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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 칼럼] 그거 알아? 사람들이 복수극을 원해


넷플릭스의 오스트리아 6부작 드라마 ‘우먼 오브 더 데드’의 주인공 블룸(안나 마리아 뮈에)은 직업이 장의사이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하도 시체를 많이 봐서인지 살면서 그리 무서운 것이 없다. 성격도 냉랭한 편이다. 말하는 것도 남을 배려하거나 하지 않는다. 도무지 살가운 성격이 아니지만 오직 한 사람, 곧 남편 마르크(막시밀리안크라수스)에게만은 예외였다. 하지만 마르크는 아침 출근길에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만다. 그 광경을 블룸은 두 눈 뜨고 지켜보게 된다. 블룸은 차차 남편의 사고가 의도적이었으며 누군가, 어떤 집단이 남편을 살해했음을 알게 된다. 블룸의 가혹한 복수극이 시작된다.

 

원래 이런 류의 자경단(自警團) 영화는 (그 이름도 추억에 젖게 만드는) 찰스 브론슨의‘데스 위시’ 시리즈가 원조였다. 아내를 살해하고 딸을 강간해 죽인 범인들을 찾아 일일이 응징하고 죽이는 중년 남자 폴 커시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영화는 형편없었으며 찰스 브론슨의 대표작 ‘빗속의 방문객’, ‘원쓰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 ‘황야의 7인’ 등에 비해 그의 명성을 몇 단계 떨어뜨리는 작품이었지만 오히려 대중적 인기는 치솟았다. 찰스 브론슨은 이 영화로 일약 세계적 인지도의 대 스타가 됐다. 사람들은 그의 복수에 열광했다. (특히 남자는 뉴욕의 전형적인 화이트 칼라였다는 것이 환호의 이유가 됐다.)이 영화의 인기는 1편이 1974년에 만들어진 후 5편이 만들어지는 1994년까지 20년간 계속됐다. 찰스 브론슨은 그 10년 후인 2003년에 죽었다. ‘데스 위시’ 시리즈의 명성은 2018년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영화로 리메이크되기도 했을 정도다. 

 

공권력의 행사, 엄정한 법 집행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분연히 일어서는 사람들의 얘기가 대중들에게 인기를 모은다는 것은 거꾸로 그 사회의 내부가 심히 불안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적인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데다 사람들에게 엄청난 불신을 사고 있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시즌 드라마 ‘우먼 오브 더 데드’의 주인공 블룸도 경찰을 향해 같은 얘기를 반복해서 한다. 당신들 수사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거냐며 소리 지르고 힐난하기 일쑤다. 실제로 경찰은 별반 미동도 하지 않는다. 게다가 남편은 경찰이었다. 블룸짐작으로 남편은 어떤 조직적인 범죄의 뒤를 쫓다가 살해당한 것으로 보인다.

 

‘우먼 인 더 데드’에서 보이는 블룸의 복수극은 기이한 특징을 지닌다.‘찰스 브론스 시절’에는 상대가 아무리 흉악범이라 하더라도 여러 가지 계산과 고려가 앞세워졌다. 주인공이 상대를 죽이기까지, 그 개연성, 그러니까 주인공이 벌이는 또 다른 살인의 이유와 명분을 앞자락에 이렇게 저렇게 많이 깔아 놓는다. 그런데 ‘우먼 인 더 데드’는 그렇지가 않다. 그게 이 드라마의 유별난 특징이라면 특징인데 블룸의 복수극은 실로 가차 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녀에겐 일말의 고려가 없다. 고민 따위는 없다. 그래서 이 드라마를 보는 이로 하여금 지금 응징을 당하는 인간들이 정말 나쁜 놈일까, 그런 놈들의 수장 급에 해당할까 하는 의심을 갖게 만들 정도다. 특히 동네 신부에게 휘발유를 들이붓고 그를 불태워 죽이는 장면은 여주인공 블룸이 나가도 조금 너무 나가는 가 아닌 가 싶을 정도다. 

 

그런데 찰스 브론슨의 영화가 197,8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이 드라마 역시 요즘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모양이다. 유럽에서나 한국에서나, 세계 그 어디에서나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고 있다는 얘기다. 거기나 여기나 사람들은 각자도생의 삶에 내몰리고 있다. 끝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과 원칙, 공정한 사회란 구호만 앞세우는 건 실로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양극화된 사회에서 그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얘기이며 법과 원칙은 일부 소수의 권력자들 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공권력이 제대로 작동할 리가 없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국정조사가 열리고 있다. 그러나 조사는 무슨 얼어 죽을 조사. 사람들이 듣는 것은 그저 몰랐다 아니면 (내 책임이) 아니다는 말 뿐이다. 이러니 유가족들이 피를 토할 수밖에. 게다가 유가족들의 뒤에서는, 심지어 정면에 대고 ‘자식의 시체팔이를 해서 보상금을 벌려고 한다’며 미치광이 집단이 야유까지 보내고 있는 마당이다. 유가족들의 마음속에서는 응징과 복수의 마음이 싹틀 것이다. 얼마나 그들을 죽이고 싶겠는가. 예전의 폴 커시나 지금의 블룸처럼 그들에게 휘발유를 들이붓고 불을 댕기고 싶을 것이다. 어쩌면 그럴 유혈극을 (바라는 대중들의 마음을) 영화나 드라마가 달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복수극의 아이러니이지 역설이다. 좀 적당히들 하자. 행안부 장관도 이제 적당히 물러나고 대통령도 이제 적당히 진심 어린 사과를 하자. 아이들 죽은 걸 두고 자존심 싸움을 내세울 때인가. 일국의 지도자가 그러면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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