한자를 공부하는 것은 결코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적 행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나는 보통 새벽 4시~아침 8시 사이에 글을 쓰는데 그때의 내 뇌 상태가 가장 명징하기 때문이다. 명징은 ‘明澄’인데 ‘깨끗하고 맑다’란 뜻이다. 해가 떠오르는 순간의 밝기 같은 것인데 그 순간의 빛이 가장 깨끗하고 맑다란 의미이다. 이런 단어는 보통 사람들 간 대화에서는 흔히 쓰지 않는다. 글을 쓸 때 종종 쓰는 단어이다. 일상의 대화와 글의 단어는 때론 약간의 간격이 벌어진다. 말하기와 글쓰기를 구어체와 문어체로 나누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사람이 구어를 무시하면 안 되지만 문어를 모르고 살면 안 된다. 그건 마치 구상과 비구상 혹은 구체와 추상과 같은 것이다. 구체는 추상을 규정하고 추상은 구체를 규정한다. 구체를 모르면 개념을 정립할 수 없고 개념을 잊으면 모든 사안의 구체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생과 세상사, 모두 변증법이다.

 

대학에서 잠깐 교편을 잡았을 때 1, 2학년 저학년 학생들이 매카시즘이란 말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아니 세계사를 안 배웠어,라고 물었을 때 당연한 어투로 안 배웠는데요, 라는 대답을 듣고는 더 충격을 받았었다. 당시에 국사는 입시필수지만 세계사는 입시선택이라 배우더라도 공부는 따로 안 한다는 것이었다. 요즘의 역사 수업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지 못한다.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코로나19 시대에 한 대학의 대학원에서 역사를 가르칠 때 학생들이 니카라과를 처음 들어 본 나라라고 해서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매카시즘, 조셉 매카시를 모른다는 건, 극우의 문제점을 모른다는 것이다. 1950년대 조셉 매카시가 반미활동조사위원회를 만들어 많은 선량한 사람들, 지식인들, 예술가들을 공산당, 빨갱이로 몰아 감옥을 보내고 죽임을 당하게 만들었는지를 모르면 극우 파시즘의 광기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 가를 알 수가 없게 된다. 이런 친구들이 대개 ‘일베’가 된다. 니카라과도 마찬가지이다. 니카라과를 모르는 데 어떻게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의 투쟁을 가르치고, 그 투쟁이 소모사 정권의 46년 독재 끝에 나온 것이라는 점을 어떻게 가르치겠으며, 그걸 모르는데 레이건 전 대통령 때의 최대 정치부패 스캔들인 ‘이란-콘트라’ 사건을 어떻게 가르치겠는가. 이 모든 얘기가 다 영화로 나와 있는데 이걸 모르면 대체 영화를 어떻게 보겠는가. 그저 재미있느냐 없느냐로 영화를 가름할 뿐일 것이다.


가장 우스우면서도 동시에 우려스러운 것은 이 모든 사고의 부진이 기자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이런 말은 그래서, 매우 적절해 보인다. ‘요즘 직장인 중에서 가장 지적능력이 떨어짐에도 자기들이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한다고 착각하는 집단이 기자들인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나라가 왜 이 모양, 이 꼴이 됐는지 그 일단을 짐작하게 한다. 진실로 자성할 일이다.

 

오늘만큼은 오자와 탈자, 비문이 없어야 할 텐데 만약 또 한 글자라도 발견된다면 미리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 아오리 사과를 드린다는 얘기가 아니라는 것은, 파란 사과가 꼭지를 따서 매장에 진열돼 있음에도 반말로 ‘이게 나중에 빨개지는 거지?’라고 하는 대통령 때문에 다 알게 됐다. 무식을 무식으로서 증명하는 세상은 웃긴 게 아니라 무서운 것이다. 자, 어쩔 것인 가. 어떻게 할 것인 가. 걱정이 구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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