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다음 달 기준금리 결정 과정에서 환율이 다시 고려요인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은이 기준금리 인하 시기를 놓쳤다는 '실기론'에 대해서는 “환자를 일부러 많이 아프게 해놓고 약을 쓴 다음에 명의라고 하는 견해와 다를 바 없다”는 비유까지 들어가며 강하게 비판했다.
이 총재는 2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와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 연차총회에 참석 후 동행기자단과 만나 "달러 환율이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높게 올라있고 상승 속도도 빠르다"며 "지난 10월 금통위에는 고려 요인이 아니었던 환율이 (11월 금통위에서) 다시 고려요인으로 들어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피벗(pivot·방향 전환) 하면 환율이 안정된 방향으로 갈 것으로 예상했지만 10월 금통위 회의가 끝나고 지난 2주간 미국 대선 향방, 예상보다 견고한 미국 성장세 등으로 미국이 금리를 빨리 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가 커지면서 달러가 굉장히 강해졌다”고 부연했다.
미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될 가능성에 베팅하는 '트럼프 트레이드' 현상과 함께 예상보다 견조한 미국의 경제 지표로 금리 인하 기대가 옅어지면서 최근 '강달러'가 계속되고 있다. 원/달러 환율은 한 달 새 약 80원이 오르면서 1400원 선에 다가섰다.
이 총재는 “수출 증가율 둔화와 거시건전성 정책이 금융 안정에 주는 효과, 미국 대선 이후 달러 추세 변화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11월 인하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했다.
지난 8월 기준금리를 동결해 인하 시기를 놓쳤다는 ‘금리 인하 실기론’에 대해서는 "1년쯤 지나 (경제, 금융안정 등의) 결과를 보고 얘기해달라”며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는 "일각에서는 미국 따라 금리를 올릴 때 한은이 좌고우면하고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등을 고려하면서 금리를 더 올리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외통수에 걸렸다는 의견이 있다"며 "이건 아픈 환자를 더 아프게 만든 뒤 약을 줘 나으면 '내가 낫게 했으니 명의'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고 비판했다.
인플레이션이 2%대로 안착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던 지난 7월부터 선제적으로 금리를 낮췄어야 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그때 금리를 내렸으면 9월 가계부채가 10조 원까지 불어나고 서울 등 부동산 가격이 올랐던 상황이 더 심각해지지 않았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통화정책을 펼칠 때 금융 안정을 유지하면서 경기 침체를 막아내야 하는 이중 난제에 봉착한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1년쯤 뒤 경기도 크게 후퇴 안 시키고, 금융 안정도 달성하면 그때 가서 결과를 보고 잘잘못을 판단해달라는 것이다.
올해 성장률은 통화정책방향에서 고려사항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이 총재는 "4분기(성장률)가 정말 안 나온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추세를 보면 올해 성장률은 잠재성장률 2%보다는 반드시 높을 것"이라며 "성장률이 갑자기 망가져서 경기를 부양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이 총재는 지난 3분기 성장률을 연간으로 반영하면 "2.4%(전망치)를 예상했던 게 2.3%나 2.2% 정도 될 것"이라고 했다. 다만 "3분기 영향이 그렇다는 것이고 4분기도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년 성장률에 대해서는 "불확실성이 크다"고 했다. 한은 전망치는 2.1%다.
한은의 경기 예측 능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에는 "분기 수치는 연간보다 변동이 훨씬 크다"며 "분기별 자료의 변동성을 이번에 처음 보는데 너무 일희일비하지 말고 '오버리액션'(과잉 반응) 하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IMF 총회 주요 논의 결과도 전했다. 그는 "글로벌 성장세는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지만, 다운사이드(하방) 리스크가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고 전했다. 올해 글로벌 성장률이 3.2%로 20년 전(3.8%)보다 낮아지는 등 팬데믹 이후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가 구조적으로 성장세가 줄었다는 것이 전반적인 평가라는 것이다.
이 같은 저성장 상황에서 선진국들의 높은 부채와 지정학적 위험, 낮은 생산성이 글로벌 성장세의 큰 불확실성으로 작용하고 있다고도 했다. 이 총재는 "곧 있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 공화당 어느쪽이 정권을 잡든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달러 기축통화 지위를 이용한 미국의 팽창 정책은 상당 기간 계속될 것"이라면서 "이로 인한 미국의 재정적자 상황 또한 상당 기간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 대선 결과에 대해서는 "결과는 열어봐야 알 것"이라면서 "누가 되든 대중 정책만큼은 전반적으로 강성으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기후 위기가 예상보다 빠르게 일어나고 있고 재정손실로 이어지고 있지만 전 세계적으로 이에 대한 준비가 미비하다는 우려도 있었다고도 했다.
[ 경기신문 = 고현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