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조선을 구해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긴 세월 폄하돼온 ‘선비정신’에 대한 재평가 이야기가 요즘 등장하고 있군요.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은 것까지는 좋은데, 사회를 개혁해내기는커녕 교조적 맹종으로 반상(班常)의 부조리를 심화시킨 게 문제였죠. 나라를 패망시킨 죄로 ‘선비’는 현대인들에게 그리 좋은 이미지를 갖지 못하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물론 일제강점기 일본의 교활한 모함도 한몫하긴 했죠. 국리민복(國利民福) 추구는커녕 오직 권력 연장에만 눈이 어두운 작금 정치꾼들의 소인배 행각을 지켜보다가 문득 ‘선비정신’ 덕목이 떠올랐어요. 학식과 예절로 지키는 지행합일(知行合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두려워하지 않는 기개와 불요불굴(不撓不屈)의 정신력, 공적인 일을 앞세우는 ‘선공후사(先公後私)’,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하라는 ‘박기후인(薄己厚人)’ 등이 선비정신의 요체이지요. 강한 것은 억제하고 약한 것은 부양한다는 ‘억강부약(抑强扶弱)’, 남보다 먼저 근심하고 남보다 나중에 즐거워하라는 ‘선우후락(先憂後樂)’, 권력을 가져도 재화를 탐내지 않는 ‘청빈검약(淸貧儉約)’ 등도 있어요. 이런 교훈에 우리 정치권 인사들을 견줘보면, 안타깝
미래학(未來學)은 절대적인 실증이 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무책임한 엉터리 학문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요. 그러나 선진국일수록 ‘미래 연구’가 활발한 흐름을 보면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일은 지극히 현실적인 탐구 영역이 틀림없어요. 미래사회를 시사(示唆)하는 변화 조짐을 찾아내려는 학문이 미래학이라면 넓은 의미에서 ‘미래학은 곧 현재학’이라는 개념도 오류는 아닌 듯해요. 그러나 인류의 미래 전망은 결코 장밋빛이 아니에요. 발목을 잡는 가장 심각한 한계는 급격한 환경파괴지요. ‘산업 만능주의’에 빠진 인류는 지구촌의 자연환경이 급속하게 피폐해지는 현상을 장기간 무시해왔어요. 기후 변화가 초래하는 생존환경 황폐화, 산업 혁명이 불러온 대기오염 같은 치명적 변화에 대한 대응에 여전히 마지 못해 흉내나 낼 정도로 소극적인 게 사실이지요. 핵전쟁 위협은 또 어떤가요. 지난해 발발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는 지구촌이 여전히 위태롭기 짝이 없는 화약고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잖아요. 침략국 러시아를 상대하는 일에도 나라마다 다른 셈법이 작동하니 정의냐, 불의냐의 가치관도 완전히 헝클어졌지요. 러시아의 ‘핵 공격 위협’을 귓전으로도 듣지 않는 듯한 국제사회의 분위기
‘움푹 꺼진 박에 원숭이가 손가락을 펴면 손이 들어갈 정도의 구멍을 파고 바나나를 넣은 다음 나무에 묶어둔다. 나무에서 내려온 원숭이가 박 안에 있는 미끼 냄새를 맡고는 손을 넣어 움켜쥔다. 그때 사냥꾼들이 나타난다. 주먹을 펴고 미끼만 놓아버리면 손을 뺄 수 있는데, 욕심 많은 원숭이는 미련하게 바나나를 움켜쥐고 있다가 잡히고 만다.’ 전설 같은 고대의 ‘원숭이 사냥법’이에요. 원숭이가 사냥꾼의 속임수에 당하는 모습을 지켜본 다른 원숭이들이 교훈을 얻는다면 같은 속임수는 통하지 않을 텐데요. 안타깝게도 원숭이라는 동물의 지능은 그 한계를 넘지 못한다네요. 역사에도 전설 같은 게 있어요. 플러스 게임을 하지 않고 어리석은 마이너스 게임을 하다가 망한 이야기가 고비마다 수두룩하지요. ‘원숭이 사냥법’ 얘기와 ‘뺄셈정치’의 공통적 본질은 바로 탐욕이에요. 탐욕이 앞서는 눈으로는 한 치 앞도 못 보게 되는 법이지요. 오는 3월 8일 전당대회를 앞둔 집권당 국민의힘의 당 대표 선거전이 화끈하게 달아오르고 있군요. 온통 당심 지지율 수위급에 있는 나경원 전 원내대표의 출마 여부 문제가 뉴스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네요. 그런데 ‘친윤(친윤석열)’이니 ‘반윤(반윤석열)’이
-생과 사의 경계에서 분투하는 이들 옆에서 일부 시민들이 구급차의 붉은 경광등을 빛 삼아 떼 춤을 췄다. 사고가 난 걸 알면서도 그들은 자신의 유흥을 멈추지 않았다.- 한 신문에 실린 칼럼 한 대목이 끔찍한 이태원 참사를 기억 속에서 다시 소환하네요. 그때 거기에 악마들이 있었군요. 어쩌면 악마는 우리에게서 그리 멀리 있는 게 아닐지도 몰라요. 흑토(黑兔) 새해가 시작됐지만, 세상이 딱히 달라질 것 같지 않은 정초예요. 이 시대 최고의 시사 논객 중 한 분인 전북대학교 강준만 교수가 지난 연말 ‘퇴마 정치’라는 제목의 새 책을 냈군요. 진보 진영에 대한 논리정연한 비판을 서슴지 않아 온 강 교수는 『윤석열 악마화에 올인한 민주당』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에서도 민주당에 대해서 혹독한 쓴소리들을 늘어놨네요. 강 교수는 일찍이 다른 저서에서 “문재인 정권의 내로남불 사례를 일일이 정리하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말았다”며 “거의 모든 게 내로남불이었기 때문”이라고 맹타한 바 있어요. ‘퇴마 정치’에서 강 교수가 쓴 표현 중에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윤석열 악마화’는 사실상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의 ‘내로남불’과 후안무치를 폭로하는 부메랑이 되고 말았다”고한 표현이군
…어머니, 지금 뭐하시나요./꽃구경은 안 하시고 뭐하시나요./솔잎은 뿌려서 뭐하시나요./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너 혼자 돌아갈 길 걱정이구나./산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가수 장사익이 불러서 심금을 울린 「꽃구경」이라는 노래예요. 버려지는 순간까지 자식 걱정만 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눈물을 삼키기 힘든 이 노래 가사는 김형영 시인의 「따뜻한 봄날」이라는 제목의 시랍니다. 고려장(高麗葬) 설화가 소재이지요. 고려장은 고려 시대에 나이 든 부모를 다른 곳에 버려두고 오던 풍습이 있었다는 설화이자 도시 전설이에요. 그런데 연구자들이, 워낙 굶주렸던 시대에 벌어진 단발적인 사건일지는 몰라도 ‘고려장 풍습’ 얘기는 정설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네요. 더욱이 유사한 설화들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각양각색 전해온다는군요. 먹고살기 힘들다고 부모를 지게로 져서 산에다가 버리는 패륜이 최소한 우리 조상들 시대의 풍습은 아니었다는 거죠. 지난 2021년 전국에서 고독사(孤獨死)한 인원은 모두 3378명으로서 전년보다 3.0% 늘었다네요. 고독사란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과 단절된 채 홀로 살다가 자살·병사 등으로 외로이 임종을 맞고 일정 시간이 흐른 뒤에 시신이 발견되는
조선시대 사색당파를 적폐로만 보는 시각은 ‘식민사관’의 악영향이라는 주장이 있어요. 선조에서 영조까지 180년간의 당파 간 논의를 정리한 이건창의 ‘당의통략(黨議通略)’엔 순수하게 당쟁에 연루되어 죽은 사람은 79명뿐이라고 적고도 있죠. 그러나 걸핏하면 상대 당파 유력자의 죄목을 들어 “목을 끊어야 한다”고 악악대는 조선왕조실록 기록은 참으로 짜증 나는 장면들이죠. 최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서 민주당이 단독 처리한 공영방송 지배구조개선안을 놓고 잡음이 커지고 있네요. 현재 9명(MBC)·11명(KBS)인 공영방송 이사회를 21인 규모의 운영위원회로 개편하고, 100명 정수의 ‘사장후보국민추천위원회’를 신설하기로 한 대목이 눈에 띄네요. 얼핏 보기에는 그럴듯해요. 그런데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임명 제청할 후보를 최종결정하는 운영위원회 구성에 분식(粉飾) 술수를 교묘히 감추어뒀군요. 지난 정권 5년 동안 꼭 해야 할 ‘방송개혁’은 안 하고 독점구조를 실컷 즐긴 민주당 아닌가요? 그러더니 야당이 되자마자 부랴사랴 흑심 가득한 개정안을 쏙 내밀어 상임위에서 단독 통과시키다니, 이건 그저 또 하나의 속 보이는 내로남불 행각일 뿐이에요. ‘공영방송 지
넷플릭스 영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재미있게 본 기억의 연장선상에서 ‘수리남’도 다 봤어요. 가만히 놔두면 다음 편으로 넘어가게 돼 있는 시스템 덕분에 전편을 다 보는 일은 어렵지 않더군요.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사이비 목사로 위장한 마약왕 전요환 역 황정민의 소름 돋는 악역 연기였지요. 악독한 마약상과 목사라는 이중인격적 연기를 어쩌면 그렇게 실감 나게 소화하는지, 역시 황정민이구나 하는 생각을 사뭇 했네요. 살인도 서슴지 않는 악마적 마약상 전요환이 눈가림 사목 활동을 하면서 “할렐루야!”를 외치는 모습은 참으로 천연덕스러웠어요. 문득 떠오르는 것은 사탄이 목사의 영혼에 빙의(憑依)되면 바로 저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어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감동적 자애 사상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소명을 맡은 성직자들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사탄이 몸을 빌려 장난치기에 딱 좋을 수도 있겠다 싶었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얼마 전 우리는 사탄에 빙의된 타락한 성직자들을 정말로 보고야 말았지요. 김규돈 대한성공회 신부가 페이스북에 “대통령이 탄 전용기가 추락하길 바라마지 않는다”는 글과 함께 전 국민이 함께 추락을 기원하자고 상상을 초월하는 선동을 했지요.
온 국민을 충격과 슬픔에 빠트린 이태원 압사 참변의 애도 기간이 지나자마자 정치권의 죽기살기식 정쟁이 불꽃을 튀기기 시작했네요. 여야 정당이 쏟아내는 악담을 듣노라면, 이 사람들에게 정말 이태원에서 횡액을 당한 희생자들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워요. 앞서서 책임을 져야 할 쪽은 어떻게 하면 악재를 극복해 볼까 전전긍긍이고, 야권은 때 만난 듯이 물어뜯는 하이에나 떼와 조금도 다르지 않군요. 일단 드러난 사실만으로 논하더라도, 이태원 비극은 안전관리 시스템이 완전히 망가진 국가의 계통 부실이 빚어낸 처참한 결과물이에요. 국민 안전에 대해서 무한 책임을 진 윤석열 대통령과 정부 당국자들은 어떻게든 민심이 용납할 수준의 책임 판단에 있어야 할 거예요. 작금의 우리나라 정치 상황이 워낙 복잡하다 보니 대형 참사를 다루는 일도 정상적인 과정으로 흘러가지 않네요. 뭐든 다 끌어다가 음모론 밧줄로 얽어놓고 삿대질부터 해대는군요. 천박한 ‘아무 말 대 잔치’처럼, 온갖 협잡을 다 동원하여 참사의 원인을 상대방에게 찍어 붙이는 비이성적 선동질에 여념이 없네요. 대형사고 원인을 놓고 현 정권 탓이니, 직전 정권 탓이니 하고 힐난하는 행태는 안타깝게
미사일이 마구 날아다니고, 총알이 우박처럼 쏟아지네요. 청백 군사들이 호시탐탐 상대방의 심장을 노려 일격필살의 승기를 잡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날뛰는 모습이 험악하군요. 이러다가 정말 큰 변고를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공포가 수시로 엄습해요. 러시아 침공으로 참혹한 전장이 돼버린 우크라이나 풍경이냐고요? 아니에요. 최근 여야 정쟁이 깊어지고 있는 우리 정치권 이야기에요. ‘적폐 청산’은 사전적으로 ‘과거의 쌓아온 폐단을 없앤다’는 용어예요. 그런데 우리 국민은 지난 몇 년 사이에 살짝 다른 의미로 느껴왔지요. 문재인 정권이 내세운 ‘적폐 청산’ 구호는 헌정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 국면과 맞아떨어지면서 반론의 여지가 좁았어요. 그 시절 속절없이 당해야 했던 보수 야당은 사뭇 ‘정치보복’이라며 부글부글 끓었지만요. 지난 3월 대선으로 정권교체가 된 이후 공수(攻守)가 뒤바뀐 정치권은 처음부터 시커먼 전운(戰雲)을 피워올렸지요. 대선 전부터 각종 논란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했던 야당 대표를 겨냥한 사법기관의 수사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네요. 후보 경선 때 불거진 의혹을 중심으로 공세가 이뤄지고 있으니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겠군요. 이번에는 민주당에서 ‘정치보복’,
‘철인정치(哲人政治)’는 절제를 아는 사람이 경제를, 용감한 사람이 국방을, 지혜로운 사람이 정치를 맡아야 한다는 개념이죠. 플라톤의 이 주장은 선동에 휘둘린 어리석은 다수결에 의해 스승 소크라테스가 아무 잘못도 없이 죽음을 맞은 충격과 슬픔의 결과물로 해석되곤 해요. 실제로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자유’와 ‘평등’을 무절제한 삶을 용인하는 개념으로 여기는 치명적 허점을 드러낸 게 사실이었어요. 역사 속에서 무지한 다수결이 빚어낸 중우정치(衆愚政治)의 비극은 그 사례가 귀하지 않아요. ‘공산주의’가 지구촌에 불러온 해악은 그럴듯한 어떤 이념이 궤변의 옷을 입고 민중을 현혹할 때 중우정치가 어떻게 만개하는지를 입증한 대표적인 사례에요. 히틀러가 탁월한 선동술로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도 공식 집계로만 5646만 명의 인류를 죽음으로 몰고 간 중우정치의 참혹한 산물이었죠. 고대 삼국시대에 고구려의 제가(諸加)회의, 백제의 정사암(政事巖)회의, 신라의 화백(和白)회의 등의 국가 대사를 결정짓던 회의제도가 있었어요. 이 중 화백회의만 유일하게 만장일치제(滿場一致制)를 채택했지요. 화백회의의 결정으로 25대 진지왕(眞智王)이 퇴위했다는 기록도 있으니 가장 막강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