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과 가을에 경주를 찾았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산까지 자세하게 훑어보려면 한 번의 여행으로는 어림없었기 때문이다. 맛집 순례도 여행의 큰 즐거움인데 생고기집과 횟집, 커피숍 등 찾아간 곳 모두 대단한 수준이어서 깜짝 놀랐다. 획일적인 맛을 자랑하는 프랜차이즈 음식을 비웃기라도 하듯 맛이 개성적인데다 깊었다. 생고기집은 인상적이어서 이틀 연속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우 암소 갈빗살과 삼겹살 모두 최고 품질이면서도 가격은 저렴한 편이었다. 60대 사장은 그 비결을 젊어서부터 고기를 다뤄 안목과 확보돼 있는 거래선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된장찌개도 담백하면서 깊어 자주 손이 갔는데 누군가 레시피 정보 제공 가격으로 2000만 원을 제시했지만 넘기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튼 생고집의 맛 비밀은 줄기차게 한 우물을 판 뚝심과 세월에 있을 것이다. 보문단지 쪽 뒷골목에 있는 횟집은 구식 건물에 들어서 있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이렇다 할 정보 없이 찾아갔기에 맛집 순례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바구니에 담겨져 나온 참가재미회에서 윤기가 흘렀던 것이다. 쫀득한 식감에다 양도 넉넉해서 고급 일식집이 부럽지 않았다.
수도권 A도시에서 영화관을 잠시 운영한 적이 있었다. 상영관이 8개인데다 오락실과 피자전문점 등도 직영이어서 규모가 큰 편이었다. 이 때문인지 대표이사 실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내방객이 끊이지 않았다. 내방객 중 잊혀 지지 않는 부류는 단연코 투자 권유자들이다. 그들은 A4 용지 20~30쪽짜리 투자설명서를 들고 투자를 권유했다. 투자금은 1억 5000만 원에서 많게는 10억 여 원 규모였다. 그런데 공통점은 투자만 하면 별 위험부담도 없이 쉽게 거액을 벌 수 있다는 점이었다. 땅 짚고 헤엄치는 격의 투자 제안에 눈이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기일이 촉박했다. 귀하에게만 기회를 주는 고수익 보장 투자인 만큼 빨리 결정을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심리적 압박을 가했는데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저토록 좋은 투자는 자신들이나 친인척이 아닌 사람에게 기회가 올 리 만무하다는 판단이 섰다. 아무리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투기성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투자 권유서는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교과서일 수 있다. 당시 벤처기업 창업으로 큰돈을 번 청년들에 대한 미담기사가 연일 쏟아져 나왔다. 유행
필자는 본 난(9월 7일 자)을 통해 '서사 부재 시대의 비극'을 쓴 바 있다. 그런데 재독 철학자 한병철 선생의 『서사의 위기』가 8일 뒤인 15일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이 먼저 출간되었다면 읽은 뒤 보다 풍부하게 글을 전개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임이 인다. 필자는 자신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칼을 휘두르는 흉악 범죄가 유행이다시피 하는 현상을 서사의 부재에서 찾고자 했다. 한 선생이 책의 근저로 삼고 있는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근대는 (대)가족 공동체의 붕괴를 통한 개인의 출현을 근간으로 한다. 근대 사회는 공동체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인 것이다. 특히 근대 후기로 접어든 한국의 경우 학력계급사회가 되어 개인의 파편화·원자화를 더욱 부채질한다. 카페가 건물마다 하나씩 들어서 있는 것은 잃어버린 공동체에 대한 노스탤지어로 작용하는 것으로 필자는 보았다. 이는 서사 부재 시대라는 강력한 반증이 아닌가 하고 반문한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통한 서사의 부재를 말했다면 한병철 선생은 SNS를 분석의 틀로 삼아 서사의 위기를 풀어나간다. 그의 분석을 압축하면 페이스북 등 SNS는 서사가 아닌 셀링 스토리(S
우리 아파트 단지 앞에 또 카페가 들어선다. 크고 작은 게 여러 개 있는데도 몇 평 되지 않는 작은 카페가 들어서니 의아할 따름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동네는 카페 천국이다. 휴일 날 이 카페 저 카페 앞을 지나치다보면 깜짝 놀란다.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동네만의 특징은 아니다. 우리나라 도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건물마다 카페가 하나씩 있고, 그 카페마다 사람들로 꽉 차 있는 모습은 진기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카페 공화국인 셈이다. 왜 이런 현상이 빚어지는 것일까?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농촌 공동체 사회가 붕괴되고 급격하게 산업화·도시화 되면서 삶 자체가 파편화·원자화한 게 큰 이유일 것이다. 이를 테면 상실한 공동체 사회의 서사에 대한 희구가 카페 천국으로 나타난 게 아닌가 한다. 사람들은 카페에서 세상살이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스스로 서사적 존재임을 새삼 확인하고 안심할 것이다. 공동체 일원으로서 균형 감각을 찾아 이를 삶의 가늠자로 삼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카페는 인문학적으로 매우 소중한 공간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사회화하는 존재인 인간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카페 천국의 뒷
소설이나 영화를 읽거나 보다보면 메시지와 상관없는 것들은 지나치기 마련이다. 이른바 사각지대이다. 그런데 때때로 이 지점이 메시지보다 더 비중 있게 기억되기도 한다. 어떤 소설 혹은 영화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 채. '인간은 폭력성의 소우주'란 말도 그런 것 중 하나다. 메시지를 떠받치는 말이 아니어서 지나쳤다가 개별로 기억한 것이다. 여운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인데 이유는 간단하다. 말 그대로 인간은 폭력적 존재인 까닭이다. 인간은 알게 모르게 폭력을 행사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이 말을 꺼내자마자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한 친구는 "오랫동안 인간은 자연과 인간과 투쟁하면서 살아왔기에 폭력이라는 DNA가 몸에 배어있다"고 말한다. 살벌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일테면 인간이라는 동물의 생화학적 알고리즘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폭력은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나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아름다운 것이기도 한 셈이다.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우리 안의 폭력 찌꺼기는 나쁘게 작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신도 모르게 습관처럼 행사하는 폭력은 생각보다 광범위하고 깊다.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내뱉는 말에도 고스란히 배어있다.
오래 전의 일이다. 분당에서 책모임 할 때 당시 대학생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들은 이른바 운동권 선배들을 좌파 꼰대로 지칭했다. 그들에게는 좌파나 우파나 한물 간 ‘올드 보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시각 앞에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민주화 운동 세대라는 자부심이 무너져 내리면서 아리고 쓰라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수긍하게 되었다. 몇 가지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세상이 변해도 너무 변했다. 80년대의 획일주의와는 정반대의 다원주의 사회가 들어섰다. 둘째, 어떤 현상이든 종합적으로 봐야하는 사회가 되었다. 민주주의나 정의 등 굵직한 개념도 사안별로 들여다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셋째, 지난 시절의 지식은 달라진 시대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회과학도 많이 깊어지거나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심리학과 물리학 등 인간과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지식이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그런데도 이른바 민주화 운동 시대의 산물인 586 정치인은 변화에 전혀 부응하지 못했다. 실용주의 시대에 걸 맞는 어젠다 설정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살인적 양극화에 따른 불평등 해소에도 속수무책이었다. 케케묵은 민주 대 반민주 논리로만 일관한 것이다. 독
단편 소설 '도둑맞은 가난'의 작가 박완서 선생이 살아 있다면 김남국 사태를 보고 혀를 끌끌 찼을 것이다. 자신의 시대에 있었던 특권층의 가난 코스프레는 코스프레로 명명하기조차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1975년에 발표된 소설은 부자들이 많은 걸 갖췄는데도 그것으로 부족해 가난까지 치장 품으로 두려는 세태를 비판한다. 미싱사인 화자는 도금 공장에 다니는 상훈과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동거에 들어간다. 그런데 상훈은 쥐꼬리만큼 월급을 받는 공장 노동자 답지 않다. 씀씀이가 헤픈 것이다. 미싱사는 상훈을 심하게 나무란다. 그러던 상훈은 한동안 잠적했다 나타나 자신을 대학생이자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소개한다. 가난을 경험해보라는 부모의 명에 따라 잠시 공장에 다녔다고 고백한다. 미싱사는 상훈의 말을 듣고 자신의 부모가 가난해지면서 부자에게 휘둘려 가족 네 명이 자살했던 절망보다 더한 절망을 느낀다. 그녀는 소설에서 백미로 꼽히는 혼잣말을 한다. "부자들이 가난을 탐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해 본 일이 없다. 그들의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이런 7
정지아의『아버지의 해방 일지』를 읽고 나면 싱겁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한 시대의 모순을 온 몸으로 막아내고자 몸부림 친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박진감 넘치는 서사가 펼쳐지는 것도 아니어서 실망감마저 인다. 실패한 인생의 그저 그런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이 소설인 까닭이다. 소설은 문제적 인간의 패배에 대한 기록이며 우리는 그 패배에서 교훈을 얻기 마련이다. 아버지는 좋은 세상을 꿈꾸며 빨치산이 되어 현실에 역류하다 오랜 수감 생활을 한다. 하지만 동지였던 장기수들과 달리 아버지는 자수를 했기에 일정 형기를 마치고 고향인 구례로 돌아온다. 아버지는 여느 농부들처럼 농사에 매진한다. 유물론자로서 관념적으로는 투철하지만 일상은 그렇지 않다. 집안일이나 농사일이나 서투르기 그지없다. 노동 중심의 이데올로기 신봉자로서 낙제가 아닐 수 없다. 아버지는 심지어 초등학교 동창들과 선술집에 출입하며 주모의 엉덩이를 만지기까지 한다. 성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에 저항은커녕 무릎을 꿇은 것이다. 빨치산에게 일상은 이처럼 뛰어넘기 힘든 벽이다. 하지만 그에게 일상은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얽히고설켜 있는 인간 관계망이다. 농사일 하다 동네 사
넷플릭스의 다큐 시리즈 파급력이 만만치 않다. 『나는 신이다』를 보며 한숨 내쉰 사람이 한두 명 아닐 것이다. 보편과 상식의 세계에서 상상조차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검찰총장이 입장을 표명하는 등 여론이 들끓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의문을 하나로 축약하면 '어떻게 사람들이 뻔한 거짓말에 그리 쉽게 속아 넘어갈 수 있을까?'가 아닐까 한다. 실제 다큐에서 다룬 사이비 교주들은 누가 보더라도 특별난 게 없는 사람들이다. 학력이나 지나온 삶을 보면 보통 사람들보다 현저하게 뒤처진다. JMS 정명석의 경우 학력이 초졸인데 소개된 사이비 교주 대부분이 저학력자들이다. 기독교 교단에서 엘리트 코스는커녕 평범한 과정도 제대로 밟지 않았다. 반면에 그들을 떠받든 신자들은 대졸 학력이거나 중산층 이상이다. 성폭력 혐의로 수감 중인 이재록이 세운 교회에는 회계사 등 사회의 엘리트들이 적잖이 포진돼 있다. 이들이 성금 등으로 한 번에 건네는 봉투도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에 이른다. 경제적 능력도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준다. 정명석이 수배 중이었을 때 법률 팀을 이끈 신도는 검사와 국정원 직원, 육사 출신 군 간부, 대학교수 등 사회 엘리트층이었다. JMS 교회 중
"코스모스 /또 영 /돌아오지 않는 /소녀의 /지문(指紋)". 박용래 시인의 시 '코스모스' 일부분이다.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무수한 이야기가 상상의 나래를 펴고 다가오는 느낌을 받는다. 빵 한 쪽 살 수 없는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가슴이 뛰고 풍부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누구나 경험하는 첫 사랑은 이야기다. 필자에게도 첫 사랑은 이야기다. 고교시절 초등학교 동창 여자아이와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매수가 매번 10장 분량이었다. 200자 원고지로 치면 40~50장 정도였으니 그 시절 쌓았던 이야기는 공주 공산성을 구축하고도 남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 편지는 돌아오지 않는 그녀의 지문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야기는 첫 사랑에만 얹혀있는 게 아니다. 목로주점에 가서 단 5분만 있어보라. 사람 수 몇 곱절 분량의 이야기들이 오고가는 걸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라는 호모 픽투스(Homo fictus)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야기라는 거미줄을 떠나 한시도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죽어서도 이야기로 남는다. 오죽했으면 조너선 갓셜이 그의 명저 『스토리텔링 애니멀』에서 "인간에게 이야기는 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