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 아침, 새소리 맑으면 하루 시작이 흥결이다.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걸려와 반갑게 만날 수 있다거나 소통하는 재미를 느끼게 하는 아들에게서 반가운 소식이 온다든지- 새 노래 따라 걸을 때의 생각은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새의 아침 식탁이 푸짐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월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처녀 여선생님이 제일 예뻤다. 그리고 여선생님은 화장실 사용도 안 하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때로는 혼이 나가게 꾸중을 하시어 무섭기도 했다. 그 여선생님이 풍금을 연주하며, 어린이날 노래를 가르쳐주실 때 목청껏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던 때가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존경과 사랑이 순수했던 그 시절이 있어 내가 사람 노릇을 크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겠거니 싶다.
둘레의 정원을 보면 봄꽃은 지고 장미꽃은 햇빛에 얻어맞아서 잎은 시들어 추레해지고 있다. 그러나 길가의 풀들과 나뭇잎은 진한 녹색으로 잎 속에서 돋는 기운이 느껴지고 있다. 이것이 5월을 지난 6월의 주변 풍경이다. 5월의 소만을 보내고 6월의 망종(芒種)을 맞이하면 본격적인 농사철이다. 보리를 수확하기도 하고 모내기를 하고 채소도 심고, 낮에는 한여름의 더위를 맛보기도 한다. 이 극심한 변화에 식물도 사람도 특히 농부는 더욱 힘겨울 수밖에 없다. 자연은 눈·비·바람·먼지와 온도에 끊임없이 부대낀다. 하지만 식물과 동물은 이러한 변화에 묻혀버리지 않고 적응하고 변화하며 원망 없이 살아 낸다.
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기 위해 비행기에 오른다. 외국여행이 별로인 나는 유럽을 한번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누가 다녀오라고 한다 해도 마음이 부담스러워할 것 같다. 육체적인 보대낌도 있지만, 혼자라서 남 보기도 그렇고 스스로도 머쓱해질 것 같다. 열심히 살아온 자 늙어 골병이라고, 이마에는 고생의 훈장 같이 주름만 깊기도 하다.
백두산은 세 번 다녀왔다. 근무하던 대학 산악회 멤버였기에 그랬고 내 고장 대한산악회 고문으로 있었던 덕분이다. 지금으로서는 금강산이나 한 번 가보고 싶다. 현대의 정주영 회장은 생전에 아버지의 소 판 돈을 몰래 훔쳐 북에서 월남해 와 사업을 일으켰다. 고인이 된 그분은 그 당시 훔쳐온 소 한 마리에 이자로 천 마리의 소를 합쳐 천한마리의 소를 트럭에 싣고 휴전선을 넘었다. 그 뒤 1998년 드디어 금강산을 구경할 문이 열리고 왕래가 트였는데 나는 가보지 못했다.
‘정선아리랑’의 첫대목은 ‘금강산 일만 이천 봉 팔만 구 암자’로 시작한다. 신의 솜씨 같은 자연의 신묘함과 불교 유적이 가득한 믿음의 영산 ‘금강’의 진면목이 담긴 성스러운 산이다. 그래서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살아 금강산을 가보길 바라는 ‘버킷리스트’가 되기도 한다.
뒤돌아보면 나의 삶은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쓴 것만 같았다. 그렇게도 복도 없이 남에게 당하기만 하고 남의 살림만 도왔다는 생각이다. 그런 환경에서도 인간의 도리라는 굴레에 묶여 혼자만 고통스러워했던 과거를 용서할 길 없어 분하다는 생각이다. 그러한 분노는 나를 징계하게 되고 자책하며 ‘뭣하며 살아왔느냐?’는 아픔 속에 한숨만 나왔다. 그런데 단 하나, 어떤 권력과 경제의 힘에 빌붙어 단맛에 중독된 정치꾼 같이 그 길을 얼쩡거리며 살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여름밤이면 모깃불 피워놓고 평상에 누워 어머니의 부채 바람과 함께 옛이야기 속에 잠이 들었다. 낮에는 아버지와 ‘여우네’라는 강에서 목욕하며 아버지의 굳은살 밖인 손으로 때를 밀어주시는 사랑 속에 나는 철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도 아버지! 하면 가수 남상규의 “고향의 강”이라는 유행가가 떠올라 불러보곤 한다. “- 눈감으면 떠오르는 고향의 강, 지금도 흘러가는 가슴속의 강…”
그래서일 것이다. 나는 잘못은 솔직히 인정하고, 내 능력이 100%라면 줄여서 70-80%라고 줄잡아 말하며 겸손하고 얌전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지난 5월은 세상 일로 엄청나게 스트레스가 쌓였다. 국가를 통치한다는 자가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법의 심판으로 갇혀 지내면서도 ‘내 잘못이 뭐냐? 내 배 째라’는 식으로 고개를 쳐들고 어디 한번 때려보라‘고 약 올리는 모습 같은 태도를 보며 인간적 한계를 느꼈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도덕적 사회의 악한이 어떤 사람인지를 모르는 그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실망스러웠다. 따라서 후배 인생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럽다.
파란 하늘 아래 살면서 아비는 아비답게, 아들은 아들답게, 군왕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臣)답게 자기 할 일 찾아서 하는 가운데 때때로 하늘을 보고 미소 지으면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