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이 모레츠 주연의 넷플릭스 영화 ‘마더/ 안드로이드’에는 ‘KOREA’가 두 번 언급된다. 안드로이드의 공격을 피해 살아 남기 위해 보스턴으로 가려는 주인공들은 궁극적으로는 ‘한국으로 가는 배를 타겠다’고 말한다. 덧붙이기를 ‘거기가 가장 안전하다고 들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극 후반에 이들은 실제로 한국으로 가는 기회를 얻는다. 아이를 낳은 여주인공 G(조지아, 클로이 모레츠)는 두 다리를 잃은 아이의 아빠 샘(알지 스미스)과 함께 한국에서 온 요원 셋을 만나 갓 낳은 아이를 눈물과 함께 한국으로 보낸다. 특히 뒷 장면은 6·25 전쟁 후 숱한 전쟁고아를 미국으로 입양 보냈던 시대를 생각하면 이상한 데자뷔를 준다. 이제는 미국인들이 전쟁보다 더한 전쟁을 겪으면서 아이를 거꾸로 한국으로 보내고 있는 셈이다. 영화 속 AI 인공지능 안드로이드의 반란은 어쩌면 지금의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 상황을 은유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다만 이상한 것은 한국 쪽에서 나온 여성 두 명, 남성 한 명의 복장과 스타일인데 이들 모습이 남한보다는 북한 사람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이 영화를 만든 제작진의 디테일이 조금 떨어진다는 감을 준다. 그들에게는 남과 북이, 남한 사람
영화 ‘프랑스’의 제목이 프랑스인 것은 이 영화의 주인공 이름이 프랑스이기 때문이다. 국내에 새로 개봉되는 프랑스 영화 브루노 뒤몽의 ‘프랑스’는 프랑스 정치의 지난 20년, 그리고 프랑스 영화의 지난 20년이 어떻게 서로 조우하고 대구(對句)를 이뤘는지를 보여준다. 영화가 결코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정치가 때론 얼마나 영화적인 가를 보여준다. 영화는 정치이고 정치는 영화이다. 두 가지의 사전적 전제에 대해 일단 좀 풀고 가야 한다. 먼저 프랑스 정치의 지난 20년. 프랑스는 현재의 마크 롱 대통령으로 오기까지 우연과 사단을 꽤나 겪었다. 20년 밖을 슬쩍 보면 ‘코아비타숑(Cohabitation: 동거정부)’이긴 했어도 그럭저럭 정치적 안정성을 유지하며 살아왔다. 프랑수아 미테랑(사회당 대통령)과 자크 시라크(보수당 총리)의 결합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지난 20년간(정확하게는 15년간), 그러니까 니콜라 사르코지에서 프랑수아 올랑드 그리고 지금의 에마뉘엘 마크롱에 이르기까지 보수와 진보, 중도를 오가며 극심한 혼란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올랑드 이후 가장 촉망받았던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의 섹스 스캔들과 그의 몰락은 국민들 간에 퍼진
영화의 시작은 프랑스이다. 할리우드가 아니다. 루이와 오귀스트 뤼미에르 형제는 파리에서 ‘기차의 도착’,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 등을 찍었다. 종주국인 만큼 프랑스는 늘 영화의 새로움, 혁신을 주도해 왔다. 1950~1970년대까지의 누벨바그를 주도했던 프랑수와 트뤼포, 장 뤽 고다르의 영화들이 그랬다. ‘네 멋대로 해라’, ‘4백번의 구타’ 등이 있었다. 1980년대~2000년대는 누벨 이마쥬의 감독들이 전성기를 누렸다. 레오 카락스가 대표했다. 뤽 베송은 할리우드형 대중영화들을 만들었다. 그의 ‘레옹’은 한국에서 특히 인기가 높았다. 2000년대, 특히 2010년대에는 뤽 베송류의 영화에 회의와 각성이 일었던 시기이다. 브루노 뒤몽과 자크 오디아르의 영화들은 이른바 ‘프랑스적’ 영화의 복원을 알리는 시그널이었다. 이 둘은 아직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뒤몽은 최근 ‘프랑스’라는 영화를 찍었다. 오디아르는 ‘러스트 앤 본’ 등의 영화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리고, 그래서, 마침내 2020년대에 이르자 급기야 ‘新인류’급에 해당하는 감독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30대 여성감독 쥘리아 뒤쿠르노가 그렇다. 그녀의 영화 ‘티탄’에 나온 ‘갑툭튀’ 여배우 아가트
아마도 이 지면을 통해서 한번 얘기한 바 있을 것이다. 일본 석학 다치바나다카시 얘기다. 『그는 도쿄대생은 죽었는가』라는 저서에서 “세상은, 결코 스페셜리스트가 지배하지 않는다, 제너럴리스트가 이끈다”고 했다. 이 말을 요즘처럼 뼈저리게 느끼는 때도 없다. 국민의 힘 대통령 후보 윤석열 씨가 그 점을 상징처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후보는 역설적으로 지금의 한국사회에 중요한 이정표를 남기는 중이다. 윤석열 후보와 같은 스페셜리스트는 자신이 필요에 의해 쌓은 지식 공학의 범주에서만 세상을 보고, 또 잣대를 만들어 낸다.(모든 사람들은 잠재적 범죄자이다. 사모펀드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으며 그래서 ‘조국은 나쁜 놈’이라는 생각이 주입돼 있었다.) 스페셜리스트들은 대개 수직주의자들이다.(주 120시간 노동시간 발언.) 엘리트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계급과 계층에 대한편견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자유를 알지 못한다는 발언.) 반면 제너럴리스트는 광범위한 지식을 구하려 노력한 덕에 그래도 세상을 균형있게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제너럴리스트들은 응당 수평주의자가 되며 세상에서 평등과 함께 분배에 대한 올바른 의식이 얼마나 중요한 지
에릭 홀트하우스의 저서 ‘미래의 지구 – 온난화 시대에 대응하는 획기적 비전’에 따르면 2030년에는 지구 멸망의 시그널들이 본격화 된다. 당신은 내일, 혹은 며칠 후나 몇 달 후에 세상이 망한다면, 그래서 다 죽을 수밖에 없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뭐 근데 그런 질문을 하는 영화들은 많다. 예컨대 로렌 스카파리아 감독이 만든 ‘세상의 끝까지 21일’에서 주인공들은 마지막 순간에 가족과 친구를 만나러 간다. 스티브 카렐은 아내보다는 옛 여자친구를 찾으러 간다. 키이라 나이틀리는 다른 지역(뉴욕에서 시애틀로)에 있는 가족들에게 가려고 한다. 이 영화의 원제는 ‘세상이 끝나는 날에 친구 찾기, Seeking a friend for the End of the World’였다. 대부분 가족을 만나러 가지만 또 대부분은 ‘막 산다’. 매일 밤 파티를 열고 아무나 붙잡고 섹스를 하는 데다 임신이나 성병도 신경 쓰지 않는다. 살이 찌는 것 따위는 더욱 더. 3주 후면 다들 죽는데 뭐. 곧 내가 죽을 운명이라면 과연 무엇을 할까의 질문은 그걸 아무리 코믹하게 그린다 해도 마음속은 서서히 침잠하게 되기 마련이다. 우울에 빠지게 된다. 넷플릭스의 새 영화 ‘돈 룩 업’은 지
하마구치 류스케의 화제작 ‘드라이브 마이 카’는 몇 가지 점에서 주목을 끈다. 무엇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단편 원작을 영화로 만들었다는 것 하나, 러닝타임이 3시간이나 된다는 점(그의 전작 ‘해피 아워’는 장장 5시간28분짜리이다)이고, 거기에 오프닝 타이틀이 나오기 전인 인트로 부분이 물경 50분이나 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평자(評者)들을 제일 깜짝 놀라게 하는 점은 그 50분이 하루키의 소설 단 몇 줄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류스케의 영화적 상상력이 하루키의 문학적 상상력에 못지않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영화는 문학을 따라 갈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류스케는 그걸 뛰어 넘으려 한다. 신세대다운 발상이다. 류스케는 1978년생, 이름하여 M세대에 가깝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50분을 할애한 하루키 소설의 분량은 이 작품이 수록된 ‘여자 없는 남자들’의 26페이지에서 29페이지까지 단 세 장이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지만 아내는 이따금 다른 남자와 잤다. 가후쿠가 아는 한 상대는 모두 네 명이었다. 최소한 정기적으로 성적인 관계를 가졌던 남자가 네 명이었다는 얘기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주인공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는 아내가 죽
1613년에 이탈리아 페샤(pescia)의 한 수녀원에서 벌어진 섹스 스캔들이 500년 만에 영화 ‘베네데타’로 부활했다.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 거장인 폴 버호벤이 만들었다. 폴 버호벤은 83세로, 우리에겐 ‘원초적 본능’이나 ‘로보캅’, ‘쇼걸’, ‘스타쉽 트루퍼스’란 영화로 기억되고 있는 인물이다. 전작인 ‘엘르’란 작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제는 할리우드보다 파리를 근거지로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다. 솔직히 그는 언제부턴가 퇴물 감독으로 취급받아 왔다. 그러나 폴 버호벤은 폴 버호벤이다. 특히 이번 신작 ‘베네데타’는 노령인 그의 거의 마지막 역작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어쩌면 오랜 숙원의 작품이었을 것이다. ‘베네데타’는 실화다. 1613년에 벌어진 한 종교재판에 대한 기록이다. 이 기록은 현대의 스탠퍼드대 역사학과 주디스 브라운 교수에 의해 ‘수녀원 스캔들 –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한 레즈비언 수녀의 삶(By Judith C. Brown. 214 pp.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이란 논문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폴 버호벤은 그 역사서를 매우 도발적인 드라마로 뒤바꾸어 놨다. 영화는 매우 외설적이고 야하다.
이건 아니다. 지난 6일의 국민의힘 선거대책위원회 출범식에서 쏟아진 말들이 그랬다. 이건 아니다. ‘지긋지긋한,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이라니. 누가 그에게 그렇게 왜곡된 연설문을 써서 줬을까. 미완성이긴 해도 한반도 종전을 이끌어 가고 있는데다 코로나19의 절대적 위기 속에서도 세계 8위의 무역 대국을 이루어 낸 정부가 무능하다니. 한치의 부정도 없는, 심지어 아티스트인 아들이 공적 지원을 받는 것조차 시비를 받을 정도로 투명한 대통령이 부패하다니. 그것이야 말로 숱한 ‘차떼기 뇌물’의 역사와 국정농단의 과거를 지닌 정당의 후보가 할 말은 아니지 않은가. 스스로가 창피하지 않을까. 아니면 아예 염치라는 인식이 없는 것일까. 그러므로 해서 더더욱 이건 아니다. 여성은 군 복무를 하지 않으니 4분의 3만 권리를 행사하되 자식을 2명 낳은 여자는 예외로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인재랍시고 영입하려 했던 당사자들이 ‘스트릿우먼 파이터’를 축하 댄스 무대로 장식한다. 한 마디로 헛웃음이 나올 일이다. ‘스우파’의 스피릿은 그런 것이 아니다. 공격적일 만큼 당당한 여성상을 시대가 받아들여야 하며 또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음을 스스로 증명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막
일별(一別)만 가지고 영화를 논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럴 수 있는 영화가 있고 그럴 수 없는 영화가 있다. 제인 캠피온의 역작 ‘파워 오브 도그’는 그럴 수 없는 작품이다. 이 장대하면서도 웅장한 작품은 펄 벅의 ‘대지’를 연상시키게 하면서도 록 허드슨과 엘리자베스 테일러, 무엇보다 제임스 딘의 유작(遺作)이기도 한 ‘자이언트’를 연상시킨다. 한편으로는 이안 감독이 만든 ‘브로크백 마운틴’을 닮았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걸작 ‘데어 윌 비 블러드’처럼 미국이 어떻게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갔는지, 그 과정에서 이른바 대규모 자본의 원시적 축적과 이른바 부호와 상층 부르주아의 탄생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 주기도 한다. ‘데어 윌 비 블러드’처럼이 영화 ‘파워 오브 도그’도 위대한 미국 현대사이면서 기이하게도 그 안에 담겨져 있는 핏빛의 음모, 치정, 살인의 냄새를 가득 풍긴다. 앞서 언급한 모든 영화를 합친 느낌이 난다. 그것도 매우 도발적으로. 무엇보다 매우 놀라운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무릎을 친다는 것은 단순한 수사학(修辭學)이 아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결론은, 보는 사람들의 뒷통수를 가감없이 정통으로 때린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이해하
웨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 ‘프렌치 디스패치’를 보고 나면 이제는 거의 사멸되다시피 한, 그래서 다소 시대착오적인 어휘들이 떠오른다. 예컨대 고색창연(古色蒼然)하다 같은 것, 혹은 경이(驚異)롭다 같은 것이다. 이 영화는 언제부턴가 사라져 가고 있는 중요한 세상의 가치, 삶의 원칙에 대한 얘기다. 무엇보다 그 회한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사라지고 있는, 폐간 직전에 놓여 있는, 한 유수의 잡지에 대한 얘기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우리 말로 약간 고쳐서 의역하면 ‘프랑스발(發) 특종’이 되겠다. 프랑스 앙뉘라는 가상도시에서 발행되며 정치·사회·문화·생활·음식과 지역에 대한 갖가지 뉴스를 다루는 고급 잡지다. 미국 캔사스 출신의 발행인이자 편집장인 아서(빌 머레이)는 어느 날 뜻한 바 있어 앙뉘에 왔고 ‘피크닉’이란 이름의 잡지를 인수해 지금의 ‘프렌치 디스패치’로 바꾸고 키워냈다. 그렇게 캔사스에 앙뉘를, 앙뉘에 캔사스를 가져다 놓는 일을 한다. 곧 세계를 지역에, 지역에 세계의 소식을 변증(辯證)시킨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매우 독특한 글로벌 잡지로 성장시킨다. 월간지 ‘프렌치 디스패치’는 소수의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하며 기자와 기사의 수준이 매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