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빈민의 벗이자, 철거민의 대부(代父)로 오로지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를 위해 전생애를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고 제정구 전의원의 6주기가 오늘 열린다. 그는 경남 고창에서 태어나 유소년시절을 향리에서 보냈으나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해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하면서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의 경지로 변하고 말았다.
명문대 입학의 기쁨도 잠시, 학생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제적 당하고, 1974년에는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돼 15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는 제적 시절인 1972년 청계천 판자촌으로 뛰어들어 야학교 교사로 버려진 형제들에게 글을 가르친 것이 계기가 돼 빈민운동가로 변신하게 된다. 1975년에는 아예 양평동 뚝방동네로 이사해 빈민들과 생활하다 1977년 서울시가 이 일대 판자촌을 강제철거하자 정일우 신부와 함께 철거민을 이끌고 시흥시에 복음자리마을을 세웠다.
이는 빈민과 제정구가 일궈낸 가장 아름답고 가장 위대한 승리였다. 1980년에는 도시빈민사목협의회를 결성하게 되고, 빈민촌 강제철거에 맞서 조직적인 투쟁을 벌인 끝에 한독마을, 목화마을 등 도시빈민의 정착촌 건설에 앞장 섰다. 이 나라에는 내로라하는 정치가와 사회지도자가 없지 않다. 그러나 빈민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의지가지없는 빈민을 끌어 안아 준 사랑의 실천가는 제정구 말고는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정치인으로서도 큰 획을 남겼다. 5공 때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로서 1987년 6월 항쟁을 주도하였고, 1988년 한겨레민주당 공동대표로 정치일선에 나서기 위해 총선에 출마했지만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하나 14대와 15대에 잇따라 당선돼 차별화된 의정활동을 펼쳐 주목받는 국회의원이 됐다. 그러나 그토록 열정적이면서 인간적이던 그에게도 행운의 여신은 늘 함께 해주지 않았다.
1998년 폐암으로, 해낸 일보다 할일이 더 많은 55세의 참 일꾼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만것이다. 그는 1986년 정일우 신부와 함께 막사이사이상을 공동 수상하고, 사후에 국민모란장을 추서 받았지만 상훈은 상훈일 뿐 그를 일찍 잃은 아쉬움과 아픔을 대신하지는 못했다. 추모식은 해마다 열리겠지만 정도(正道)정치 외길을 걸어온 제정구의 정치철학과 빈민운동사는 재조명과 연구를 통해 교훈으로 삼아야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