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방송국의 심층 프로그램이 촉발한 ‘정인이 사건’에 대한 논란이 새삼스럽게 신년 정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네요. 고작 생후 16개월 된 아기 정인이가 악마 같은 양모(養母)에게 짓밟혀 사망한 지 80여 일이 지난 다음에야 온 사회가 들고일어난 시끌벅적 난리가 몹시도 불편합니다. 왜냐면, 이렇게 들썩들썩 법석을 떨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두 돌아서서 까맣게 잊어버릴 거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지요. 눈웃음이 예쁜, 천사 같던 아기 정인이는 과연 누가 죽인 걸까요. 정인이는 2019년 6월에 태어났지만, 친부모 양육이 어려워 그해 7월 일단 위탁모에게 맡겨집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20년 2월에 입양단체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는 새엄마 J모에게 입양됩니다. 그런데, 불과 1개월 이후부터 새엄마는 장시간 아이를 빈집에다 버려두는 등 16차례나 방임합니다. 비극은 잇따라 일어납니다. 5월 25일 정인이의 몸에서 멍 자국을 발견한 어린이집 교사가 아동학대 의심 신고를 합니다. 하지만 경찰은 잘 키우라는 당부만 하고 보냈습니다. 6월 29일 무더운 날 승용차 안에 방치된 정인이를 발견한 시민이 신고했지만, 이번에도 경찰은 그냥 넘어갑니다. 9
…남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여 찬성을 표했다. “자자. 첫 잔은 스트레이트. 첫 잔부터 아이스 샤워를 시키는 것은 우리 로얄 살루트 34세 황제 폐하께 대한 불경죄에 해당합니다. … 청담동에서 김미리가 안내해서 간 호화 빌딩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7층에서 내리자 고급스러운 흑경(黑鏡) 타일로 장식된 외양을 갖춘 업소가 나타났다. 크지 않게 붙어 있는 ‘아프로디테’라는 상호의 디자인이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김미리를 따라 들어간 내부의 색다른 인테리어가 윤희를 압도했다. 출입문 안쪽 벽면을 가득 채운 보티첼리의 그림 ‘비너스의 탄생’이 주황색 조명을 받아 휘황하게 빛났다. 질감 양감이 다 살아있는 것으로 보아서 제대로 모사한 유화 같았다. “미리 씨 왔어?” 귀부인 태가 나는 양장차림의 중년 여인이 서 있었다. 미인인 데다가 목걸이 귀걸이에서 호화스러운 분위기가 풍기는 여성이었다. “예. 사장님. 안녕하셨어요?” 여사장이라는 부인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색안경 너머로 윤희를 뜨거운 눈길로 찬찬히 훑었다. 김미리가 얼른 양쪽을 번갈아 보며 소개했다. “소개할게요. 여기는 저의 동료 연극배우 김윤희 씨. 그리고 이쪽 분은 이 아프로디테 대표이신 비너스
…거기까지 듣고 있던 윤희가 돌연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그리고는 외쳤다. “불결하고 천박해요! 언니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어요.” 그러나 이민지는 흥분하기는커녕 쓰디쓴 미소를 띠면서… 밤새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밥 한 숟가락도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 텔레비전 아침 뉴스에서 경찰서 조사를 받고 나오는 백두 단장과 최현규를 보았다. 수갑 찬 손목을 까만 수건으로 둘둘 말아 가린 그는 초췌한 얼굴로 카메라 앞에 섰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의 눈빛이 빛난다는 게 신기했다. 그는 예의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놀랍게도 신념에 찬 어조를 잃지 않고 있었다. “오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무죄라고도 주장하지도 않겠습니다. 모든 진실은 제 예술 안에 있습니다. 모두가 예술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벌인 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예술이 뭔지 아는 자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쯤에서 경찰은 기자들을 가로막고 백 단장을 호송 차량으로 이끌고 가서 머리를 누르면서 태웠다. 이어서 최현규가 나타났다. 언제부터 피해자에게 범행을 저질렀습니까? 몇 번이나 그랬나요? 기자들이 잇달아 소리쳐 물었다. 그러나 그는 얼굴을 푹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호송차로 걸어가
…윤희는 기습적으로 자신의 입술을 최현규의 입술에 갖다 댔다. 그가 깜짝 놀라 몸을 옴츠렸다. 윤희가 입술을 잠시 떼고 짧게 “진짜로 해요!”라고 말했다. 그제야 최현규도 끌어안은 손에… “아아, 이제 나는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눈을 떠도 어른거리고, 눈을 감으면 더 잘 보이는 그녀의 모습. 그녀를 만나지 않고는 더 살아갈 수가 없겠구나.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되었나.” 김우진 역을 맡은 최현규의 매력은 대단했다. 굵고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속절없이 빠져들게 했다. 그 음성에는 강한 중독성을 부르는 마력 같은 것이 있었다. 상대방이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배려하고, 때로는 전혀 감정이 상하지 않게 허점을 일러주는 자상함도 갖추고 있었다. 연출을 맡은 한상석은 연극 공연 계획을 대폭 축소했다. 공연일도 단 일주일간으로 줄였다. 이민지가 만년의 윤심덕 역을 맡아 나폴리를 배경으로 펼치려던 후반부는 삭제됐다. 윤희와 최현규 두 사람이 끌고 가는 러브스토리 무대로 바뀌었다. 동경에서 레코드 취입을 마친 윤심덕이 김우진을 만나 치밀한 계획을 짜서 현해탄에서 동반자살한 것으로 거짓을 꾸며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스토리가 중심이 됐다. 관부연락선 갑판장 역
…윤희에게 달려들어 마구 앞섶을 풀어헤쳤다. 소리를 치며 있는 힘껏 떠밀었다. 뒤로 나자빠졌다가 일어나는 남자의 얼굴이 갑자기 백두 단장으로 바뀌었다. 기겁을 하고 소리치다가 잠이 깼다.… “나 좀 서울 갔다가 올 테니까, 연습 잘 하고 있어.”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이민지가 윤희에게 말하고는 서둘러 구두를 신었다. 표정이 심각했다. 무슨 일이 있는지 왜 그러는지 묻고 싶었지만, 윤희는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엉거주춤 대문 밖까지 따라나서서 이민지를 배웅했다. 그녀는 대문 앞 공터에 세워 둔 승용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빠른 속도로 골목을 빠져나갔다. 김미리가 사고를 친 모양이야…김도숙 기자와 대화를 나누고 들어온 한상석이 이민지에게 던진 말이 뇌리에 감돌았다. 한상석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배우들을 리드하며 오후 연습을 시켰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지지 않았다. * “국내 유명 극단 카프카 소속의 한 여배우가 소속 극단 단장으로부터 수년 동안 성폭행을 당했다며 자살을 암시하는 메시지를 남기고 잠적해 경찰이 긴급 수배에 나섰습니다. …” 식탁에 모여앉아 저녁밥을 먹으며 텔레비전 뉴스를 보던 단원들이 모두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김미리가 쳤다는
…김도숙을 보내고 돌아온 한상석의 얼굴이 사색이 돼 있었다. 이민지가 놀라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뭔 일 있어요?” “김미리가 사고를 친 모양이야.” “김미리가요?”… “막은 넉 달 뒤에 오른다. 빡빡한 일정이지만 최선을 다해주길 바란다.” 백두 단장의 말은 짧고 단호했다. 사무실에 모여앉을 때부터 단원들의 분위기는 탱탱한 긴장이 넘쳤다. 이민지는 다른 일정이 있다면서 나오지 않았다. 중년 윤심덕 역 주연엔 이민지, 예비주연은 이성희가 맡도록 발표됐고, 젊은 윤심덕 주연에는 김윤희, 예비주연으로 송현아와 김미리가 차례로 지명됐다. 김우진 역에는 윤희의 예상대로 최현규가 주연, 박정욱이 예비주연으로 지명됐다. ‘화가와 여간호사’에서 화가 역을 맡았던 한상석은 조연출을 맡게 된다고 발표됐다. 그밖에 10여 명의 단역 배역이 정해졌다. 배역 발표를 마친 백두 단장은 휭하니 사무실을 나갔고, 사무실 분위기는 술렁대기 시작했다. 윤희는 극단에 들어온 지 며칠도 되지 않아 주연으로 발탁된 자신에게 쏟아지는 질시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명단을 발표할 적에 심하게 일그러지는 김미리의 표정을 보았다. 솟아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한 그녀는 백두 단장이 나가자
…윤희는 단원들이 다 모인 소극장 무대 위에서 ‘사의 찬미’를 불렀다. 희로애락을 과하게 보여주는 것은 빵점짜리 배우야. 관객들은 울지 않는데 배우가 먼저 우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별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구나, 그치?” 파가니니 홀 탈의실에서 옷을 챙겨입은 뒤 이민지는 윤희를 호텔 2층에 있는 모모야마라는 일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기모노 차림의 여종업원에게 회 초밥 정식으로 주문을 마친 이민지가 생각지도 못했던 누드모델 여파로 정신이 아직 얼떨떨한 윤희를 향해 물었다. “네.” 윤희는 이민지가 어떤 사람인지 더욱 궁금했다. “나는 네가 정말 신기해. 처음 보는 순간 너의 내면에 엄청난 잠재력이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는데, 틀리지 않았어. 오늘 누드모델 연기 아주 좋았어. 첫 경험이었는데, 그렇게 해낼 수 있다는 것은 네가 타고난 연기자라는 증거야.”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디에서 살다가 왔니? 부모님은 뭐 하시는 분들이시니?”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윤희는 잠시 생각을 다듬었다. 그리고 말했다. “동천시에서 왔어요. 부모님들은 지난해 교통사고로 두 분 다 돌아가셨고요. 고등학교 연극반에서 활동했어요. 세상에 혼자 남게 돼서, 연극배우가 되
…가면을 쓴 윤희가 가운을 이민지에게 맡기고 발가벗은 몸으로 정물대에 올랐다. 화가들이 신음 같은 감탄을 연발했다. 정물대 가까운 곳에서 이민지가 손짓 몸짓을 섞어가며 작은 소리로 윤희의 동작을 리드했다.… ‘윤희. 잘 잤어? 이따가 오후 두 시에 극단사무실로 데리러 갈 테니까 거기서 기다려. 어제 산 원피스 입고 나와. 알았지?’ 마치 우주여행에서 돌아온 듯한 들뜨고 야릇한 기분으로 인해 밤잠을 설쳤다. 새벽 나절에 잠시 눈을 붙였다가 깨어난 아침에 이민지로부터 휴대전화 문자가 날아들었다. 이민지. 이 여자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엊그제 스크랩에서 본 자료 속에서 그녀는 극단 카프카에서 주연을 도맡아 하는 대단한 배우였다. 백두 단장과는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배우라고도 했다. 대개 연극배우들은 어렵게 산다고 들었다. 어쩌다가 TV나 영화에 진출하여 스타반열에 오르는 배우도 있지만, 나머지 연기자들은 곤궁한 처지를 면치 못하면서 오직 예술가의 열정 속에 살아간다고 했다. 그걸 알려준 사람은 윤희에게 연극을 가르쳐 준 장시욱 선생이었다. 그런데 이민지는 그렇지 않았다. 그 으리으리한 고급 아파트와 외제 승용차는 뭔가. 윤희를 마치 피붙이처럼 살피려 들기 시작
…“얼굴 좀 펴라. 부담 가질 필요 없어. 내가 너한테 미리 투자하는 거야. 너는 아주 예쁘고, 똑똑한 아이야. 이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거니까 마음 푹 놓고 살아도 돼.”…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눈을 떴다. 낯선 방이었다. 윤희는 커다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커다란 방에 고급스러운 가구가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서 여관 같은 숙박업소는 아니다.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현기증이 덮치듯 엄습해왔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뜨니 창문이 보였다. 얇은 커튼이 쳐진 창문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윤희는 검은색 실크 잠옷이 입혀져 있었다. 침대에서 내려섰을 때 옆 테이블 위에 놓인 메모 쪽지가 보였다. ‘윤희. 놀라지 말고 내가 올 때까지 집안에서 푹 쉬고 있어. 거실 냉장고 열면 마실 것도 있으니까 목마르면 꺼내 먹고. -이민지.’ 이민지 배우의 집? 비로소 윤희는 희미한 기억을 떠올렸다. 극단 카프카 회식에서 글라스 잔 가득 소주를 석 잔이나 마셨던 기억이 났다. 쓰러진 나를 이민지가 자기 집으로 데려온 것인가. 창밖으로 다가가 보니 내려다보이는 까마득한 도심 풍경이 현기증을 일으켰다. 자동차들이 마치 줄 맞춰서 기어가는 딱정
“김윤희 씨. 일을 잘하시네요. 무대 경험이 많은가 봐요.” 공연이 끝난 다음 날 윤희는 극단 카프카 단원 중 엑스트라급 배우들 네 명과 함께 공연장 정리를 했다. 소품을 박스에 담아 트럭으로 들어 나르고 있을 때 손정우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 단원이 말을 걸어왔다. 웃을 땐 잇몸이 많이 드러나는 순박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아닙니다. 시골 고등학교 연극반에서 조금 경험했을 뿐이에요.” “그런데도 무대 철거에 척척 손을 맞추시네요. 눈썰미가 좋으신가 봐요.” “좋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윤희는 웃어 보이며 칭찬에 답례했다. 공연 소품들을 빌딩 지하창고에 다 옮겨 놓았을 때는 오후 두 시가 훨씬 지난 시각이었다. 사무실 한구석 아크릴 칠판에 씌어있는 공지글이 보였다. 저녁에 쫑파티가 있을 예정이니 모두 참석하라는 내용이었다. “김윤희 씨. 이리 좀 오세요.” 사무실 저쪽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금테 안경을 쓴 여자 단원이었다. 윤희는 여자 단원 앞으로 갔다. “우리 극단에 처음 들어오는 사람은 하는 일이 많아요. 청소나 쓰레기 치우는 일, 탕비실 관리하면서 차를 타내는 일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에요.” 여자의 음성에서 차가운 느낌이 뚝뚝 흘렀다. “네. 알겠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