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금리와 끝이 보이지 않는 경기침체 속에 서민경제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보험을 해약하거나, 수수료를 감수하고서라도 할부결제를 선택하는 이들이 급증하면서 금융 전반에 위기 징후가 포착되고 있다.
14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해 생명보험사들의 효력상실 환급금은 59조 555억 원으로 2022년(45조 원)보다 31% 늘었다. 효력상실 환급금은 보험사들이 고객에게 지급한 해약환급금과 보험금을 일정 기간 내지 못해 돌려받은 돈을 말한다. 특히 보험료를 제때 내지 못해 계약이 해지된 효력상실 환급금은 1년 새 13%나 늘었다.
보험업계는 경기침체가 길어지면서 보험료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보험을 해약하는 이들이 늘어난 결과라고 설명한다. 한 보험업계 관계자는 "장기 생명보험 인기가 시들해진 것도 있지만, 지속되는 불경기에 보험을 유지하는 것조차 부담을 느끼는 소비자들이 많아졌다"고 분석했다.
살림살이가 팍팍해지면서 보험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 소비자들도 늘어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보험계약대출 잔액은 71조 6000억 원으로 1년 새 6000억 원 늘었다. 눈에 띄는 점은 보험계약대출의 금리가 상승세를 보이고 있음에도 잔액이 늘었다는 것이다. 깊어지는 불황 속 은행권이 가계부채 관리를 위해 대출 문턱을 높이면서 '마지막 보루'인 보험계약대출을 찾는 소비자들이 많아졌다는 의미다.
카드 결제 패턴에서도 서민경제의 위기를 읽을 수 있다. 국내 8개 전업카드사(신한·삼성·KB국민·현대·롯데·우리·하나·BC)의 지난해 말 할부 수수료 수익은 3조 4631억 원으로 집계됐다. 전년 대비 9.1%(2897억 원) 늘어난 것으로 2023년 말 기록한 최대치를 다시 한 번 갈아치웠다.
가맹점 수수료율 인하 등으로 수익성 악화를 직면한 카드사들이 무이자 기간 축소 등 할부 관련 혜택을 줄였음에도 할부 결제는 증가세를 보였다. 경기침체 장기화로 큰 금액을 한번에 쓰기 어려운 소비자들이 수수료를 지불해가면서 할부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일시불대급금에 대한 연체수수료 역시 1년 새 3.5%(12억 원) 늘었다.
카드업계 관계자는 "장기간 지속된 고금리, 고물가 기조를 비롯해 경기부진이 계속되고 있어 소비 부담이 높아진 상황"이라며 "소비자들은 이자비용이 발생하더라도 할부 서비스를 이용하려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금융권에서는 이러한 흐름이 단기간에 해소되기 어렵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 특히 취약계층의 부채가 빠르게 늘고 있는 만큼, 정부의 정책적 대응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 금융업계 관계자는 "고금리와 그에 따른 경기침체로 인해 은행 대출을 갚기가 어려워지면서 보험을 깨거나 급하게 대출을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불황이 장기화될 경우 우리 경제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지원책이 하루빨리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 경기신문 = 고현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