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지털 기술이 일상에 적용되면서 시간 정보와 공간 정보가 아주 편하게 들어온다. 교통편을 알아보는 일만 해도, 어디에 가서 얼마 동안을 기다리면 무슨 차를 타고 얼마나 걸려서 어디로 이동할 수 있는지를 금방 알려 준다. 옛날처럼 막연하게 기다리는 일은 일상에서 없어졌다. 현상이 없으면 그 현상을 나타내는 언어도 사라지는 법이다. 기다리는 일이 없어지면, ‘기다린다’라는 말도 사라질 건가. ‘기다린다’는 말 대신에 ‘대기한다’는 말이 흔하게 쓰인다.
‘기다린다’와 ‘대기한다’가 특별히 다를 게 뭐가 있느냐. 그게 그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아도 큰 차이가 없다. ‘기다리다’는 ‘어떤 사람이나 때가 오기를 바라다’로 풀이하였고, ‘대기하다’는 ‘때나 기회를 기다리다’로 풀이하면서 두 말이 비슷한 말임을 표시해 두었다. 그러나 이 두 말이 실제로 사용되는 화용(話用)의 맥락에서 보면 미묘한 의미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차이는 중요하다.
‘기다리다’는 동사이지만, 이 말에는 그리움 등 마음의 지향이 녹아 있어서, 형용사 같은 느낌도 든다. ‘기다리다’는 무언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행위인데, 그것이 어떤 조건도 없이 지속된다는 데에 이 말의 묘미가 있다. 즉 그 기다림이 기한을 정해 두지 않고 지속된다는 뜻이 숨어 있다. 물론 현실에서 “오늘 하루만 기다린다.”, “돈을 주면 내가 기다리지.” 등과 같이 조건을 붙여서 기다리는 경우를 보지만, 이는 ‘기다리다’라는 말이 원래 생겨났던 생태에서 보면, ‘기다리다’의 원형질 의미로 봐주기 어렵다. 요컨대 ‘기다리다’는 막막하고 막연한 기다림, 기약 없는 기다림이, 그 의미의 원형을 차지하고 있다 해야 할 것이다.
이에 비해서 ‘대기하다’는 구체적인 목적, 상황, 근거, 시간, 공간, 결과 등이 비교적 드러나는 기다림이다. “면접하실 분은 여기서 대기하고 계십시오”라든지 “식당이 혼잡하니 지금 오신 분은 잠시 대기해 주십시오” 등의 용례에서 보듯이 ‘대기하다’에는 막막함이나 기약 없음은 애초에 없다. 현대 문명 시스템에 맞추어진 기다림의 조건이 분명하다. 그래서 ‘대기하다’는 의미의 동력을 확장해 간다. 사전은 ‘대기하다’를 ‘부대가 전투 준비를 마치고 출동 명령을 기다리다’라는 뜻의 군사용어로 설명한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이제 막막하게 기다리는 일은 피해야 하는가. 무조건 기다리기는 내다 버릴 것인가. ‘기다리다’가 위축되어 가는 자리를 ‘대기하다’가 점령해 버리는 세상이 되었는가. 정말 그런가. ‘기다리다’는 ‘대기하다’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인생론적 의미를 지닌 웅혼한 동사이다. ‘기다리다’는 인간 존재의 보편성을 심원하게 일깨우는 마음의 동사이다.
인류의 위대한 서사나 예술 작품들은 ‘기다리다’의 모티프, 즉 기다리는 주인공들이 없이는 성립이 불가능하였다. 춘향의 일편단심 기다림, 오디세우스의 10년 귀향의 역정을 버티게 하는 기다림, 솔베이지의 순애보에 얽힌 무한정의 러시아 혁명과 내전의 소용돌이에서 인간적 사랑의 감동을 향하는 ‘닥터 지바고’의 기다림 등이 ‘기디리다’의 인간적 진정성을 웅변으로 말한다. 베케트의 명작 ‘고도를 기다리며’는 인생이 막막한 기다림의 연속임을, 아니 그 자체임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