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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숙의 프랑스 역사기행] 빈민들의 영구차 타고 저승길 떠난 빅토르 위고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빅토르 위고(Victor Hugo)를 두고 한 말처럼 들린다. 소설 ‘레미제라블(불쌍한 사람들)’은 오늘도 여전히 베스트셀러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가 우리 곁을 떠난 지는 138년이 된다. 위고가 숨을 거둔 건 1885년 5월 22일. 공화당의 아이콘이자 정의의 사도였던 그는 1802년 2월 26일 브장송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정치인, 작가, 만화가로 활약하면서 평생 자유를 열렬히 수호했다. 자신의 천재성을 빈곤타파, 표현의 자유, 여성과 아동의 인권, 노예제와 사형제 폐지, 그리고 무상교육 실현을 위해 불살랐다.

 

이러한 투사의 죽음은 프랑스를 깊은 슬픔에 빠트렸다. 의회는 휴회를 하고 위고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했다. 개선문 꼭대기에는 커다란 검은 베일이 걸렸다. 그의 시신은 개선문 아래 전시 돼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말을 탄 기병들은 VH 이니셜이 새겨진 영구대를 밤새도록 지켰다.

 

 

파리의 언론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열일곱 개의 신문이 5월 23일 한 판을 검은 액자로 장식했다. 위고가 직접 창간한 ‘르 앙코르’ 신문의 기자들은 장례식 날까지 상복을 입었다. 일간지 ‘질 블라스(Gil Blas)’는 위고의 죽음을 애도하는 거리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노동자들은 경건한 자세를 취했고, 노인들은 숨죽여 울었다. 귀부인들은 여염집 아낙네들과 나란히 서서 슬퍼했다. 많은 공화당 깃발, 청백색-빨간색 깃발이 파리의 모든 창문에 걸렸다.”

 

그의 관이 묘지로 향하던 6월 1일 오전 11시, 스물 한발의 예포가 발사됐다. 위고를 실은 빈민들의 영구차에는 손자들이 바친 하얀 장미 화관 2개만이 장식됐다. 파리 생제르맹 대로에서 거대한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12시 40분부터 시작된 이 퍼레이드는 오후 6시 20분이 돼서야 끝났다. 그의 마지막을 배웅하러 나온 인파는 2백만 명이 넘었다. 이들은 두 마리의 말이 이끄는 영구차를 따라 파리 서쪽 에투알 광장에서 중심부 팡테옹까지 천천히 걸었다.

 

유복한 가문의 아들이었지만 위고는 유독 가난한 사람을 좋아했다. ‘레미제라블’은 그에게 필연의 작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평생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서 싸웠다. 이 투쟁은 죽는 순간까지 계속됐다. 눈을 감으면서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5만 프랑을 기부합니다. 나는 그들의 영구차를 타고 그들의 묘지에 묻히고 싶습니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는 이 유언을 어기고 그를 팡테옹(Panthéon)에 안장했다. 파리 5구 대학가에 자리 잡은 팡테옹은 프랑스 대혁명 당시 ‘위인’을 기리기 위해 신성화된 곳이다. 1816년 예배당으로 복원되었지만, 1830년 다시 ‘인류의 신전’이 됐다. 그러나 “나는 (나의 죽음 앞에) 모든 교회의 연설을 거부하고 모든 영혼을 위한 기도를 요청합니다”라는 유언장을 남긴 위고가 여기에 안장되면서 팡테옹은 신전이 아닌 위인들의 성전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죽어서도 역사를 바꾸는 위고의 위대함 앞에 잠시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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