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9 (월)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죽음을 넘어선 근·현대 인문학의 보고... 망우리역사문화공원(3)

망우리공원은 경기도 구리시와 서울시 중랑구를 경계하고 있다. 이곳에는 나라를 빼앗긴 민초(民草)들이 실의에 빠졌을 때 문학과 예술로 희망을 그 슬픔을 달랬다. 이곳에는 문학인, 화가, 조각가, 영화인, 국악인 등 일제강점기와 해방과 전쟁세대를 아우르는 꽃으로 피어난 예술가가 누워있다. 파란만장한 예술가의 삶이 엑스레이 필름으로도 남아있다. 망우리공원은 그 어느 곳에서 찾을 수 없는 역사적·철학적·예술적·교육적 가치를 지닌 근현대 인문학적 보고이다. 빼앗긴 들에서 꽃을 피운 예술가를 만나 본다. 

 

◇4인 4색의 소설가…경험하지 않은 글은 쓰지 않겠다

망우리공원에는 빈궁문학의 대가 서해 최학송, 통속소설의 대모 김말봉, 순수문학을 추구한 계용묵, 한국적 정한을 담론한 김이석의 묘역이 산자와 죽은자의 사잇길을 따라 누워있다. 김말봉과 김이석은 구리시 교문동에, 최학송과 계용묵은 중랑구 망우동에 주소를 두고 있다.

 

최학송과 김말봉은 1901년 동년배이고, 최학송과 계용묵은 조선문단의 선후배 관계이다. 김이석은 일제강점기 등단했고, 해방과 6.25전후 현실을 묵묵히 정담(鼎談)했다. 최학송, 계용묵, 김이석은 이북에서 태어났고, 김말봉은 부산이 고향이다.

 

최학송(서해)과 계용묵은 조선문단을 통해 데뷔했다. 최학송은 1924년 '고국'으로, 계용묵은 1925년 '상환'으로 각각 데뷔했다. 그런데 계용묵은 자신의 작품을 선택한 이가 최학송이라는 것을 알고 몹시 분개했다. 최학송이 계용묵과 불과 몇 개월 차이로 등단한 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최학송이 과연 자신의 작품을 선택할 자격이 있었는지는 의구심을 품었고, 계용묵이 문단의 등단제도에 대해 크게 실망하도록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계용묵은 중앙문단을 떠나 귀향 습작을 한다. 그가 데뷔 10년간 4편의 작품만 발표한 것도 이러한 영향이었을 것이다. 최학송은 계용묵이 중앙문단을 떠나게 한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서해 최학송(1901~1932)은 8년간 작가로 살면서 60여편의 작품을 남겼다. 탈출기·홍염·박돌의 죽음·그믐밤·전아사가 대표작이다. 1932년 3월 지병인 위문협착증 과다출혈로 7월 6일 관훈동 삼호병원에서 31세로 요절했다.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1958년 망우리로 왔다.

 

 

‘순수 귀신을 버려라’ 일갈한 김말봉(1901~1962)은 1935년 조선일보에 찔레꽃을, 1937년 동아일보에 밀림을 연재하므로 통속소설가로 이름을 날렸다. 이후 일본어로 글쓰기를 거부하다가 1947년 부인신보에 카인의 시장을 연재하면서 작품활동을 재개했다. 조선일보에 푸른 날개와 생명을 연재하므로 페미니즘 작가로 주가를 올렸다. 61세에 폐암으로 영면해 망우리에 머무르고 있다.

 

 

계용묵(1904~1961)은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났으며, 정치나 이념을 자제하고 또한 계몽적이지 않은 순수 문학을 추구했다. 백치 아다다와 병풍에 그린 닭이, 별을 헨다가 그의 대표작이다. 1961년 8월 9일 현대문학에 설수집을 연재하던 중 지병인 위암으로 향년 57세로 사망하고 망우리로 주소를 옮겼다.

 

 

김이석(1915~1964)은 한국적 정한(情恨)을 담은 글을 쓴 작가이다. 1915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193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부어가 당선돼 문단에 이름을 올린다. 실비명·학춤·외뿔소가 그의 대표작이다. 한국일보에 난세비화를 연재했고, 대한일보에 신홍길동전을 연재하다 1964년 9월 6일 급서해 향년 49세에 망우리로 왔다.

 

◇3인의 시인 … 저항과 희망을 노래하다

망우리공원에는 '님의 침묵'의 한용운, '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김상용은 경기도 구리시에 '세월이 가면'의 박인환 시인이 중랑구 망우동에 묻혀있다. 3인의 시인은 삶의 배경이 다르듯 시의 배경도 다르다.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나 1918년 창간한 불교잡지 유심(惟心)에 신체시를 탈피한 신시를 발표했고, 1926년 저항문학 시집 님의 침묵을 발표했다. 1933년부터 심우장을 머물면서 장편소설 흑풍을 조선일보에 1935년에 연재했다. 중풍에 시달리다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향년 66세로 열반해 미아리에서 화장하고 망우리로 왔다.

 

 

김상용(1902~1951)은 경기도 연천에서 태어났다. 1926년 동아일보에 일어 나거라로 데뷔했으며, 이화여전에서 영문학 교수로 재직하던 중 1939년 흩어져 있던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 등 27편을 모아 망향을 출간했다. 1951년 부산 피난 중 김활란의 집에서 음식을 먹은 후 식중독으로 49세에 일기를 마친다. 사망 1년 뒤 망우리로 왔으며 5주기를 맞아 시비를 세웠다.

 

 

박인환(1926~1956)은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났다. 1944년 평양의전에 입학했으나 해방이 되자 중퇴하고 종로에 마서서사 서점을 운영하며 많은 예술가와 교유했고, 1946년 국제신보에 거리로 데뷔, 신시론·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했다. 1955년 10월 '목마와 숙녀'가 담긴 박인환 선시집을 출간, 자유문학상 수상자 후보에 올랐으나 청록파에 밀려 탈락한다. 실의에 빠진 그는 3일 밤낮을 술을 마시다가 1956년 4월 17일 31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망우리로 왔다.

 

◇2인의 연극인 … 운명의 무대에 서다

우리나라에서의 서양식 연극의 효시는 1910년대 도입된 신파극이며 토월회가 부흥기를 이끈다. 이에 반하는 극예술연구회가 결성되면서 신파극에서 극예술로 승화됐으며, 해방 후에는 우익계 민족예술무대와 좌익계 조선연극동맹으로 나뉘어 사상전을 벌인다.

 

망우리공원에는 1936년 같은 해에 데뷔한 우익계 이광래(망우동), 좌익계 함세덕(교문동) 두 극작가가 있다. 이 둘은 유치진(동랑)의 영향 아래 있었으면서 연극계를 주도했으나 해방 후 서로 다른 운명의 무대에 섰다.

 

 

이광래(1908~1968)는 그와 극예술연구회, 민예 등을 함께 설립했으며 동랑의 그림자와 같은 2인자 삶을 살면서 소극장과 소인극을 청소년에게 보급했다. 대표작은 촌선생·지하도 등이 있다. 이광래는 ‘뛰어난 연극 실험가이자 교육자’로 자타가 공인하는 연극인으로 살다가 1968년 10월 30일 향년 61세에 일기를 마치고 11월 3일 망우리로 왔다. 1972년 그의 유고집 '촌선생'이 발간됐다.

 

 

함세덕(1915~1950)은 수필가 김소운의 소개로 그를 만나 문하에 들어가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는 도법(동승)을 스승인 유치진이 연출하기도 했다. 일제 말기 친일성향의 추장 이사벨라 등을 썼으며 1947년 희곡집 동승을 발표하고 홀연히 월북했다가 6.25 전쟁 중 북한인민군 선무반 제2진으로 남하하다가 1950년 6월 29일 신촌 부근에서 수류탄 오발 사고로 사망했고 그해 망우리로 왔다. 1988년 해금이 됐다.

 

◇내로라하는 예술가들 … 망우리에서 망우하다

망우리공원에는 한 시대를 풍미하고 개성이 짙은 작품을 창조했던 화가 이인성·이중섭, 조각가 권진규, 영화감독 노필, 서화가 오세창, 대중가수 차중락이 망우리 주민으로 남아있다. 또한 이곳에 머물렀던 시인은 김동명·김영랑, 작곡가 채동선, 영화인 나운규, 국악인 임방울, 건축가 박길용도 이곳에 머물렀다가 이사를 했다. 망우리공원은 빼앗긴 들, 싸우는 들에 예술의 꽃을 피운 선각자들의 예술촌이다.

 

사진·자료제공=한철수 구지옛생활연구소장

 

[ 경기신문 = 이화우·신소형 기자 ]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