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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 칼럼] 영화도 답답하고 시대도 답답하다

 

이해영 감독의 야심작 ‘유령’이 비교적 개봉 초기부터 꺾어진 데는 사람들이 가능한 이 영화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아 했기 때문이다. 칭찬이든 욕이든 영화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야 한다. 노이즈 마케팅도 처음엔 도움이 된다. 영화가 안된 것을 보니 그 어느 쪽도 아니었던 셈이다. 

사람들을 흥분시키기에는 영화가 비교적 졸작이었다…는 표현은 적절하지가 않고 그보다는 뭐랄까, 지나치게 젠 체를 한다고 할까 뭐 그런 느낌을 줬다. 이 영화는 독립운동 얘기다. 그중에서도 테러리스트들의 얘기다.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의 얘기다. 이런 영화는 사람들이 쉽게 미워하지 못한다. 근데 뭐랄까 영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약간 혀를 차게 하는 느낌이다. 영화 속 테러를 이끌어 가는 인물들이 너무 멋이 들렸다고 해야 하나, 역사적 사명감의 스노비즘 같은 것, 그 이상한 속물성 때문이다.(이준익 감독이 제작했던 2000년도 영화 ‘아나키스트’도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실패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을 갱스터 영화처럼 꾸민 것은 영화가 나가도 너무 나갔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해영 감독은 1930년대를 유희의 공간처럼 여겨지게 끔 찍었는데 그게 결국 패착이었다고 보인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박차경(이하늬)이 묘령의 여인 난영(이솜)과 담배 불을 나누는 곳이 마를렌디트리히 주연의 영화 ‘상하이 특급’ 간판이 그려진 극장 앞이다. ‘상하이 특급’은 1932년작이다. 근데 영화 속에서는 조선총독부의 신임 총독이 문화통치를 천명하느라 유령의 테러 조직인 흑색단을 공공연하게 수색하거나 탐문하지 않으려 한다. 여기서부터 일단 시대의 코드가 맞지 않는다. 1932년이라면 만주사변 직전의 해이고 1937년 중일전쟁으로 가는 길목이다. 다시 무단통치로 가는 때이다. 여러 가지 실제 사회 상을 영화적으로 일그러뜨려 놨다는 얘기다. 이런 부분에서부터 영화가 턱 막힌다.

 

오히려 영화의 최대 장점은 일본 순사인 무라야마 준지(설경구)란 인물이 가져온다. 그는 조센징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반만 일본인인 경무국 간부다. 그는 일본인 장군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를 직접 살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런 출신 성분 때문에 좌천된 상황이며 그렇기 때문에 호시탐탐 복귀를 노리는 중이다. 경호대장 카이토(박해수)는 그런 그의 경쟁자이다. 무라야마는 경성에 들어온 유령을 체포해 공적을 올려야 한다. 

 

하지만 유령을 잡으려는 자가 오히려 더 거물인 유령일 수도 있다. 그건 마치 프랑스 비시 정부에서 독일군 앞잡이 노릇을 했던 프랑스 장군이 사실은 레지스탕스가 심어 놓은 스파이였다는 것과 같은 식이다. 무라야먀도 겉으로는 독립운동가들을 잡아서 고문하는 쪽이지만 사실은 더 큰 거사(총독 암살)를 위한 위장일 수 있다. 이해영 감독의 ‘유령’이 만약 그 같은 플롯이라면 꽤나 흥미로운 반전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설경구의 정체는 비교적 일찍 드러나지만 설경구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비교적 마지막까지 그에게 희망을 걸게 된다.

 

진짜인지, (이중 스파이어서) 그러는 척하는 것인지, 무라야마는 영화 속에서 줄곧 이런 얘기를 한다. “아직도 조선이 독립할 수 있다고 하는 헛된 희망을 가진 자가 있다. 틀렸다. 조선은 결코 독립하지 못한다. 영원히 일본 천황과 함께 내선일체의 길로 가게 될 것이다.” 인정하든 인정하지 못하든 1930년대의 지식인들 가운데는 이런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일본이 러시아도 이기고 이제 만주도 차지하고 곧 중국도 이길 판이다. 누가 감히 일본을 꺾을 수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암살자 유령이 소속된 흑색단이? 어림도 없는 얘기이다. 

 

최동훈 감독의 영화 ‘암살’의 명장면도 의외로 배신자의 고백에서 나온다. 최대의 밀정이었던 염석진(이정재)은 저격수 안옥윤(전지연)과 명우(허지원)에게 처단당하기 직전 이렇게 말하며 애걸한다. “내가 조선이 정말 독립이 될 줄 알았겠는가. 그때 그걸 알 수가 있었겠는가”라고.

 

‘암살’과 ‘유령’이 보여주는 흥행의 갈림길은 그런 역사적 패배주의에 맞서는 사명감의 진정성이다. ‘암살’의 안옥윤이 겪게 되는 비련(하와이 피스톨, 하정우가 그녀를 두고 죽는 것)과 그녀의 동지 속사포(조진웅)와 황덕삼(최덕문)의 희생은 멋있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멋있는 것이었다. 영화 ‘유령’에서 암약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서는 바로 그런 분위기가 떨어진다. 인물들이 보여주는 진정성의 근거가 다소 불분명하다. 관객들이 불편해하는 것은 그 지점이다. 독립운동의 행동동기들은 다소 인공적이고 억지스러운 것으로 보이는데 반해 반(反) 독립의 설법은 오히려 내추럴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이래서는 궁극적으로 악이 이기는 세상이 된다.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영화 ‘유령’은 역설적으로 지금의 시대를 그대로 묘사하려 했지만 서사를 촘촘하게 엮어 내는 능력이 부족해 실패의 길을 걷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 ‘유령’에서 유령을 잡으려고 설치는 자처럼, 그리고 영화 ‘암살’에서 밀정인 염석진처럼, 지금도 주변이 온통 부역자 천지이다. 변절한 지식인들 천지이다. 지식인의 본산인 언론이 그렇고 대학이 그렇다. 변절자들이 점점 승승장구하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이래선 이기지 못한다. 변절한 지식인들의 수를 줄이거나 없애지 않는 한 시대는 바뀌지 못한다. 영화 ‘유령’의 마지막 장면처럼 잔뜩 멋만 부려서 될 일은 안될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1930년대 일본 식민지 시대를 빼닮았다. 영화 ‘유령’이 낱낱이 보여 준 대목이지만 한편으로는 (영화로나마) 속시원하게 시대적 해답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영화 흥행이) 실패한 이유이다. 이래저래 답답한 시절이다. 영화도 답답하고 시대도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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