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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 가볼 만한 곳…고양시 ‘행주산성’ 추천

가까운 수도권, 볼거리 먹거리 풍성

 

최근 높고 청명한 하늘 등 완연한 가을 날씨를 체감하면서 우리나라 최대 명절인 ‘한가위’을 맞아 황금연휴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 고민이 되기도 한다.

 

고향을 방문하는 등 즐거운 연휴 계획이 있겠지만 서울에 인접하여 비교적 적은 시간에 가족, 친구, 연인들이 여행할 수 있는 ‘행주산성’관광을 권해본다.

 

행주산성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덕양산 7,8부 능선에 흙을 이용하여 쌓은 ‘토축’산성이며 임진왜란 3대 대첩지 중 한 곳으로 국가사적 제 56호로 지정되어 있다.

 

행주산성에서는 충장사, 행주대첩비, 대첩 기념관 등 다수의 문화재가 있고, 산성 정상에서는 자유로, 방화대교, 한강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으며, 특히 야경이 아름다워 관광 명소로도 각광 받고 있다.

 

또한 인근에는 백숙, 민물매운탕, 잔치국수 등 소박한 토속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음식문화 마을’이 있어 가족, 친지들과 풍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로 제격이다.

 

행주산성 관리청인 고양시는 추석 연휴를 맞아 9월 9일부터 9월 12일까지 휴무일 없이 행주산성을 특별 개방하여 시민들을 비롯해 이곳을 찾는 모든 관광객들이 즐길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관람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입장은 관람 종료 1시간 전에 마감되고 입장료는 무료이다. 추석 당일인 9월 10일은 특별 야간관람(오후 10시까지)도 가능하다.

 

 

◇ 조선시대 탁월한 전략지 행주산성

 

행주산성은 124.9m의 낮은 덕양산이 평야지대로 이어져 사방이 노출되어 있다. 그럼에도 주요한 요새역할을 한 것은 행주산성의 특별한 지형 때문이었다.

 

서남쪽은 한강이 흐르고 동북쪽은 창릉천과 습지대로 서남과 동남이 천연의 해자 역할을 하였으며 동면과 남면은 경사가 급한 험준한 지역이었다. 이로 인해 적의 공격지역은 매우 한정된 부분이었다.

 

또한 주위로부터 격리되어 있었지만 강으로 후방 지원이 가능했으며 한양에서 좀 떨어진 거리는 왜군을 유인하기에도 적합했던 것이다.

 

실록에는 영의정 유성룡을 비롯하여 행주대첩의 승리의 요인 중 지형의 탁월함을 언급하는 내용이 여러 번 있다. 행주산성은 지형이 험하여 큰 나무는 없었으나 접근하기 어려운 지형이었던 것이다.

 

또한 행주대첩 당시 흙을 쌓아 성을 보축하고 성 안으로 돌을 날라 쌓았으며 목책을 설치한 것으로 보아 성은 방어를 담당할 정도로 견고한 형태가 아니었고, 토성도 허물어져 완전한 성곽 형태를 잃고 있었다. 행주대첩 이전 행주산성은 전적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행주산성은 1593년(선조 26) 권율(權慄) 장군이 대승을 이룬 전적지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을 이룬 곳이다. 현재 성안에는 복원된 415m의 토성의 성곽과 1603년에 세운 행주대첩비가 있으며, 1970년에 대대적인 정화작업으로 권율장군의 사당인 충장사(忠壯祠) 등을 건립하여 현재의 모습을 구축하였다.

 

 

◇ 행주대첩

 

행주대첩은 임진왜란 당시 권율(權慄) 장군이 고양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전투다. 이 역사적 사건은 한산도대첩,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린다. 1592년 4월 14일 일본의 조선침략은 우리나라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로 인하여 조선의 오백 년 역사는 임진왜란 전기와 임진왜란 후기로 양분되는 역사적 분기점을 맞게 된다.

 

7년여에 걸친 전란은 정치, 경제, 문화에 걸쳐 조선 사회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왔으며 조선왕조의 기반을 와해시키고 존폐 위기의 경지로 몰아넣었다.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침공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은 1585년경부터였고 조선의 조정은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지 못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본격화 되었고 일본군은 해상에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부산에 상륙하였고, 경상도 지역의 육지 전투도 연패를 거듭하였다

 

일본의 침략이 시작된 이후 선조 임금은 전쟁발발 20여일 만에 경복궁을 버리고 평양으로,의주로 몽진의 길에 나서야만 했다.

 

수도 한성은 일본군에 점령되는 등 그야말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다

 

그러나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일본의 전세도 타격을 받게 되는데, 이는 몇몇 조선의 명장과 전국에서 분연히 일어난 의병과 승군들로 조직된 비장의 부대를 예기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선조의 명을 받은 권율 장군은 광주목사로 내려가 15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항전하면서 북진하였다. 행주산성에 주둔한 조선군은 해발 124.9m의 덕양산에 이중으로 목책성을 설치하고 토성을 보완한 후 활과 화살을 점검하고 화차와 화약을 정비하였다.

 

또한 수차석포와 투석전에 사용될 돌들을 산적하고, 진지 후방에는 여러 개의 가마솥을 준비하여 방화용수를 채우고, 적의 화공작전에 대비해서 젖은 수건과 재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한 자루씩 허리에 차도록 하였다.

 

1593년 2월 12일 새벽 6시경 일본군 선봉 100여 기병이 나타나고 뒤이어 거대한 대군이 성을 둘러쌌다. 이어 마침내 7차례에 걸친 치열한 왜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총병력은 무려 3만여 명이었다. 권율 장군은 전투를 앞두고 모든 군사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훈시했다. “이제 자세히 적세를 살펴본다면 그 양과 질에서 우리가 맨손으로 당해 낼 도리가 없으니 무엇으로써 제압해 이길 것인가. 오직 한 가지 죽음으로써 나라의 두터운 은혜에 보답하는 길밖에는 없도다. 남아(南兒)는 의(意)와 기(氣)만 생각할 뿐이지, 어찌 공훈과 명예를 다시 논하랴! 천 사람이 한 마음으로 서로 죽기를 맹세하자.” 라고 말하며 이번 전투가 자신의 생사뿐 아니라 나라의 운명이 달려있음을 결사 의지로 다짐케 했다.

 

 

◇ ‘행주대첩’과 ‘행주치마’ 이야기

 

 

행주대첩 때 일이다. 행주산성에 진을 친 권율 장군 부대는 3만 명이나 되는 왜군과 싸워야만 했다. 조선군은 2300명으로 관군과 의병, 승군, 아녀자들까지 모두 합한 숫자였다.

 

그것도 정식 군인이 얼마 없었고 대부분 군사훈련도 하지 않고 무기도 없는 오합지졸들이었다. 전세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불리한 실정이었다.

 

조선군은 필사적으로 대항하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성안의 무기가 다 떨어지고 목책도 무너지고 있었다. 이때 아녀자들이 입고 있던 겉치마를 찢어 다시 걸쳤다.

 

군사들의 밥을 하고 전쟁에 필요한 물을 끓이고 재 주머니를 만드는 일을 하던 아녀자들이었다. 싸움이 치열해지자 성안에 모아두었던 돌을 치마에 싸서 날랐다.

 

수차석포에 돌을 장전하는 일을 돕기도 하고 성으로 올라오는 왜군을 향하여 돌을 굴려 떨어뜨렸다. 아녀자들은 순식간에 척석군(擲石軍)이 되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든 아녀자들이 합심한 것이다.

 

얼마 후 다행히 2척의 배가 무기를 싣고 한강을 건너와 합류하여 다시 기세는 반전되었다. 혼신을 다한 결사 항전으로 왜군은 대패하고 물러났다.

 

행주대첩에서 아낙네들의 돌 나르기 항전은 유명해졌다. 

 

이후로 아녀자들이 부엌에서 입는 앞치마를 가리켜 행주산성에서 행주대첩 때 입었다는 의미로 그 이름을 ‘행주치마’라 하였다고 설화로 전해진다.

 

[ 경기신문 = 박광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