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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문소] ‘서해의 슈바이처’를 기리며…인천 옹진군 ‘최분도 신부’ 공적비

1962년 인천 연평도 본당 주임신부 재직…인천 서해안과 인연 맺어
1966년 덕적도 본당 부임…10여 년 동안 주민 위해 의료 봉사
1971년 국민훈장 동백장, 1976년 인천 명예시민증 받아
1976년 5월 8일 덕적도 서포리 해송림에 공적비 건립

 

27. ‘서해의 슈바이처’를 기리며…인천 옹진군 ‘최분도 신부’ 공적비

 

200년 넘은 해송 숲을 품은 인천 옹진군 덕적도에는 힘든 시절 주민들을 위해 헌신하며 동고동락했던 푸른 눈의 최분도 신부의 공덕비가 자리하고 있다.

 

최분도(베네딕트 즈웨버, 1932~2001) 신부는 미국 미네소타의 작은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이역만리 한국에 온 것은 6·25전쟁 당시 한강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 사망한 형 때문이었다.

 

1959년 한국에서 선교 사업을 펼치기로 다짐한 최 신부는 같은 해 9월 부산으로 입국했다. 1962년 인천 연평도 본당 주임신부로 재직하며 인천 서해안과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1964년에는 미군 함정을 개조한 ‘바다의 작은 별’이라는 병원선을 이끌고 문갑도, 울도, 지도, 백아도, 조기잡이 어선 등을 돌며 8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무료로 진료했다.

 

인천에서 30년 넘게 한 선교 활동 중 섬에서만 14년을 거주한 그는 1966년 4월 13일 덕적도 본당으로 부임했다.

 

덕적도에 60개의 병상과 외과, 내과, 산부인과 등을 갖춘 첨단 시설의 ‘복자 유베드루’ 병원을 개원하고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의료 봉사를 시작했다.

 

당시 국내에도 드물었던 최신 의료기구와 약품 등을 미국에서 직접 들여온 최 신부는 1976년까지 1만 8000여 명에 가까운 환자를 치료했다. 

 

 

덕적도의 발전을 위해 최 신부는 미군의 도움을 받아 100kW 자가 발전기 두 대를 들여왔다.

 

서포1리 등 마을에 전기를 공급하고, 산 너머 마을 쑥개에도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200kg의 전봇대를 주민들과 함께 어깨에 메고 산 고개를 넘어 운반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상수도, 복개 하천 공사 등을 시작하고, 주민들의 소득증대를 위해 양파, 양계, 양돈 사업에도 힘썼다.

 

덕적도 지역의 발전을 위해 밤낮으로 섬긴 최 신부는 1976년 인천 송림동 본당으로 발령 나며 10여 년간 인연을 맺어 온 덕적도와 아쉬운 작별을 했다.

 

이후 인천에서도 여러 성당을 옮기 다니며 봉사를 이어간 그는 1990년 미국 본부 발령으로 결국 한국을 떠나게 됐다. 2001년 3월 미국 뉴욕의 한 요양원에서 선종(善終)했다. 한국을 사랑했던 최 신부의 장례미사에는 우리 민요인 ‘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30년의 긴 세월 동안 인천에서 많은 이를 보살폈던 그에게 정부는 1971년 외국인으로는 최고의 훈장인 국민훈장 동백장(2급)을 수여했다. 이후 1976년 9월 당시 김태호 인천시장으로부터 인천 명예시민증을 받았다. 

 

1976년 5월 8일 덕적도 서포리 해송림에 지역 주민들의 고마운 마음이 담긴 최분도 신부 공적비가 건립됐다. 지금도 그의 선행은 마을 주민들에게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 경기신문 / 인천 = 김주헌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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