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의 바람은 아직 봄의 향기를 머금은 채 천천히 여름으로 향한다. 나뭇잎은 짙어지고, 하늘은 한층 투명해지며, 사람들의 옷차림도 가벼워진다. 이맘때가 되면 우리의 입맛도 계절을 닮아 상큼하고 시원한 것을 찾게 된다. 그런 초여름에 어울리는 전통주가 있다. 이름부터 운치 있는 술, 백하주(白霞酒)다.
‘하얀 노을’이라는 뜻을 지닌 백하주는, 술이 익어가는 과정에서 하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기운이 노을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름처럼 술은 투명하고 은은한 빛깔을 띠며, 유리잔에 따르면 잔잔한 기운이 고요히 피어오른다. 입안에 닿는 순간 부드러운 곡물 향과 청량감이 퍼지며, 무더위 속에서 반가운 쉼표가 되어준다. 도수는 제법 높은 편이지만, 깊이 있는 맛 덕분에 조용한 감탄을 자아낸다.
백하주의 기원은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시대 고문헌에서도 이 술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술을 단순한 기호를 넘어 삶의 지혜로 여겼던 선조들의 식문화 속에서, 백하주는 더위를 이겨내는 지혜로운 음료로 자리 잡았다.
제조법 또한 독특하다. 일반적인 술과 달리, 백하주는 ‘삼양주’ 방식으로 빚어진다. 밑술에 ‘서김’을 섞고, 여기에 덧술을 더하는 방식이다. 서김은 본격적인 술빚기에 앞서 밥에 누룩을 섞어 따뜻한 곳에 두어 3~4일간 발효시킨 것으로, 밑술의 발효를 도와주는 중요한 과정이다. 또, 밑술을 빚을 때 쌀을 쪄서 익히는 것이 아니라 쌀을 가루 내어 끓는 물을 부어 반쯤만 익히는 ‘반생반숙(半生半熟)’ 기법이 사용된다. 이것을 지금은 범벅이라고 부른다. 이 방법은 곡물의 풍미를 그대로 살리는 전통 방식으로, 최근 많이 사용하는 ‘비열처리 술’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백하주가 발효되는 동안 퍼지는 향기는 그 어떤 꽃보다 은은하고 깊다. 발효가 마무리되면 술은 노란빛이 아닌, 거의 투명에 가까운 맑은 빛깔을 띈다. 깔끔한 맛 덕분에 어떤 음식과도 잘 어울리는 것이 백하주의 또 다른 매력이다. 단순한 재료 속에서 깊은 맛을 끌어내는 이 술은, 무엇보다 누룩의 품질과 정성 어린 손길이 맛을 좌우한다.
무엇보다 백하주는 ‘잠깐 멈춤’이 필요한 시기에 더없이 잘 어울린다. 반년을 쉼 없이 달려온 자신을 다독이며 마시는 한 잔의 술. 무거운 사색보다는 오히려 맑고 투명한 맛이 더 깊은 위로가 될 수 있다. 냉장고에서 시원하게 꺼낸 백하주를 잔에 따르면, 마음속에도 어느새 하얀 노을 하나가 피어오를지도 모른다.
한편, 농촌진흥청은 고문헌 속 전통주의 제조법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한 '풀어쓴 고문헌 전통주 제조법'을 발간했다. 해당 책은 농업과학기술도서관 홈페이지에서 전자도서(e-book) 형태로 열람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