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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숙의 프랑스 문학 살롱 이야기] 예술의 진정한 공장: 데팡 부인의 살롱

 

살롱의 대모 탕생 부인이 1749년 세상을 뜨자 데팡 부인, 레피나스 양, 조프랭 부인 등의 살롱 시대가 시작 되었다. 이 여인들은 자신의 살롱에서 당대의 작가들이 금융가, 장관, 방문 외국인들을 만나 정기적으로 유쾌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하였다. 여기서 피어난 아이디어들은 세상 곳곳으로 퍼져나가 혁명의 자양분이 되었다. 이 세 여인의 살롱 중 가장 활기를 띤 곳은 데팡 부인(Madame du Deffand)의 것이었다.

 

데팡 부인의 본명은 마리 드 비시 샹프롱(Marie de Vichy-Champrond)으로 1696년 부르고뉴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비시 백작 가스파르 2세였고 어머니는 부르고뉴 의회 초대 의장의 딸이었다. 데팡 부인은 1718년, 스물두 살의 나이로 친척인 장 바티스트 자크 뒤 데팡 후작과 결혼하였다. 하지만 이 부부는 취향이 잘 맞지 않았다. 남편은 매우 지루한 대령으로 전원생활을 좋아한 반면, 부인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인 파리의 유흥가에서 사교모임을 즐기길 원하였다. 결국 부인은 남편에게 별거를 제안했고 이는 곧 받아들여졌다.

 

미모와 재치, 느슨한 도덕성의 소유자인 데팡 부인은 곧 유명세를 날렸고 추종자들에 의해 둘러싸였다. 특히 그녀는 의회 의장 샤를 장 프랑수아 에노와 가까워졌다. 에노 의장은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재치와 낭만이 넘쳐 났다. 그는 그녀를 소(Sceaux) 궁정의 공작부인에게 소개해 주었고 이를 통해 네트워크를 구축하였다. 그녀는 한동안 소 궁정에서 쾌락을 만끽하며 볼테르를 만났다.

 

1742년부터 그녀는 볼테르, 호레이스 월폴, 달랑베르, 쥘리 드 레피나스, 륀 공작부인, 슈아줄 공작부인 등 당대의 유명 인사들과 풍부한 서신을 주고받기 시작하였다. 독설을 내뱉길 주저하지 않았던 그녀의 서신은 가십, 궁정 가십,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 등으로 가득하였고, 기민하고 생동감 넘치면서도 날카롭고 예리하였다. 대화가 예술이었던 당시의 살롱 대화처럼 명쾌하고 때로는 날카로운 논평으로 인해 사나운 느낌을 주기도 하였다.

 

 

남편이 사망하자 그녀는 1747년 파리 생도미니크 거리의 생조제프 수녀원으로 이사하였다. 그리고 이 수녀원을 설립한 몽테스팡 부인이 살던 아파트에 가장 찬란하고 빛나는 살롱을 열었다. 그녀의 살롱 벽은 아비뇽에서 주문한 미나리아재비 무늬 원단에 불꽃색 리본 장식이 되어 있었다. 커튼과 문도 같은 원단으로 단장되었다. 리젠시풍 서랍장 두 개, 호두나무 책상, 그리고 노란색 바탕에 빨간색과 노란색 줄무늬 벨벳이나 작은 빨간색 꽃무늬 태피스트리로 장식된 살롱에서는 정원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였다.

 

오후 5시가 되면 데팡 부인은 살롱 벽난로 옆에 앉아 손님들을 맞이하였다. 파리 좌안 귀족들의 최고 가문인 슈아줄 가문과 브로이 가문의 사람들, 그리고 뤽상부르 원수가 왔다. 이곳에서 그들은 몽테스키외와 튀르고의 개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데팡 부인은 자신의 살롱에서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즐겼고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손님이 몰려 들면서 곧 유명해졌다. 그녀의 지성과 독립 정신은 이 살롱에서 진정한 매력을 발산하였다. 철학자, 예술가, 작가, 교양 있는 귀족들이 모였던 이곳에 볼테르와 달랑베르는 단골손님이었다. 퐁트넬, 마리보 같은 저명한 작가, 엘베티우스 같은 철학자, 팔코네 같은 조각가도 환영받았다. 달랑베르의 뮤즈인 쥘리 드 레피나스는 바로 여기서 미래의 살롱 여주인이 되는 훈련을 받았다.

 

초기 데팡 부인은 대부분의 살롱 여주인과 마찬가지로 문학적 성과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많은 책을 읽었고, 특히 17세기 작가들의 책을 읽어주었다. 그녀는 “이 세상에서 나에게 즐거움은 사교와 독서 두 가지뿐이다”라는 말을 하였다.

 

본인의 살롱에서는 데팡 부인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볼테르와 주고받은 서신을 낭독하기도 하였다. 19세기 작가 생트뵈브는 “데팡 부인은 볼테르와 함께 당대의 가장 순수한 고전 산문 작가이며,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작가”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이 여성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지루함과 고독이었다.

 

데팡 부인은 파리를 지나가는 진지한 외국인들을 경계하였다. 그러나 라이벌인 조프랭 부인의 살롱에 그들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 서둘러 초대하였다. 이때 영국 수상 로버트 월폴의 아들이며 작가이자 정치가인 호레이스 월폴(Horace Walpole)이 도착하였다. 월폴은 귀여 우면서도 재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대재무부 감사관이라는 직책에 익숙하지 않아 비서에게 자기 일을 맡기고 삶을 만끽하며 많은 여자 친구를 사귀었다. 그녀들 대부분은 나이가 꽤 많았다.

 

데팡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월폴은 1765년 파리에서 외교 임무를 수행하던 중 스무 살 연상인 데팡 부인과 친구가 되었다. 그는 이듬해 귀국하였지만 두 사람은 후작 부인이 1780년 사망할 때까지 서신을 주고받았다. 그녀는 월폴과의 서신에서 자신의 감정과 사생활은 물론 서로의 삶의 기복을 털어놓으며 많은 주제를 환기시켰고, 정치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언급하였다. 이 서신에는 유럽 계몽주의의 주요 인물들이 묘사되었다.

 

 

데팡 부인의 살롱의 특징은 살롱의 전신이자 모델인 랑부이예 호텔의 살롱처럼 남녀가 규칙에 따라 대화를 나누고 프랑스 신사들이 거친 호전성을 버리고 우아하고 세련된 매너를 배우는 곳이었다. 예의를 통해 갈등을 극복하고, 외모를 가꾸는 세심한 경계를 통해 타인을 존중하는 예술의 진정한 공장이었던 셈이다.

 

1752년 시력을 잃은 데팡 부인은 자신을 대신하여 레피나스 양을 책 읽어주는 사람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후자는 1763년 센 강 우안에 전자 보다 더 큰 살롱을 열고 데팡 부인의 손님을 대거 끌고 나가 레피나스 살롱의 서막을 예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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