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야도는 원래 섬 모양이 새가 나는 모습 같아서 ‘새곶섬’이라고 불렸는데, 이 이름이 한자화돼 ‘사야도’, ‘사야곶도’ 등으로 불렀다 한다.
또 신라 태종무열왕 때 당나라 소정방 군대가 이 섬에 들어와 나당연합군을 조직하면서 소야도라고 부르게 됐다 전해 진다.
소야도는 바닷물이 갈라지는 ‘모세의 기적’으로 유명한 곳 중 하나다. 썰물 때 큰 마을 앞에서 갓섬, 간뎃섬, 송곳여, 물푸레 섬까지 약 1300m의 바닷물이 드러나는데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바다 갈라짐 명소다.
이 현상은 썰물 때만 나타나, 국립해양조사원 홈페이지에서 확인하고 가는 게 좋다.
떼뿌루 해수욕장에서는 캠핑할 수 있고, 해수욕장에서 산을 넘어 10분만 걸으면 연애소설 촬영지로 유명한 죽노골이 있다.
또 해수욕장이나 큰 마을에서 남서쪽으로 약 40분쯤 걸어가면 ‘막끝’이라는 장소가 있는데, 여기서는 삼형제 바위와 곰바위가 보이는 멋진 풍경과 낙조를 감상할 수 있다.
바로 앞바다는 ‘반도골’이라고 불리는데, 수심이 깊어서 대형 상선이 지나가는 길목이다. 예전엔 대형 민어가 많이 잡히던 곳이기도 했다.
소야도는 조기, 민어, 꽃게, 새우 같은 어종이 잘 잡히는 어장으로 유명하다. 자연산 굴도 많이 나온다.
또 이곳은 많은 인물을 배출했는데 배계주 초대 울릉군수의 생가와 묘도 이곳 소야도에 있다.
울릉도는 1882년에 해금(海禁)이 해제돼 1883년부터 사람들이 정식으로 입도했다. 1895년에 ‘도감’이라는 직책도 생겼다.
입도민에게는 개척 당시부터 면세 등의 우대정책으로 정착을 도왔지만, 도감에게는 월급이나 부하가 제공되지 못했다.
이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 초대 도감 나아가 초대 군수로서 울릉도 개발에 힘쓰고 일본인의 자원 침탈을 적극적으로 저지한 분이 바로 배계주였다.
대한제국이 1900년 10월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승격시키는 데 배계주의 활동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유미림, 초대 울도 군수 배계주의 행적에 대한 고찰,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제17권, 2호, 2018).
그는 1895년에 울릉도감이 됐으며, 그 후 일본인들의 울릉도 규목 남벌에 맞서 일본으로 직접 건너가서 적극적으로 송사해 두 차례 승소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울릉도에 일본인들이 불법적으로 대거 진출해 울릉도의 산림을 함부로 도벌해 가는 만행을 저지하기 위해 큰 노력을 했다.
또 울릉도에 학교를 세우고 제염 사업과 양잠 사업을 일으켜 울릉도가 자급자족 경제를 이룰 수 있게 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본토(우리나라)와 울릉도를 왕래하는 선박을 마련하려고 노력했다.
제2차 군수로 임용되었을 때는 동래감리의 7개 절목과 우용정이 발표했던 10개 절목을 참고해 ‘울도군 절목’을 마련해 울릉도의 통치 기틀을 세우려 했다(이상태, 울도군 초대 군수 배계주에 관한 연구, 영토해양연구, Vol.11, 2016).
오는 10월 25일은 독도의 날이다.
1900년 10월 25일 고종황제가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명시한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기념하는 날이다.
2020년에는 이 칙령 제정 120주년을 기념해 배계주의 고향인 소야도에서 독도의 날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지금은 옹진군에서 소야도에 있는 폐교된 분교 일부에 배계주 기념관을 짓고 있다.
10월 25일 독도의 날을 맞아, 배계주가 울릉도를 ‘대한의 요충지’로 지키기 위해 애쓴 점을 기억해 보자.
배계주 생가에 ‘울릉도, 대한의 요충지’라는 문구가 담긴 안내판을 세우고, 배계주로(路)를 만들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재조명하자.
글 : 김용구 박사(인천시 사회적경제지원센터장, 인천시 섬발전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