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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넘어선 근·현대 인문학의 보고... ‘망우리역사문화공원’ (2)

망우리공원은 경기도 구리시와 서울시 중랑구를 경계로 하고 있다. 이곳에는 조선, 대한제국의 의병 활동, 일제강점기 독립투쟁, 해방 후 좌우대립, 6·25전쟁의 현장, 그리고 산업화 시기에 살다간 이들의 파란만장한 삶이 엑스레이 필름으로 남아있다.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역사적·철학적·예술적·교육적 가치를 지닌 근·현대 인문학적 보고이다. 3월 이곳에 흔적을 남긴 독립운동가들을 불러본다.

 

◇정미의병 망우리를 넘어 서울 탈환을 시도하다.

독립운동가는 국권을 빼앗기기 시작한 시기부터 광복절까지 독립운동에 참여한 선열과 지사를 말한다. 경술국치인 1910년 8월 29일 이전 투쟁한 분들을 의병(義兵)이라 부르고, 이후부터 독립운동가로 부른다. 민비(명성태황후)가 시해당한 을미사변(1895)을 계기로 등장한 을미의병, 을사늑약(1905)을 반대하며 일어난 을사의병,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를 당하고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에 울분을 토하며 봉기한 정미의병을 구한말 3대 의병이라 부른다.

 

정미년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한해였다. 군대강제해산, 국권의 대부분을 일본에 넘긴 정미7조약 체결, 고종이 강제로 퇴위를 당하자 의병이 전국에서 들불처럼 봉기한다. 이때 고종의 칙서를 받은 이인영이 총대장, 허위가 군사장이 되어 ‘원수부13도창의대진(13도창의군)’을 창설했다. 원수부는 황태자였던 순종의 예하 부대를 말한다.

 

13도창의군은 전국의 의병과 의병장, 대한제국 해산 군인이 결합 된 국민군으로 전국에서 항일전쟁을 펼쳤다. 그리고 남산에 있는 조선통감부를 치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서울진공작전을 계획하고 1만명 창의군을 양주군 수택리 한강 변에 12월 말까지 모이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서울로 향하던 창의군은 이를 미리 알아챈 일본군과 교전하다 보니 진격에 발목이 잡히고 제 때에 모이지 못했다.

 

게다가 총대장 이인영은 부친상으로 낙향하자 허위 군사장과 구리시 사노동 출신 김규식 사령장은 300명 돌격대를 이끌고 서울진격을 단행했다. 일본군의 신식무기에 밀려 아쉽게도 작전은 실패했다. 13도창의군은 만주로, 미주로, 국내로 흩어져 국권회복과 독립운동의 전초기지를 만드는 계기가 됐다. 13도창의군의 이 작전은 항일투쟁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서울 대공습 전쟁으로 기록된다.

 

중랑구 망우리공원 운동장 정면에는 13도창의군기념탑이, 구리시 장자호수공원 생태관 앞에는 13도창의군집결지 기념비가 있다. 허위 부대가 진격한 길은 허위의 호를 사용한 왕산로가 됐다.

 

 

◇3·1운동 민족지도자 3인이 누워있다.

올해는 3·1운동 105주년을 맞이했다. 망우리공원에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이종일(천도교)·나용환(천도교)·오세창(천도교)·홍병기(천도교)·한용운(불교)·박동완(기독교)·박희도(기독교) 등 7인이 이곳을 머물렀다.

 

이종일·나용환·홍병기·박동완은 1966년 현충원으로 이장을 했고, 오세창·한용운·박희도 3인의 무덤이 삼각형을 그리며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

 

오세창과 한용운은 절개를 지켜 건국훈장 대통령장과 대한민국장을 추서를 받았으나 박희도는 변절자라는 낙인으로 무덤마저 쓸쓸히 있다.

 

 

 

 

◇독립운동가 묘역 국가등록문화재로 등재되다.

이 공원에는 건국훈장을 받은 이의 9기의 무덤이 있다. 구리시 교문동 산 84번지 일대에는 한용운(대한민국장), 오세창(대통령장), 문일평(독립장), 방정환(애국장), 오기만(애국장), 유상규(애족장) 등 무덤 6기가 있다. 중랑구 망우동 산 57-3번지 일대에는 오재영(애족장), 서광조(애족장), 서동일(애족장) 등의 무덤 3기가 있다. 한용운의 무덤은 2012년 10월 12일에 나머지 8인의 무덤은 2017년 10월 23일 국가등록문화재로 등재됐다.

 

오세창 외 7인의 묘역이 문화재로 등록되는 데는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리위원회의 역할이 컸다. 대한민국장을 받은 한용운에 버금가는 가치가 있는 무덤을 보존하기 위해 절실함을 느꼈고, 윤동주 시인의 생질인 윤인석 교수(성균관대)와 위원들이 관련 부처를 사방으로 찾아 설득한 3년간의 노고 덕분이다. 이로 인해 망우리공원이 독립운동의 성지로 인문학 공원으로 우뚝 서게 된다.

 

서훈은 받았으나 등재 당시 누락 된 김병진(대통령표창), 뚜렷한 독립운동의 공적은 있으나 아직 서훈을 받지 못한 김기만(임시정부), 김분옥(3.1운동), 나우(임시정부), 이병홍(3.1운동), 이영학(흥사단). 조봉암(중국), 허연(수양동우회 사건) 등 애국지사의 묘역이 곳곳에 있다. 이분들도 3월이 오면 다시 부르기를 소망한다.

 

이곳에 머물렀던 안창호, 박찬익, 이탁, 송진우, 서병호, 김승민, 김정규, 나운규, 문명훤, 강학린, 박원희, 김사국, 백대진, 조종완, 김봉성 등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이름도 불러본다.

 

 

 

 

 

◇안창호 선생 묘비 43년 만에 돌아오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아끼는 두 명의 제자가 있었다. 이광수와 유상규다. 상해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펼치던 중 이 둘을 국내로 돌려보낸다. 이광수는 교육과 문학으로 유상규는 의학으로 독립운동을 하라는 권고와 함께. 하지만 유상규가 1936년 먼저 40세의 일기를 마치고 이곳으로 오고, 2년 뒤 도산은 "유상규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서거한다. 그리고 도산은 애제자의 무덤 가가운 곳에 묻힌다. 이광수는 도산의 일대기를 적은 '안창호 평전'을 저술했으며, 도산기념회는 1938년 세운 비석을 1955년 이광수의 비문을 새긴 묘비로 교체한다. 1973년 도산공원으로 묘를 이장하자 비석도 따라간다. 2005년 도산과 부인이 합장되고 2005년 새로운 비석을 세우자 망우리 비석은 도산기념관 지하에서 잠을 자게 된다.

 

이를 알게 된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리위원회는 각계각층에 제 자리에 돌려 달라고 요청해 2015년 10월에 재이전이 확정됐고, 이듬해 삼일절 97주년을 맞아 이전 제막식을 열게 됐다. 43년 만의 귀환이다.

 

이 비석은 오석(烏石)으로 높이 2.6m의 방부개석 방식으로, 뒷면 비문은 춘원 이광수가 납북 전에 지어 놓은 것을 뒷 비문은 김기승이, 앞 비문은 서예가 손재형이 썼을 정도로 당대 최고의 서예가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유관순 열사의 유해가 망우리공원에 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코와 귀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1920년 9월28일 오전 8시 수감번호 371번 유관순 열사는 유언을 남기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눈을 감았다. 일제의 무자비한 고문에도 마지막까지 '대한독립'을 외친 유관순은 열여덟 꽃다운 나이였다.

 

 

우여곡절 끝에 장례를 치렀고, 이태원공동묘지에 묻혔다. 16년이 지난 1936년 일제는 이곳에 택지조성을 추진하므로 유해는 2만 8천기의 무연고자와 함께 망우리로 왔다. 열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2018년 9월 7일 유관순기념사업회에서는 '유관순 열사 분묘 합장 표지비'를 세워 그 넋을 위로하고 있다.

 

1951년 순국열사 작호,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201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으로 승급했다. 이로써 망우리공원에 인연을 둔 독립운동가에게는 최고의 영예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한 허위, 안창호, 한용운, 유관순 4위를 보유하고 있다.

 

자료·사진제공=한철수 구지옛생활연구소장

 

[ 경기신문 = 이화우·신소형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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