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질 때 가을이 깊어가는구나! 싶었다. 독감예방주사를 맞고 매일 하던 운동들 접은 뒤 산길을 걸었다. 어느 덧 바람은 겨울바람 되어 피부를 자극했다. 세상이 좋아져 옛날 같이 쌀과 연탄걱정이야 덜었다고 하지만, 추위가 닥치면 습관처럼 자본주의에 허기진 서민층과 홀로 사는 사람, 고아원과 양로원 사람들 걱정이 앞선다. 젊은 시절, 태 자리를 뒤로하고 개척정신으로 이곳저곳 헤매며 죽지 않을 만큼 고생을 했다. 그 과정에서 가장 피멍이 든 것은 젊은 영혼의 자존심이었다. 그때 만난 책이 『인생의 선용(善用)』이다. 이 책에서 읽은 한 문장 「행실이 사람을 성공시킨다.」는 것. 이것이 내 가슴 근육을 굳건하게 해 주었다. 홀로 살아가며 어찌 서러움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내가 당하고 겪은 만큼 정신의 면역력이 생기고, 내적으로 강인한 실천력과 지혜의 길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였을까 지금 살고 있는 고장에서 아이들 낳아 교육시키며, 평생 우러를 스승을 만나 인문학적으로 보람 있는 삶을 일궈왔다. 덕분에 평생교육원이나 인재육성개발원에서 강의할 때는 ‘인생의 삼대(三大) 만남’을 유머 있게 말하면서 생각의 눈을 달리하도록 한다. 만남의 첫 번째는 부모와의
숲으로 이어진 길을 걷고자 아파트 뒷문으로 나섰다. 어린이 놀이터에 자리 잡고 있는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은행들이 길가 콘크리트 벽 쪽으로 몰려 쌓여 있다. 가을이면 도심의 길가 가로수 아래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러나 오늘 아침엔 다른 시선으로 씨앗에 대한 생각을 안고 걷게 된다. 그동안 나는 이 은행나무의 잎 지는 모습에만 눈을 주었지 식물로서 생식생장을 위한 씨앗에 대해서는 무심했다. 은행나무는 아름드리나무가 될 때까지 한 해 한 해 버텨오면서 가을이면 후대를 위한 나무를 생각하며 열매 맺어 지상으로 내려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땅은 일찍부터 은행나무 열매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사방의 땅이 온통 콘크리트로 되어 있어 씨앗이 비집고 들 틈이 없었다. 그래도 은행나무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본능적으로 ‘행여나’하고 열매를 내려 보냈을 것이다. 나무는 그 열매가 씨앗으로 움틀 수 없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이러한 자연 현상과 악한 사회 환경 속에서 결혼하지 않겠다는 청년들의 의식이 싹튼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결혼을 한다 해도 아이는 갖지 않겠다는 생각 또한 그 영향이 아닐까 싶었
때가 때인지라 문단의 행사도 많고 문학상을 위한 심사도 있기 마련이다. 때문에 어젯밤에는 ‘〇〇수필문학상’ 심사를 하게 되었다. 세 사람이 하는데 심사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수상자를 선정하기 위해 응모작을 깊이 있게 살펴보았다. 그런데 수상작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적 정성과 ‘수필은 느낌의 시’라는 글맛이 부족하여 수필의 미래가 염려스러웠다. 김지하 시인의 타는 목마름으로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라는 정신에는 못 미쳐도 누가 보아도 수상작의 무게 중심은 느껴져야 되는 법. 심사를 미루고 한 잔 두 잔 목울대로 넘긴 막걸리에 ‘안마시면 안 되냐’는 제정신의 쓴 소리를 듣기도 했다. 돌아와 문을 따고 아파트 거실로 들어서니 냉장고 바람 같은 차가움이다. 불 밝히고 거실 의자에 앉으니 누군가가 그리웠다. 손을 붙잡고 이야기는 못한다지만 전화 통화라도 하고 싶었다. 주변에는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부산 친구와 서울에 있는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허허한 가슴의 술기운을 덜어낼 수 있었다. 김현승 시인은 가을에는 기도하는 자신에게, ‘겸허한 모국어로 채워달라고’ 했다. 견고한 고독 속에 살면서 기도하고 모국어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찌 김현승뿐이겠는
나에게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숲 속으로 가라’는 말과 같다. 집 근처에 물기 마르지 않고 사철 푸른 산 속 숲이 있어 아침저녁으로 긴 시간 들이지 않아도 숲의 품에 안기어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의 숲속 공기는, 우선 콧속을 통해 호흡기와 폐를 맑히며 냉기 어린 맛감각이 나의 두뇌를 일깨워 사유하고 상상하며 정리하게 한다. 그런 뒤 귀한 문장을 얻어내는 길을 닦아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달 초순이었다. 체육회관 3층 헬스장에서 달리기 운동을 하던 중 유리창 밖으로 ㅇㅇ초등학교 정문 현수막을 보게 되었다. 운동을 멈추고 더 가까이 가서 보았다. “서이초 선생님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합니다. 선생님께서 남기신 그 뜻을 잊지 않겠습니다. ㅇㅇ초등학교. 49제를 맞이하여”라고 검은 천에 흰 글씨로 쓰여 있었다. 사노라니 못 볼꼴을 본 것이다. 초등학교가 장례식장도 아니요 교사가 무슨 독립운동가도 아니며 역전의 용사도 아니다. 그런데 왜 목숨을 버렸을까. 어린이들은 한 생명으로서 푸릇푸릇 움 돋아 가정에서 핀 꽃 학교라는 묘판으로 옮겨져 교정에서는 사랑의 함성 가득하고 행복하게 웃는 어린이들 모습으로 평화로워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교문에는 검
계절이 표정을 바꾸는 9월의 아침이다. 어린 철 이맘때쯤이면 어머니는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하셨다. 더불어 ‘소지(掃地)황금출’이라고 마당을 부지런히 쓸고 화장실을 정갈하게 해야 하며, 두엄을 소중히 관리해야 이듬해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다고 말하셨다. 이때의 분위기가 눈앞에 갈아들면 송강의 시조 ‘형우제공(兄友弟恭)’이 읊어진다. 형아 아우야 네 살을 만져보아라/ 누구에게 태어났기에 모습조차 같은가/ 한 젖 먹고 길러났으면서/ 딴마음 먹지마라. 백성들을 위한 ‘훈민가’의 하나이지만 형제 간 우애를 더 이상 표현할 길 없게 비유적이고 직설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이때의 부모는 부모답고 형제는 형제다웠다. 왜 어머니는 당신의 젖으로만 길렀는지를 굳이 밝히지 않았어도 어머니는 예수와 같은 희생의 대명사이었다. 돌이켜보면 태풍 없는 여름 없고 인생의 태풍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통과하게 된다. 금년 여름도 카눈 태풍에 고통당한 사람이 많았다. 더운 여름살이가 갈수록 험난한 산길 같다. 인터넷신문에서 뭘 찾다가 ‘잼버리의 불편한 진실’과 ‘복지부동이 부른… 잼버리의 진짜 원인’을 읽게 되었다. 전북 부안 새만금에서 열린 ‘2023 세계 스카우트’는 성공적이지 못한
나도 모르게 눈이 떠졌다. 참으로 가벼운 몸 컨디션이다. 그동안 답답하고 무겁고 우울한 느낌이었는데 오랜만에 느껴보는 아침 기분이다. 어젯밤 잠들기 전 기도하는 마음으로 약 먹고 물 마시고 몸을 살폈다. 속으로는 가끔 ‘살고 싶지 않다는 말 내뱉으면서 독한 인생길을 많이 걸었다.’고 푸념도 했다. 어제도 그런 날이었다. 뜨거운 물 커피포트에 담고 생강차 봉지를 넣어 뚜껑을 닫은 채 곁에 두고 마셨다. 약국에서 지어준 어깨통증 약과 감기 몸살 약은 30분 차이를 두고 삼켰다. ‘이게 사는 것인가? 이렇게도 사는 것이구나.’하고 혼자 뇌까렸다. 팔과 가슴에서는 계속 땀이 흘렀다. 지구의 온도는 36도라고 한다. 살아오는 동안 몸이 약해 선풍기와 에어컨을 멀리하면서 체질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어젯밤에는 살아남기 위해 한 시간을 돌렸다. 내가 내 몸을 위해 이렇게 예의 갖춰 정성스럽게 약을 복용하면서 건강이 회복되길 소원해 본 일도 많지 않았다. 그래 내가 내 육신에 대한 예의도 있을 것이다. 내 몸의 허전함과 영혼의 그리움이 있을 것이다. 스스로 위로할 시간이 지금이겠지- 싶기도 했다. 50년 전 직장 동료와 지금껏 벗하며 지내왔다. 그런데 얼마 전 나는 그를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 나…’ 이것은 노래 가사이다. 김용호 작사 이시우 작곡 김정구 노래로 ‘눈물 젖은 두만강’이란 대중가요의 후렴이다.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시려나?’ 이 얼마나 간절한 소망과 애타는 기다림에 목이 메었을까. 나 또한 총각 때 애타게 불렀다. 꿈을 이루지 못한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셀프서비스로 부르기도 했다. 학교 졸업하고 기다리는 영장은 나오지 않았다. 시골에서 부모님과 함께 지내며 답답한 가슴 죄어드는데 사랑도 직장도 돈벌이도 되는 것이 없었다. 마치 하늘 없이 사는 것 같았다. 그럴 때 뒷산에 올라 목이 찢어지도록 이 노래를 부르곤 했다. 지금 일자리가 없는 청년들은 그 당시 나와 같은 심정으로 님을 부르며 그리워 할 것이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는 건강한 꿈(님)이 절대적이다. 1980년 11월 ‘왕문사’에서 낸 한용운 선생의 '님의 침묵'이란 책 ‘군말’에 적혀 있는 내용이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衆生)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치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비가 멎으니 먼 산은 비구름 안개 속에 산수화의 묵선인 듯 희미하다. 산도 낯가리고 쉴 시간이 필요한가 보다. 어렸을 적 쪼들리는 초가지붕 아래서 비가 오는 날이면 어머니는 동백기름 바른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낭자머리하고 바느질하셨다. 옆에서 바느질하는 어머니를 찬찬히 바라보고 있는 내게 어머니는 혼잣말이듯, ‘잠을 자야 꿈을 꾸고 꿈을 꿔야 임을 보지’라고 하셨다. 그때 그 말씀을 왜 하셨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엉뚱스럽게 지금도 그 말씀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는 나의 언덕이요 뿌리였기에 기대고 싶은 것인가! 나이가 늘어갈수록 기대고 싶고 불러보고 싶은 ‘어머니’라는 이름이다. 작가로서 가장 힘든 일은 나를 드러내는 일이다. ‘인생의 미학, 수필의 미학’을 생각할수록 그렇다. 수필은 문학으로서 체험과 정서를 진솔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데 있어 글을 쓰려고 시도할 때마다 살가죽을 벗겨내고 자존심의 본적지를 건드리는 고통이요 두려움이다. 몸과 마음 그리고 삶을 섬세하게 다뤄야 할 때가 되었다. 생각 깊게 마음의 방향을 점검해 보는 이유이다. 그러면서도 ‘수필은 자기 삶과 철학이 탑재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평론가의 말을 떠올리면서도 바보같이 꿈 이야기
상갓집에서 문상하고 오는 것만이 이별은 아니다. 김수영은 어느 날 잘 나가는 소설가와 탐탁지 않은 모습으로 헤어져 돌아오다 교통사고를 만나 세상을 떠났다. 시골 처녀가 도시의 공장으로 가서 돈을 벌기 위해 부모 몰래 가출한 것도 이별이고, 아르바이트해서라도 공부를 하겠다고 가족 곁을 떠나는 것도 이별이다. 그녀의 심장 수술 뒤, 저런 병이 있으니 내가 결혼하여 끝까지 지켜주는 게 사랑이라고 다짐했던 첫 직장 애인은 끝내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 뒤 무심히 정들어 아흔 살까지는 살 것 같았던 가족도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떠나는 이별도 경험했다. 주위에서 누가 아프다고 하면 며칠 밤을 설치게 된다. 후덕하지 못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세월도 보낼 만큼 보냈다. 남 앞에서 수필창작을 위한 강의를 하면서 문학과 삶을 이야기하는 동안 가난할 줄 아는 사람으로서 어쩌고… 하면서 인생 학위 논문이라도 지닌 듯 말하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그 모두가 이별하는 과정 속의 일이요 바람과 구름이 지나가는 소리였으며, 잠시 머무는 형상이었다. 그런데도 영혼의 이웃 같고 인문학적 혈액형과 정서적인 칼라가 닮은 친구가 입원한다면 남의 일 같지 않다.
쉰 살이 되면 인생에서 쉰내가 나는 것인가? 했었다. 쉰 살이 지나고 정년 한 지도 십 수년이 되었다. 우주적인 고독을 안고 홀로그리움과 두려움에 서서히 길들여지는 것일까. 조그마한 거리낌에도 밤잠을 못 이루고 괴로워했다. 처신에 있어서도 멧돼지처럼 대담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생각하며 삼갔다. 이 세상 ‘천재는 99%의 노력과 1% 재능이다.’고 생각하며 오로지 능력과 노력으로 살아야 한다고 자신을 닦달하며 빈 틈 없이 살았다. 정다운 부모, 한 사람의 친형제를 그리워하며 평생을 걸었다. 이제는 요즘 젊은 세대들의 개그 같이 성공은 ‘1%의 재능에 99%의 돈과 백으로 얻어진다.’는 말을 긍정하며 허허 허! 하고 웃는다. 새벽 다섯 시 반, 인간의 체온을 느끼지 못한 채 잠에서 깨어나면서 ‘오늘은 또? …’ 하는 생각으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동물원 길을 가고 있었다. 아침 공기는 상쾌했다. 30대 후반 젊은 부부가 간편한 복장으로 달리고 있다. 건강한 부부의 모습이 보는 눈을 즐겁게 한다. 좀 더 가니 구청의 느린 청소차가 도로의 먼지를 흡입하여 포장도로를 깨끗이 닦아놓고 있다. 공원으로 가는 대학로 숲길은 오래된 플라타너스가 시골 동구 밖 느티나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