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중국 광시(廣西) 자치구 위린(玉林)시에서는 개고기축제가 국제적인 논란 속에 열린 적이 있다. ‘식습관’과 ‘동물학대’라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는 가운데서도 일주일 축제를 위해 무려 1만 마리의 개가 도살됐고 수 십만명이 참여했다. 개고기사랑은 중국뿐만이 아니다. 우리도 만만치 않다. 일부 동남아 기타국가들도 역시 그렇다. 모두가 뿌리가 깊은 동양의 개고기 역사에서 비롯된 식문화다. 중국 고대 경전 ‘예기(禮記)’를 보면 2600년 전인 주나라 때부터 여름철 보양식으로 애용됐다는 기록이 있다. 또 사기(史記) 진본기에는 “기원전 675년 처음으로 복일(伏日)을 정해 개를 잡아서 사람을 해치는 열독을 제거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가 하면 한나라를 세운 유방은 ‘개 도살업자’인 번쾌가 잡아준 개고기를 즐겨 먹었다. 한나라 창업의 일등공신이 된 번쾌는 개백정에서 제후로 출세한 것이다. 하지만 최고 식객은 중국 청나라 원세개(袁世凱)다. 독일의 빌헬름 2세가 보낸 사냥개를 선물 받고 “맛있게 잘 먹었소이다”라고 답장을 보냈다니 말이다. 다산 정약용도 소문난 개고기 애호가였다. 그는 흑산도에 유배 중인 형(정약전)에게 편지를 보내 “나라면 섬 안을
자벌레, 자벌레가 /변종태 오일시장에서 오백 원에 사 왔다는, 칠순 노모의 고추 모종을 자벌레 한 마리가 깔끔하게 먹어치웠다. 제 몸을 접고 접어 세상을 재던 놈이 제 몸의 몇 배는 됨 직한 고추 모종을 해치우고 나서 다른 모종으로 건너가다가 내 눈에 딱 걸렸다. 먼지투성이 흙밭에 내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이걸 어떻게 죽여줄까를 고민하다가 아, 나도 노모老母의 생을 저렇게 갉아먹었을까. 빼꼼히 열린 욕실 문틈으로 비친 몸을 닦는 노모의 몸뚱이에 내 이빨자국 선하다. 이 시는 화자의 노모가 사온 고추 모종을 자벌레가 갉아먹은 사건에서 비롯한다. ‘자벌레’와 ‘고추 모종’의 관계가 화자와 노모의 관계로 치환하는 발상이 빛난다. 고추를 갉아먹은 자벌레처럼 화자도 어머니를 아프게 하면서 살아왔다는 반성을 하는 순간 화자와 자벌레는 동격이다. ‘이빨자국’은 아프고 여운이 있게 한다. 이 시를 읽으며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 인연을 맺기는 어려워도 이빨자국을 내며 상처를 주기는 쉽다. 그러므로 혈연이든 지연이든 학연이든 관계를 아끼고 살펴야겠다. 때로 마음이 상하는 일이 생길지라도 믿음이 깨져서는
최저임금위원회는 14일 내년 최저임금을 10.9% 인상된 8천350원으로 결정하였다. 이에 주 52시간 근로와 함께 경제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우려와 대선공약인 최저임금 1만원을 임기 내 달성하려면 더 인상했어야 한다는 반론이 팽팽하다. 참여연대는 “프랜차이즈업체-가맹점주 간 불공정 거래구조를 개선하고, 영세상인이 겪는 임대료·카드수수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올해 최저임금 인상의 충격이 아직 남아있는데 내년 인상분까지 합하여 갈등이 커졌다. 논란의 중심은 ‘2020년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기업위주 경제정책을 바꾸는 상징이다. 현 정부는 양극화 해소를 위해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 저소득층의 소득을 늘려주는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아직 뚜렷한 실적은 없고 오히려 지표는 반대로 나타난다. 통계청에 따르면 6월 고용동향에서 취업자 증가폭은 5개월 연속 10만 명 수준으로 금융위기 이후 최악이었다. 또 올해 1분기 소득 하위 1분위(하위 20%) 가계의 명목소득은 월평균 128만6700원으로 지난해 1분기보다 8.0% 줄어 20
고위 공직을 지낸 한 선배님과 약 10년전 점심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분은 ‘내가 이리 오래 살 줄 알았으면 퇴임 후 계획적으로 일을 시작했을 텐데’하고 후회하는 말을 했다. 퇴임 후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목표 없이 살아왔는데 그게 20년이나 되었다고 했다. 그 이후 10년이 또 지났는데 아직도 건강하시다고 한다. 10년 전 그 말씀 때 다시 시작했더라도 늦지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100세 시대를 맞아 직장에서 정년을 맞아 퇴직하더라도 직장생활 했던 기간만큼의 활동 기간이 남게 되었다. 30년 이상 다시 제2의 경제활동을 하게 되어 있는 구조다. 젊을 때 근무했던 직장에서의 경험과 노하우를 살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거나, 새로운 기술을 배워 재취직하기도 한다. 이때 가져야 할 자세는 준비와 계획을 철저히 하여 제2의 마라톤을 달리는 각오로 다시 출발하되, 불확실성을 피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닥치는 대로 살다보면 발전도 없을 뿐더러, 잠재해 있는 많은 리스크를 감당해 나가기 힘들다 본인이 잘 알지 못한 분야의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망하는 경우도 많다. 자영업의 2년 내 폐업비율이 40%나 된다. 과당경쟁
“대회 개막을 코앞에 두고 낯선 선수들과 호흡을 맞춰야 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첫 만남은 서먹했고 말을 트기가 쉽지 않았다 …(중략)… 우리는 금세 가까워졌다.” 17일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의 제20회 한겨레통일문화상을 받은 평창 동계 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이하 단일팀) 남측 한수진의 수상소감이다. 재단이 단일팀에게 상을 준 것은 얼어붙고 메마른 남북관계를 녹이고 일촉즉발의 한반도에 화해와 평화의 정신을 실현했기 때문이었다. 올 초까지만 해도 한반도 정세는 긴박했다. 핵무기를 둘러 싼 북한과 미국의 신경전은 한반도를 전쟁위기로 몰아넣었다. 이 험악했던 상황을 순식간에 전환시킨 것은 평창동계올림픽이었다. 김정은 위원장은 신년사에서 평창동계올림픽의 성공을 기원한다면서 대표단 파견 의사를 밝혔다. 이후 올림픽 경기에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이 참가, 경기결과에 상관없이 세계인들에게 감동을 주고 평화올림픽으로 승화시켰다. AFP통신은 “단일팀이 남북한을 위한 역사를 만들었다. 두 코리아 간 화해를 위한 이례적인 순간을 끌어냈다”고 타전했고 중국의 신화통신도 “경기는 졌지만, 평화가 이겼다”고 보도했다. 특히 개회식에서 남측 선수와 북측
사적 제140호인 독산성과 세마대지의 문화재구역 3만7천985㎡가 추가돼 모두 7만5천254㎡로 확대됐다. 문화재청이 성곽뿐만 아니라 성 내부까지 모두를 포함하는 종합 유적지임을 인식한 결과다. 이로써 오산시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불리는 독산성과 세마대지의 원형 복원 및 보존을 위한 사업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 전망이다. 독산성과 세마대 그리고 정조대왕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임진왜란 당시인 1592년 12월, 이곳에서 권율 장군은 전라도로부터 1만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와 한양으로 가는 길목을 지켰다. 이른 바 세마전법(洗馬戰法)이라는 지혜를 발휘해 3만 명의 왜병들을 퇴각시킴으로써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밑거름이 됐다. 이 지역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또 있다. 인근에 있는 죽미령 전투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서울이 함락돼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았다. 일본에 주둔하던 스미스 부대는 7월 1일 부산, 대전을 거쳐 5일 오산 죽미령에 도착했다. 치열했던 전투로 500 여명 가운데 100여 명이 전사하고, 70여 명이 실종되기는 했지만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키는 성과를 냈다. 죽미령 고개에는 스미스 부대의 희생과 공헌
요즘 아이언맨과 앤트맨과 같은 헐리우드 히어로 영화가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러한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특히 인기가 있는 것은 영웅이 부재한 요즘, 세상을 바꿔놓을 수 있는 영웅을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갈구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의 영웅은 과연 누구일까? 역대 대통령 중 누군가를 지목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경제 발전에 일조한 재계의 유명인물을 지목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민주화 운동가를 지목하는 사람들, 아니면 자신의 부모님을 지목하는 사람들 등, 다들 제각각일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영웅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라는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는 6·25참전유공자의 희생과 공헌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안겨주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 희생한 그들을 ‘영웅’이라고 칭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 영웅들을 역사의 페이지 속에 기록하여 후세들에게 알리고,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국가유공자를 새롭게 발굴하여 그들을 예우하는 것이 현 시대가 요구하는 ‘보훈’이 아닐까 싶다.
정조는 수원 신읍(新邑)을 급하게 만들면서 정치적 반대를 경험한 바 있었다. 그래서 축성을 계획하면서는 미리 준비하고자 비밀리에 설계를 추진할 필요가 있었다. 마침 정약용이 삼년상을 치르기 위해 휴직을 하고 있어 그에게 수원화성의 설계를 맡긴다. 성곽설계를 맡은 다산은 31살로 경험이 적고 성곽의 전문가도 아니었다. 또한 비밀리에 설계를 추진하여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못했기에 중국 병서(兵書)들을 탐독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 병서 중 가장 많이 참조한 병서는 명나라 말기 1621년 모원의가 쓴 무비지(武備志)였다. 다산의 설계는 무비지 성제(城制)편에 나오는 시설들을 대부분 차용하였지만, 유독 공심돈(空心墩)만 배제하였다. 공심돈의 설명은 많은 분량이었는데 이를 배제한 것은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배제된 공심돈은 공사도중 3개나 설치된다. 정조가 공심돈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수원화성 준공 후인 정조 21년(1797) 1월 29일 서북공심돈 앞에서 신하들에게 “공심돈 제도는 우리나라 성제에서 최초의 것이다. 보고 싶은 신하들은 들어가 구경하라”며 자랑하였다. 하지만 동북공심돈 앞에서
장봉문(51·연수원 27기) 수원지검 인권감독관은 경남 남해 출신이며 부산 동고와 동아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사법시험(37회)를 합격한 뒤 초임 검사로 수원지검에서 근무했으며, 15년 만에 수원지검에서 공안부장, 안양지청 부장으로 재직하는 등 수원지검과 인연이 있다. 이어 대구지검 김천지청, 창원지검, 의정부지검, 서울동부지검, 광주지검에서 검사로 지냈다. 부산지검 공판부장, 광주지검 순천지청 부장, 수원지검 강력부장, 서울동부지검 형사5부장, 춘천지검 부장을 거쳐 대구고검 검사를 역임했다.
박봉희(48·연수원 29기) 의정부지검 인권감독관은 화성 출신으로 창원 경상고와 고려대를 졸업했다. 사법시험(39회) 합격 후 인천지검에서 검사로 임관했다. 이어 대구지검 의성지청, 청주지검, 서울중앙지검, 인천지검, 춘천지검 검사를 거쳐 ‘스폰서 검사’ 특검팀에 파견됐다. 수원지검에 부임한 뒤 부부장을 지낸 뒤 서울중앙지검 부부장, 창원지검 공안부장, 부산지검 공안부장, 청주지검 부장, 서울북부지검 공판부장을 역임했다. 이번 인사 때 의정부지검에 처음 배치된 인권감독관으로 부임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