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침한 표정의 소녀가 꽃밭에 서 있다. 동화 속에 나올 듯 한 모습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소녀를 보면 동심의 세계로 돌아간 듯하다. 형광 분홍색을 중심으로 하늘색, 파란색, 노란색, 초록색의 물감은 환상의 세계를 그리며 거친 질감은 대담하고 생생하다. 일본 치바현 태생 작가 아야코 록카쿠는 손으로 그림을 그렸다.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아야코 록카쿠, 꿈꾸는 손’은 핑거 페인팅(Finger painting)’의 작가 아야코 록카쿠의 작품 130여 점을 전시한다. 아야코 록카쿠는 스무살 때 말 이상의 표현 방법을 찾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미술 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 도쿄 공원 등지에서 골판지에 쪼그려 앉아 손으로 그림을 그렸다.
즉흥적인 매력의 핑거페인팅은 손에 물감을 묻혀 골판지나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다. 손으로 직접 그리는 만큼 ‘촉감’이 중요한데, 아야코 록카쿠는 손이 화면에 닿을 때 생기는 마찰과 열기에 영감을 얻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원시적이고 가장 기본적인 도구인 손으로 직접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예술의 기본적인 행위로 원초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아야 록카쿠가 만들었던 커다란 나무 집이 관객들을 맞이한다. 이 나무집은 아야코 록카쿠를 후원했던 델레이브 패밀리와 작업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아야코 록카쿠가 직접 색을 칠하고 들어가 사진을 찍기도 했다. 다른 한쪽 벽에선 그녀가 처음 그림을 그렸을 당시의 모습과 델리이브 패밀리와의 만남이 샌드아트 영상으로 소개된다.
델레이브는 아야코 록카쿠의 인생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2006년, 스물 한 살의 아야코 록카쿠가 그린 그림에서 거대한 잠재력을 발견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베테랑 디렉터 니코 델리이브는 그녀의 그림을 모두 사겠다고 말하며 그녀를 전폭 지지한다. 암스테르담 도심에 그녀의 아뜰리에를 마련해주고 십수년간 그녀를 후원한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이 내려다보이며 밝은 햇살이 내리쬐는 그녀의 아뜰리에는 좀 더 경쾌하고 생동감 있는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3m가 넘는 대형 추상화를 그리면서 그림에 변화를 주었고 사람들에게 행복과 상상력을 불어넣었다.
전시는 아야코 록카쿠와 델레이브의 운명적인 만남을 인트로로 다섯 개의 섹션으로 이어진다. 첫 번째 섹션은 ‘맨발의 소녀’로 아야코 록카쿠의 초기 작품들을 전시한다. 이 때 작가는 공원에서 햇빛을 쐬고 바람을 맞고 맨발로 잔디의 촉감을 느끼며 골판지에 그림을 그렸다. 손으로 물감을 비비고, 누르고, 문지르는 독창적인 방식으로 새초롬한 표정의 소녀들을 그렸다.
첫 번째 섹션에서 찢어진 골판지에 기모노를 입은 소녀, 자동차 위에 올라 앉아 있는 소녀들, 꽃과 함께 있는 소녀, 욕조에 있는 소녀 등 다양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특히 골판지에 그린 그림들은 생동감이 넘치며 소녀들의 표정, 그녀가 사용한 물감의 색채들은 행복감을 불러일으킨다.
두 번째 섹션 ‘꿈꾸는 손가락’에선 본격적으로 그녀가 캔버스에 그린 그림들을 전시한다. 그녀는 작품의 보존을 위해 골판지에서 캔버스로 화면을 바꿨으며 좀 더 적극적이고 큰 작품들을 그린다. 틀이 잡힌 소녀 그림들, 다양해진 배경화면, 몽환적인 색채들은 그녀의 작품 세계를 확립시켰다.
꽃밭을 걷고 있는 맨발의 소녀, 기모노를 입고 앉아 있는 소녀,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소녀, 점프를 하고 있는 소녀들은 귀엽고 사랑스럽다. 특히 배경에 나비, 집, 구름, 꽃, 풀, 물방울, 나무 등을 그려 정감가고 따뜻한 느낌을 전달한다.
세 번째 섹션 ‘넓은 세상으로’에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아뜰리에로 작업실을 옮긴 아야코 록카쿠가 그린 3~4.5m크기의 추상화를 전시한다. 당시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아야코 록카쿠는 암스테르담 풍경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갤러리 델리이브에 장식된 휘장처럼 주변 환경을 그렸다. 안정적인 작업 활동이 가능했던 시기, 그녀의 작업 세계는 화폭의 크기만큼 커졌다.
또 거대한 소녀 인형이 관객들을 맞는데, ‘고스트 래빗’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회전 오브제는 230cm 크기로 분홍색, 파란색 귀를 가진 두 마리의 토끼와 함께 전시장에 자리하고 있다. 커다란 눈, 삐죽 나온 입, 분홍색 옷을 입은 이 소녀는 발걸음 힘차게 내딛고 있는데, 아야코 록카루의 당찬 모습을 보여준다.
네 번째 섹션 ‘나의 친구들’에선 아야코 록카쿠가 영감을 받고 협업했던 작가들을 소개하고 그에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전시한다. 소녀가 아닌 추상적인 물감의 덧칠, 삐죽빼죽한 선들은 그래피티를 그리던 장 미셀 바스키아에 영향을 받아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를 표현했으며 이야기가 아닌 작가의 열정 그자체를 표현한다.
다섯 번째 섹션 ‘봄의 시작’에선 솜사탕처럼 봄을 부르는 그녀의 대표작들을 전시한다. 그녀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사람들이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데,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그림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달하는 그림으로 나아갔다. 그림에 대해 얘기하고 함께 감정을 나누며 의미를 찾고 온기를 전한다.
작은 손가락에서 시작한 그림들은 후원자 델레이브를 만나 꽃을 피웠고 더 넓은 세계로 확장돼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하고 있다. 아야코 록카코의 놀랍고도 아름다운 그림들은 그 자체로도 영감을 주기도 하지만 델레이브의 역할과 지지는 미술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었다. 이들의 이야기 ‘아야코 록카코, 꿈꾸는 손’은 3월 24일까지 계속된다.
[ 경기신문 = 고륜형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