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전후에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던 제바스티안 하프너의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돌베개 출간)을 읽으면 허탈해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 하프너는 저널리스트답게 히틀러에 관한 기록을 건조하게 따라간다. 하지만 거리두기가 오히려 실체를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 과거를 현재진행형으로 만든다.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굶어 죽은 러시아군 포로 300만 명. 폴란드에서 유대인 200만 명 살해. '쓸모없는 식충이'로 분류된 독일인 10만 명 살해. 집시 근절작전으로 독일인 50만 명 살해. 폴란드 지도층 근절 정책으로 100만 명 살해... "히틀러는 오직 자신의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 수많은 해롭지 않은 사람들을 죽게 하였다. 그런 측면에서 그는 알렉산드로스나 나폴레옹과 같은 범주에 속하지 않고, 여성 연쇄살인범 퀴르텐과 소년 연쇄살인범 하르만과 같은 범주에 속한다. 그의 손에 희생된 사람은 몇 십 명 또는 몇 백 명 단위가 아니라 몇 백 만 명 단위로 헤아리게 된다. 그는 그냥 대량학살을 행한 범죄자이다." 하프너를 떠나 이제 우리가 빈 칸을 채워야 한다. 히틀러의 대량 학살, 제노사이드를 과연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자본주의라는 구조적 모순이 낳은 필연인가? 아
제20대 대선 마지막 토론에서 이재명 후보는 윤석열 후보에게 '대장동 특검'을 해야 한다며 몰아붙였다. 무려 다섯 번이나 대답할 것을 재촉했다. 이 장면만 보면 단군 이래 최고의 부동산 사기사건인 대장동의 몸통이 윤 후보일 것이라는 심증이 굳어질 만 하다. 따라서 이 장면은 이 후보에게 대선 토론의 가장 눈부신 성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힘입어 이 후보 쪽은 윤 후보를 아예 대장동 몸통이라고 못을 박았다. 때 맞춰 대장동으로 구속 수감 중인 김만배 씨와 전 언론노조위원장인 신학림 씨 간 6개월 전 통화 녹취록이 공개되었다. 김 씨가 검사였던 윤 후보에게 대장동 불법 대출에 관한 무마를 관철시켰다는 것이 요지였다. 민주당은 이 녹취록을 SNS에 도배질 하다시피 했다. 이 후보 명의의 모바일 문자로도 녹취록을 무차별적으로 뿌렸을 정도였다. 민주당 프로파간다 김어준 씨의 활동무대인 TBS 애용 리얼미터 대선후보 지지율 여론조사에서 이 후보는 윤 후보에게 1~5% 뒤지고 있었는데 대선 결과는 불과 0.73%로 좁혀졌다. 이에 대한 분석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하겠지만 '대장동 몸통은 윤석열'이라는 민주당의 프레임도 한몫했다는데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듯하다.
"장미가 그곳에 피어 있기 전에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 장미가 그곳에 피었을 때는, 아무도 장미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 아, 출발도 한 적 없는 것이, 목적지에 도착했구나. / 하지만 모든 일이 워낙 이렇지 않았던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아, 어떻게 우리가 이 작은 장미를 기록할 것인가?' 마지막 연이다. "출발도 한 적 없는 것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더군다나 시는 "모든 일이 이렇지 않았던가?" 하고 비논리의 일상성을 강조하기까지 한다. 사회주의 체제였던 동독에서 1954년께 이런 시를 썼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인민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아야 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미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이성으로는 알 수 없고,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그 무엇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시인은 알고 있고, 보고 있다. 가능케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상상력일 터이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불가지의 답답한 세상을 다른 세상의 눈을 통해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고대인들의 신화와 그 이후의 시와 소설 등 예술이 그런 매개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르지 않다. 다시 물어보자. 장미
중국의 소설가 옌롄커의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가 한국에서 영화로 만들어져 개봉되었다. 이 소설은 판금조치되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영화로 제작될 수 없다. 한국의 장철수 감독이 영화화한 배경에는 이런 까닭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원작은 서사가 굵직하고 남녀 간의 육체적 사랑이 극적이어서 영화문법과도 일맥상통한다. 중국 인민군 사단장 관사 취사병인 우이왕은 사단장 부부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인민을 위한 복무라고 굳게 믿는다. 그러나 사단장이 장기 출장을 떠난 사이 그의 젊은 부인 류롄에게 유혹을 받는다. 우다왕이 거듭 뿌리치자 류롄은 "인민을 위해 어떻게 복무하겠다는 거지?" 물으며 "인민을 위해 복무해야지. 어서 벗어." 하고 재촉한다. 그는 끝내 무너져 내리고 그녀에게 "정말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군. 잘했어. 아주 잘했어."라는 찬사를 받는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爲人民服務)'는 모택동의 유명한 연설 제목으로 혁명정신을 상징하는 언어다. 그런데 소설은 이 성(聖)스러운 언어를 성(性)스러운 언어로 끌어내린다. 변질되고 타락한 혁명을 극명한 대비를 통해 드러낸 것이 이 소설의 백미다. 인간해방을 내건 공산당 체제도 억압과 부패로 찌들어 있다는 서사적 보고
한국의 20대가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대통령의 인사권을 무력화한 이른바 윤석열 사태 정국이 아닌가 한다. 당시 검찰의 선택적 수사에 분노한 시민들은 대규모 촛불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20대는 생뚱맞게도 공정을 외쳤다. 조국 씨 부부의 자녀 스펙 쌓기야말로 우리 사회가 불공정하다는 증표라는 것이었다. 일각에서는 기성 언론이 정권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 우리 사회의 낯선 언어인 공정을 내세웠는데 소가 뒷걸음질하다 쥐 잡는 격으로 예기치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아무튼 20대가 부르짖은 공정은 한국 사회의 키워드로 급부상했다. 공정이 모든 영역으로 파고들어 20대의 영향력을 실감하고 있는 이즈음이다. 하지만 이는 20대의 출현 그 서막에 불과한 것인지 모른다. '공정 사건' 이후부터 그들이 선거의 가장 큰 변수로 자리 잡아 기성세대의 판을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20대 대선 후보 지지율에 관한 여론조사 결과는 20대 존재감으로 정리된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헤럴드경제 의뢰로 지난 2~3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조사에서 20대의 국민의힘당 윤석열 후보에 대한 지지율은 53.7%로 과반을 넘었다. 리서치뷰가
택배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있는 이즈음 동네 식당에서 밥 먹다 중년 남성 몇이서 욕하는 것을 들었다. 그중 한 사람이 택배 노동자들의 고된 노동을 동정하자 어떤 이가 "누가 그 일을 시켰어? 자기들이 하고 싶어서 한 일이니 죽든 살든 해내야지!" 하고 쏘아붙였다. 그 말에 나머지 사람들은 토를 달지 않았다. 얼마 전에는 동네 버스 정거장에서 희한한 장면을 목격했다. 젊은 친구 A는 동년배로 보이는 B의 짐을 들어 버스에 올려주었는데 배려받은 그가 나머지 짐마저 들어 올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자리에 앉은 A는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머지 짐 하나를 들고 버스에 올라탄 B는 A에게 도와줄 바에는 끝까지 도와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나무랐다. 급기야 A가 모르는 사람에게 선의를 베푼 제가 잘못입니다, 하고 사과하는 촌극이 빚어졌다. 이런 반사회적 인격 장애 사례는 과연 일반화할 수 없는 특별한 것일까? 그럴 것이다. 하지만 포털 뉴스에 달린 댓글을 보면 생각은 달라진다. 지금 당장 방역 당국의 소상공인 영업 제한에 관한 뉴스에 어떤 댓글이 주를 이루는지 들여다보자. "자영업자들에게 왜 돈을 주냐? 세금이 아깝다.", "이 기회에 저것들 망해야 한다.
지난해 말 듣도 보도 못한 유언을 접했다. "나를 포함해 사람 개개인이 하느님이란 걸 깨달았으니 여한이 없다. 담백하게, 단순하게 이별할 때가 되었다. 숨 떨어지면 곧바로 화장을 해주기 바란다." 이게 다였다. 생에 대한 미련이나 슬픔이 엿보이지 않는 유언 앞에 그저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신문 기자 출신의 유언 당사자는 성품 자체가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기성 언론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삐딱'했다. 부당한 취재지시는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반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으려고 애썼다. 신입 기자 시절에 대선배인 그를 학생운동권 출신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학생운동권과 거리가 멀었다. 어떤 이데올로기를 거명하거나 궁금해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다만 그는 조금이라도 옳지 않은 일을 보면 '그건 아니다!'고 소리를 높였다. 일테면 기자실을 통해 정부 부처나 지자체, 기관 등이 기자들에게 해외여행이나 각종 혜택을 부여할 때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선을 그었다. 지금은 개선이 많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공짜 여행 등 관이나 권력의 기자들에 대한 특혜가 적잖이 주어졌었다. 그는 이즈음 유행하는 '강약약강'(강자에게 약하고
'양비론'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떤 명제나 사안을 두고 대립이 있을 때 A와 B 모두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을 일컫는다. SNS에서 이를 일명 '모두 까기'라고 하는데 단어 뜻이 보다 명확하게 드러나는 듯하다. 하지만 양비론이라는 말에는 부정적 의미의 뉘앙스가 있다. A와 B를 비판함으로써 이익을 취하려는 기회주의적 태도로 치부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이 어떻게 쓰이는지 잠시 대선 국면으로 가보자. 지금 대선은 우리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양상을 띠고 있다. 민주당 후보는 예외 없이 수구정당 후보보다 도덕성이나 진보적 가치에서 조금이라도 앞서 있었다. 그런데 사상 최초로 두 가지 중요 요소가 엇비슷하거나 조금이라도 뒤쳐져 있는 상황이다. 비호감도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와 파렴치한 전과 전력, 부패사건 연루 정황 등이 이를 입증한다. 이 상황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여야 후보를 동시에 비판한다. A와 B 모두 대선 후보로서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이런 비판을 무책임한 양비론 아니냐고 볼멘소리를 한다. 여기서 양비론이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진다. 기회주의적 태도라는 뉘앙스가 물씬한 양비론이 적확하게 쓰여졌는지 의심이 이는 것이다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토트넘의 새 감독으로 콘테가 부임하고 나서 변화가 뚜렷하게 감지된다. 가장 큰 특징은 모든 선수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는 점일 것이다. 전전 감독이었던 세계적 명장 무리뉴는 선 수비 후 역습을 즐겨 사용했기 때문에 수비수와 스피드 좋은 공격수가 중용되는 구조였다. 모든 선수들의 협력을 이끌어낼 수 없어 번번이 지고 말았다. 반면 콘테 축구는 올라운드 플레이기 때문에 포지션에 상관없이 선수 개개인 모두가 중용된다. 어떤 상대를 만나더라도 쉽게 지지 않는 축구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뜻할까? 구성원들의 능동적이고도 창의적인 협력이 최고의 경쟁력을 가져온다는 상식이자 진리 아닐까? 역사 속에서 이런 사례는 차고 넘친다. 하나만 들어보자. 고대 도시국가 아테네가 당시 거대한 제국 페르시아와 맞서 싸워서 대승을 하게 된 결정적 요인은 전제정치체제에서 벗어난 시민들이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싸움으로 인식해 올라운드 플레이를 펼쳤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서 얻는 교훈은 너무 뻔하지 않는가? 우리는 지난 80년대 민주화의 격랑 속에서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라는 통찰을 얻었다. 이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 사회 곳곳
뉴스가 무엇을 말하는지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촘촘하게 제시된 팩트 앞에서 사실과 정반대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적잖이 있다. 기성 미디어에 SNS에 기반한 1인 미디어의 가세로 그 어느 때보다 뉴스가 풍부해졌지만 뉴스 문맹률은 오히려 높아진 것 같다. 가짜뉴스의 범람을 이유로 꼽는 전문가들이 많다. 그러나 기성 언론의 가짜뉴스는 언제나 상수였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일테면 군사정권 시절 한국 언론은 정권의 보도 자료에 아첨이라는 양념을 더해 시청자·독자 앞에 뉴스랍시고 내놓곤 했다. 거기에 사실 여부를 가리기 위한 치열한 뉴스 정신이 들어있을 리 없다. 대통령의 인사권을 휴지조각으로 만든 윤석열 사태에서 보았듯이 이른바 언론의 받아쓰기는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팩트 왜곡과 조작 등 전통적인 수법이 더욱 교묘해지고 있는 이즈음이다. 그렇다고 그게 다는 아니다. 육하원칙에 입각한 사실 전달이 뉴스의 속성이자 생명이기 때문이다. 모든 언론은 운명적으로 사실을 전달할 수밖에 없다. 그다음은 독자의 몫이다. 일차적으로 제시된 사실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여기서 필요한 덕목은 판단 유보일 것이다. 헷갈리면 거부하거