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의 가계부채 총량 규제가 강도 높게 시행되면서 전세자금대출과 신용대출까지 실수요자를 중심으로 막히고 있다. 시중은행들은 당국의 연간 대출 목표를 맞추기 위해 선제적으로 대출 창구를 닫고 있고, 그 여파는 고스란히 무주택자와 1주택자 등 실수요자에게로 향하고 있다.
시장에서는 투기 수요 차단이라는 정책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수요의 성격을 가리지 않은 획일적 규제가 서민 주거 안정을 해친다는 지적이 커지고 있다.
◇ “대출 막혀 이사도 못 가”…현장선 실수요자 발 동동
경기도 수원에 거주 중인 직장인 A씨는 다음 달 전셋집 계약 만기를 앞두고 전세자금대출을 신청했지만, “대출이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는 “대출이 막히니 집을 옮기지 못하고 월세 전환을 고민 중”이라며 “주거가 개인의 선택이 아닌 운이 돼버렸다”고 토로했다.
신한은행은 6일부터 임대인의 소유권 이전이 완료되지 않은 이른바 ‘갭투자성 전세대출’을 전면 중단했다. 1주택 이상 보유자의 전세자금대출도 일시적으로 중단된다. 이는 수도권뿐만 아니라 지방까지 포함되며, 기존 주택 처분이나 선순위 채권 감액 조건이 붙은 전세대출도 제한 대상이다.
신한은행은 또 오는 8일부터 전세자금대출과 주담대의 변동금리 기준을 기존 코픽스(COFIX) 6개월물에서 금융채 6개월물로 변경해, 시장 금리 변동을 더 민감하게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KB국민은행은 이미 지난해 9월부터 소유권 이전 조건부 전세대출을 차단했고, 이달 1일부터는 대표적인 신용대출 상품인 ‘KB직장인 든든 신용대출’ 시리즈 3종의 판매를 전면 중단했다. SC제일은행도 지난달 21일부터 일부 주담대를 대면 방식으로만 제한적으로 취급하고 있다.
은행들은 “당국의 총량 관리 지침이 워낙 강경해, 실적 관리를 위해 불가피하게 대출을 줄일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지난 6월 ‘6·27 대책’ 이후 금융당국이 연간 대출 목표치를 사실상 절반 수준으로 줄이도록 요구하면서, 전세·신용대출까지 조이게 됐다는 설명이다.
◇ “실수요자 배제되면 정책 신뢰 무너져”…선별 기준 절실
정부는 가계부채 증가가 금융 시스템의 불안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총량 관리를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일률적으로 대출을 제한하면서 실수요자까지 배제되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한 금융 분야 전문가는 “총량 조절은 필요하지만, 실수요자와 투기 수요를 동일한 기준으로 적용하는 것은 정책 실효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며 “자격 요건이 명확한 실수요자에 대해서는 별도 기준을 적용해 대출 문턱을 낮춰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문가는 “정부 정책이 서민의 주거 문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만큼, 금융당국이 현장 상황을 반영해 보다 정교한 조율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금융권 역시 유연한 제도 운영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분위기다. “무주택자나 청년층처럼 주거 마련이 절실한 계층에 대해선 금융권이 선별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제도적 여지가 필요하다”는 게 한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의 말이다.
◇ 7월 가계대출 4조↑…“8~9월까지 막차 수요 계속될 듯”
실제로 가계대출은 규제 강화에도 불구하고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5대 시중은행의 7월 말 기준 가계대출 잔액은 758조 9000억 원으로, 한 달 새 4조 1000억 원 이상 늘었다. 이 중 전세대출은 3781억 원 증가했고, 전체 주택 관련 대출은 4조 5000억 원 넘게 불어났다.
금융권에 따르면 대출 실행에는 통상 수개월이 소요되기 때문에, 8~9월에도 가계대출 증가세가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이른바 ‘막차 수요’가 여전히 대거 몰리고 있는 것이다.
은행권 관계자는 “대출 총량을 초과하면 은행 자체가 당국의 제재 대상이 되기 때문에, 앞으로도 실수요자 대출부터 선제적으로 조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총량 규제는 거시 건전성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실수요자와 투기 수요를 구분하지 못한 채 적용되는 획일적 규제는 주거 안정을 해치고, 정책 신뢰마저 흔들 수 있다. 시장에선 무주택자, 청년층 등 주거 약자 보호를 위한 ‘핀셋 기준’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 경기신문 = 오다경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